142화. 일리드의 계획
일리드의 처소로 끌려가는 걸음 내내 황궁 하인들의 시선이 나를 따랐다.
“정말 리젠트라 공녀님이 황제 폐하를 독살한 걸까?”
“말도 안 돼. 공녀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
“하지만 황궁을 나가신 이후 폐하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것은 사실이잖아.”
등 뒤로 하인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볼테로가 이미 황궁 전체에 내가 폐하를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트린 게 분명했다.
그 거짓말로 이렇게 황궁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황궁은 이미 수도 기사단이 아닌 남부 기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전보다 경비도 삼엄했고 분위기도 무거웠다.
일리드의 처소 역시 수많은 기사들이 돌아가면서 경비를 맡고 있었다. 모르고 보면 황족이 아닌 죄인이 감금된 방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들어가십시오.”
병사들이 처소 문을 열고 그 안에 나를 밀어 넣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곧바로 무거운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이 빌어먹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책을 집어 들어 벽으로 힘껏 던졌다. 그 바람에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일리드의 방은 얼마 전에 왔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금방이라도 다른 곳으로 떠날 것처럼 어수선했고, 수도 도서관에 기증하려고 쌓아둔 책들도 그대로였다.
“이슈텔!”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일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그는 나를 보고는 놀라 단걸음에 내게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일이야?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잡힌 거야?”
“그렇게 됐어. 옥새를 들고 도망가다 당신 아버지의 기사들한테 붙잡히는 바람에.”
“다친 데는?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나는 없어. 그런데 에보니가…… 당신 아버지한테 맞았어.”
“하…….”
일리드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 역시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반쯤 얼이 나간 상태였다.
“그러는 당신은 왜 여기 갇혀있어? 당신 아버지가 황궁을 점령하면 가장 먼저 당신한테 왕관을 씌워줄 줄 알았는데.”
사실 아까 전 볼테로를 보았을 때부터 의문이 가던 차였다. 제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볼테로가 왜 일리드와 함께 있지 않고 이렇게 아들을 처소에 감금해두었을까.
“아버지가 황궁에 온 날, 내가 황궁 하인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반역자라고 비난했거든. 그러니 아버지 입장에선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걸 막으려 날 여기에 가둔 거야.”
“상황을 다 정리하면 그때 부르려고?”
“그런 셈이지. 그때는 황제가 되라고 날 압박할 거고.”
일리드가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슈텔 당신을 내게 보낸 속셈도 뻔하지. 내가 황제가 되길 거부하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인 거야.”
“안 그래도 볼테로 황자가 나한테 비슷한 말을 하더라.”
“아버지가? 뭐라고?”
“당신이 나한테 관심이 없어지면 그때 날 처형대에 올리겠다고 했어.”
내 말에 일리드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만큼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절대 그럴 일 없어. 그러니 그건 걱정하지 마, 이슈텔.”
“그 말을 믿고 싶긴 한데, 나에 대한 당신 아버지의 적대심이 너무 깊더라. 내가 할아버지를 닮았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목이 달아났을지도 모르겠던데.”
“미안해, 이슈텔. 전부 내가 사과할게.”
일리드는 나를 바로 보는 것조차 버거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당신이 잘못될 일은 절대 없어. 예전에 아버지가 시에라를 죽였을 때, 나와 심하게 싸우고 사이가 크게 벌어졌던 적이 있어. 그때 일을 반복할 생각이 있지 않는 한 당신한테 함부로 손대지 못할 거야.”
나 역시 아무리 볼테로라도 그리 쉽게 나를 죽이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문제는 나를 볼모로 북부에 무엇을 요구하느냐였다.
“일리드,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내가 옆으로 서 있던 몸을 그에게로 돌리며 물었다.
“내가 이렇게 계속 황궁에 억류되어 있는 한 북부 대공령의 군사들은 절대 황궁으로 진군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내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
마음 같아선 나를 꼭 도와달라고 강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일리드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볼테로 황자가 군대를 끌고 와 황궁을 점령했다. 게다가 리젠트라 공작가가 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까지 퍼트렸다.
이는 공작가를 역적으로 간주하겠다는 뜻뿐만 아니라 공작가와 손잡은 북부 대공령에 보내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전쟁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볼테로 황자는 절대로 제 발로 황궁을 나가지 않을 것이니까.
필연적으로 헬리온과 일리드, 두 사람 중 하나는 반역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일리드에게 날 빠져나가게 도와달라는 것은, 그에게 날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일리드가 거절하면 어떡하지?’
폐하께 제 아버지의 죄를 고발하는 것과 아비가 황궁을 점령하는 일은 차원이 달랐다. 전자는 무거운 처벌을 받을지언정 목숨은 건질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후자는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일리드의 선택에 달렸다. 그가 나를 탈출하게 도와준다면 그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만, 거절한다면 나는 꼼짝없이 이곳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
“할게.”
일리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이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줄게.”
“……그 말, 진심이지?”
나를 도와주는 건 곧 일리드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내가 당신에게 진 빚을 이렇게라도 갚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내 아버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러니까 내가 상대할게.”
방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무기력해 보였던 일리드의 눈빛이 어느새 생생해졌다. 그는 나를 데리고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내가 이 방에서 나가는 거야. 아버지가 말한 대로 황위에 오르겠다고 하면 바로 감금령을 풀어주실 거야.”
“그럼 나는? 계속해서 감시가 따라붙을 텐데.”
“당신은 계속 나만 따라다녀. 내가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척하면 감시도 소홀해질 테니 그때 기회를 봐서 황궁에서 탈출하면 돼.”
일리드가 자신의 처소를 둘러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밤에는 내 방에 와서 자. 혹시나 카리나가 다른 생각을 할까 걱정되기도 하고, 지금 황궁에선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일 거야.”
“……알았어.”
대답을 하고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내 가문을 적대시하는 볼테로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카리나라니. 이 상황이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일리드, 그럼 에보니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에보니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에보니까지 데려가려고 하다간 당신도 탈출하지 못하는 수가 있어.”
“그렇긴 하지만…….”
에보니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녀를 두고 나 혼자 황궁을 탈출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당신이 빨리 황궁을 탈출해서 북부 군대와 함께 에보니를 구하러 오는 게 나을 거야.”
그건 일리드의 말이 맞았다. 볼테로가 에보니를 처형시키겠다고 했으니 그 전에 황궁을 빠져나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그녀를 구하는 편이 나았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까 우선 좀 쉬어. 내일 내가 아버지를 만나러 갈게.”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드가 침대로 가 이불을 정리해 주었다.
나는 그를 따라 침대로 가 몸을 뉘었다. 지난 며칠간 지냈던 차가운 감옥 바닥보다 훨씬 따뜻하고 아늑했다.
잠이 들기 전, 나는 작은 목소리로 일리드를 불렀다.
“일리드.”
내 부름에 그가 침대맡으로 다가와 나를 보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지난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 믿을 만한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는 나를 속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깊어 보였다.
“당신만큼은 꼭 내가 지켜줄게.”
일리드의 지친 얼굴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내 옆에 앉아 내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켜주었다.
* * *
“에시…….”
카리나는 눈앞에 놓인 시신을 보고는 정신이 멍해졌다. 자신이 아는 에시가 맞나 싶어 몇 번이고 확인해 보았지만 며칠 전 황궁에서 사라진 그 아이가 맞았다.
황궁 하인들은 왜 에시가 새벽에 궁을 빠져나가 시신으로 돌아온 건지 의아해했다.
절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타살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으니 모두들 의아한 죽음이라고 했다. 이 죽음에 대한 진실은 오직 카리나만이 알고 있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
신전에 다섯 하녀를 불러다 놓고 차를 건넬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설마 누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이슈텔 리젠트라에게 옥새 이야기를 전할까 싶었다.
“그런데 왜 네가 그러냐고, 왜!”
잠든 듯 죽은 에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부터 고였다.
황제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황제는, 그저 높은 사람의 죽음이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허망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에시를 보자니 그보다 훨씬 더 큰 서글픔이 몰려왔다. 왜 이렇게 고생만 하다가 죽은 걸까. 그 여자가 대체 뭐라고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지켜야 한단 말인가.
자신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 소멸되는 것만 같았다. 가난하고 비참해서 절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던 그 시절이.
“이 아이의 장례를 잘 치러주고 가족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해주어라.”
카리나가 눈물을 닦은 후, 하녀들에게 명했다. 죽은 에시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자니 무뎌진 죄책감이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다시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며 볼테로와의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