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볼테로와의 대면
나와 에보니는 남부 기사들에게 이끌려 알현실로 향했다.
알현실은 황궁 기사단이 아닌 남부 병사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문 앞에서부터 저 멀리 있는 황금빛 옥좌까지 가는 길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방 한가운데 있는 옥좌에는 낯선 이가 앉아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옥좌와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황가의 푸른 눈. 황제의 의복에 버금가는 화려한 복장과 기다란 망토. 거만하게 늘어진 자세로 나와 에보니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얼핏 일리드와 닮은 듯했지만, 그보다 눈빛이 훨씬 더 위험한 중년 남성이었다.
‘볼테로 황자.’
황후 폐하의 장례식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휴, 망했네.”
볼테로를 본 에보니가 한숨을 푹 쉬고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볼테로를 노려보았다. 감히 아무나 앉을 수 없는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저 남자가 몹시도 괘씸했다.
“제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두 공작가의 따님들이 여기 다 모였군.”
옥좌에서 일어난 볼테로가 나와 에보니를 보며 놀리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계단 위에 깔린 붉은 카펫을 밟고 내려와 내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본 볼테로의 모습은 섬뜩하리만큼 위협적이었다. 내가 예를 갖추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옆에 있던 남부 기사들이 강제로 내 무릎을 꿇리고 고개를 숙이게 했다.
“거의 십 년 만인가? 그동안 많이 컸구나.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
볼테로가 한쪽 발을 들어 내 머리를 지그시 밟았다. 그는 나를 괴롭히려는 듯 신발 뒤축에 세게 힘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입술을 깨물어 고통을 참았다.
“독하네. 아플 법도 한데.”
볼테로가 천천히 몸을 숙이더니 내 턱을 잡아 자신을 올려다보게 했다. 그는 물건의 하자를 살펴보는 상인처럼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내 아들의 취향이 이렇게 생긴 애들인가. 얼굴은 봐줄 만한데 몸이 이렇게 가냘파서 어디 써먹을 데나 있겠나.”
한참 동안 나를 뜯어보던 볼테로가 실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는 장난치듯 손등으로 내 볼을 툭 건드렸다.
“그래도 네 불충한 할아버지나 성질머리 더러운 할머니랑은 다르게 생겼구나. 그들이랑 닮았으면 역겨워서 이렇게 얼굴 마주 보고 있기도 힘들지.”
“그 더러운 손 나한테서 치워주세요. 불쾌합니다.”
내가 어깨를 움직여 볼테로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자 그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도 그 눈빛이나 기개는 비슷하구나. 그래, 그래야 리젠트라답지. 그런데 지금 네가 이렇게 성깔 자랑할 처지가 못 될 텐데?”
“난 원래 상황 봐가면서 사람 대하지 않아요.”
“너 말을 아주 재미있게 하는구나. 한 치 앞도 모르는 하룻강아지처럼 귀여워. 이래서 내 아들이 좋아하는 건가?”
씨익 미소 지은 볼테로가 약 올리듯 내 뺨을 계속 툭툭 건드렸다.
볼테로 황자와의 대면은 몹시도 불편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에게 단 한 마디도 걸고 싶지 않았지만, 꼭 물어봐야 할 말이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는 어떻게 되셨어요?”
폐하의 안부를 묻자 볼테로의 입가에 걸려있던 장난스런 미소가 한순간에 싹 사라졌다.
“내 형님의 일이다. 네까짓 게 주제넘게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지난 십여 년 동안 당신보다 내가 더 폐하와 가까이에서 지냈어요.”
“그래. 그래서 네가 폐하를 그렇게 쉽게 독살할 수 있었던 거지.”
순간 볼테로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독살이라고? 누가 누구를?
볼테로의 말도 기가 막혔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황제 폐하의 상태였다.
‘독살이라 하면 정말 폐하께서 세상을 떠나신 건가?’
설마 했던 일이 결국 일어난 것이다. 긴장한 내가 몸을 덜덜 떨자 볼테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와서 모른 척하면 안 되지. 네가 황제 폐하를 독살하고 도주하려다가 우리에게 잡힌 것이 아니냐?”
말문이 막힌 나 대신 옆에 있던 에보니가 황당하단 듯 크게 헛웃음을 쳤다. 그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내가 볼테로를 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헛소리하지 말이요. 내가 아니라 당신이 꾸민 일이겠지.”
“진실은 만들어 내기 나름이란다. 황궁에서 오래 지냈으면 이 정도는 알 만하지 않니?”
뒷짐을 진 볼테로가 알현실을 뚜벅뚜벅 걸으며 마치 연극배우가 대사를 읊듯 말을 늘어놓았다.
“아내의 일로 황제에게 앙심을 품은 리젠트라 공작이 널 시켜 독이 든 잔을 폐하께 건넨 거야. 몸에 독이 퍼진 폐하께선 숨을 거두셨고 그걸 발견한 록펠트 공작 부인이 우리에게 재빨리 서신을 보낸 거지. 그 바람에 넌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이렇게 잡힌 거고.”
“…….”
“사실 너에 대한 처분은 아직도 고민 중이란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오빠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하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지. 사실 난 너도 죽이고 싶은 마음인데, 그랬다가는 내 아들이 예전처럼 삐뚤어질까 봐 걱정이 돼서.”
“…….”
“그러니 살고 싶으면 내 아들의 마음을 잘 붙잡아 놓는 게 좋을 거다. 일리드가 너를 갖고 싶다고 하면 살려둘 거고, 마음이 떠나면 즉시 처형대에 세울 거니까.”
“미친 인간. 어떻게 당신이 황제 폐하를 배신할 수 있어? 그분이 형제들과 조카들을 얼마나 아끼셨는데 감히 이렇게 황가를 망쳐 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버럭 소리를 치자 기사들이 나를 잡아 도로 자리에 앉혔다.
황제 폐하가 승하하셨다는 슬픔과 누명을 썼다는 억울함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가슴이 쉴 새 없이 들썩였다.
이들은 나를 인질로 삼아 북부 대공령의 군사들이 수도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내 안위와 상관없이 북부 군사들이 황궁을 점령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내 눈앞에 있는 이 인간 이하의 볼테로가 황궁의 주인이 되는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달을 만든 카리나. 그녀가 내게 보인 그 어떤 적대감과 악행보다 지금 이 상황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숨을 골랐다. 하지만 이미 극에 달한 감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런, 이런. 아까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거처럼 굴더니 왜 갑자기 울고 그러지? 사람 당황스럽게.”
볼테로가 분에 찬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큰 선심 쓰듯 내 앞에 떨어뜨렸다.
“너무 울고 그러면 안 돼. 몸이 상하지 않니. 그러면 내 아들이 나를 죽도록 원망할 거야. 그리고 포로로서의 가치도 떨어지고.”
그는 내게 할 말이 끝났는지 나를 스쳐 지나가 에보니 앞으로 다가갔다.
나를 대할 때는 흥미로움과 약간의 호기심이 느껴졌던 것과 달리, 에보니를 보는 볼테로의 표정은 한겨울 칼바람처럼 냉담했다.
무릎을 꿇어앉은 에보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볼테로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마치 눈싸움을 하듯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어색함을 참지 못한 에보니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볼테로가 그녀의 멱살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순식간에 그녀의 뺨을 세게 쳤다.
“에보니!”
놀란 내가 에보니를 불렀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대리석 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넌 반쪽짜리여도 여기저기 쓸모가 있어서 귀여워해 줬더니 감히 날 배신해?”
“그래도 할 건 다 했잖아요. 그동안의 정이 있지 너무 세게 때리시네.”
에보니가 맞은 곳이 얼얼한 듯 입을 좌우로 벌려가며 턱을 맞추었다.
“이제 와선 쓸모도 없고 포로로서의 가치도 없고. 넌 조만간 북부 놈들 겁이나 주게 단두대에 세워야겠어.”
“단두대에 세우든 교수형에 처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다고 아저씨 아들이 황제가 되는 건 아니니까.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아드님 앞길 망치지 말고 이제라도 처신 똑바로 해요.”
“일리드가 왜 황제가 못 돼? 아, 그 빌어먹을 교지를 말하는 거면 내가 미리 손을 써 뒀지.”
볼테로가 손짓하자 그의 곁에 있던 기사가 교지함을 들고 왔다. 긴 소매를 걷어붙인 볼테로가 함에서 교지를 꺼냈다.
“록펠트 공작 부인, 죽은 내 형수님의 작위를 쓰는 그 젊은 여자애가 날 보자마자 이거부터 건네주더구나. 아주 온갖 우스운 내용들만 가득해.”
그는 교지를 펼쳐보고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볼테로가 다시 손짓하자 이번에는 곁에 있던 하녀가 그에게 초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촛불 위로 교지를 가져갔다. 금빛 교지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내 형님께서 임종 직전에 정신이 나가셨던 모양이야. 내 아들이 후계자가 아닌 것도 어이가 없을 판에 피 한 방울 안 섞인 정적의 딸을 양녀로 들여?”
교지를 태워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볼테로가 대리석 위로 떨어진 재를 구둣발로 마구 밟아 기어이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자, 이제 이 교지를 태웠으니 어떡할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넌 황제든 황후든 절대 아무것도 되지 못할 거야. 누가 믿어주겠어? 리젠트라가 황제의 양녀가 되어 공동 즉위한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가루가 된 재가 바람을 타고 나와 에보니 앞으로 날아왔다. 손끝을 타고 스쳐 가는 잿가루는 이제 다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옥새를 신경 쓰느라 미처 교지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설령 생각났다 하더라도 카리나가 먼저 챙겼겠지만 그래도 이 상황을 대비하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볼테로의 말대로 그 교지가 없는 한 헬리온이 황제가 되더라도 내가 황후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모든 상황이 자꾸만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것만 같았다. 허망한 마음에 참았던 눈물이 다시 뺨 위로 흘렀다.
볼테로가 멍하니 고개 숙인 나와 에보니를 보며 병사들에게 명했다.
“이 반쪽짜리 블라딘 공녀는 지하 감옥에 돌려보내고, 리젠트라 공녀는 내 아들에게 데려다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