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140화 (140/160)

140화. 포로

서슬 퍼런 검이 금방이라도 내 목을 벨 듯 살벌하게 빛났다. 주위의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날카로운 검 끝을 향했다.

라비가 빨리 와줬으면 하는 바람과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할지라도 나와 단둘이서 이 포위망을 뚫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옥새. 나보다 더 중요한 건 옥새야.’

이대로 남부 군사들에게 사로잡힌다 하더라도 죽진 않을 것이다.

나는 포로로서의 가치가 높은 사람이다. 아무리 나와 내 가문을 증오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화풀이로 죽이기보다는 인질로 잡아 원하는 것을 뜯어낼 생각부터 할 것이다.

하지만 라비는 달랐다. 그는 살려두면 북부의 전력이 될 사람이니 어떻게 해서든 죽이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나만 잡히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빨리 대답 안 해?”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사내가 검을 내 목 가까이로 들이밀었다. 날카로운 검 날이 목에 닿자 주르륵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오며 기사들의 뒤에 있는 숲 속 나무들이 흔들렸다. 무심코 나무 위를 올려다본 나는 재빨리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나무 위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라비의 초록빛 안광이 살의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다행히 내가 시선을 피하는 바람에 남부 기사들은 뒤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라비가 기습을 성공한다 하더라도 남은 기사들이 다른 병사들에게 연락을 취해 우리를 추적할 것이다.

나는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라비를 살리고 옥새를 안전하게 옮기는 것이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 포로가 되길 선택했다.

“리젠트라 공녀, 이슈텔 리젠트라다.”

날 향해 검을 겨눈 사내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제 귀를 의심하는 듯 되물었다.

“뭐, 뭐라고?”

“내가 이슈텔 리젠트라라고 했다.”

기사들 사이에서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다들 긴가민가하여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대장이 기가 막힌 목소리로 헛웃음을 쳤다.

“하, 참. 어이가 없네. 이게 어디서 하녀복을 입고 헛소리를 지껄여. 아무리 살고 싶어도 그런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 그러다 정말 죽는 수가 있어.”

그는 여전히 내 목에서 칼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다른 기사가 조심히 말을 걸었다.

“단장님, 맞는 것 같습니다. 이것 좀 보세요.”

부하 기사가 대장에게 건넨 것은 큼지막한 종이였다. 대장이 매듭을 풀어 종이를 펼치자 등불 아래로 그림이 보였다. 거기에는 내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설마……?”

대장이 검을 거두고 내게 성큼 다가오더니 거친 손길로 헤드 드레스를 떼어내고 머리끈을 풀었다. 그러자 하나로 묶여있던 머리카락이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나와 그림을 비교해보던 대장의 표정이 점점 의심에서 확신으로 변하였다. 그는 진귀한 보물을 발견한 도굴꾼처럼 나를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런 행운이 다 있나. 이렇게 귀하신 분을 우리 부대가 발견하다니.”

대장은 검을 칼집에 집어넣고는 손수건을 꺼내 피가 흐르는 내 목에 감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손을 뿌리치고 떨어진 헤드 드레스를 주워 지혈했다.

“그런데 리젠트라 공녀께서 왜 하녀 하나 없이 이렇게 혼자 도망다니실까? 혹시 이 근처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라도 있는 겁니까?”

“황궁 하인을 데리고 나오면 다른 이들에게 말이 새어 나갈까 봐 나 혼자 나온 것이다.”

내 말에 대장이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일행과 헤어지면 헤어졌지 절대 혼자 돌아다닐 신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대로 하여라. 그렇다고 없는 일행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설령 일행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내가 이렇게 된 마당에 누가 돌아오려고 하겠나.”

남부 기사들이 아닌 라비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를 구하려고 하지 말고 떠나라는 의미였다.

부디 눈치 빠른 라비가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듣길 바랐다. 이런 상황에서 그와 옥새 둘 다 잃을 수는 없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황궁으로 가서 옥새 찾는 거에 동참하는 게 나을 텐데? 다들 옥새를 찾느라 혈안이 돼있던데.”

옥새라는 말에 대장의 눈빛이 다시 욕망으로 달아올랐다. 이슈텔 리젠트라도 잡았겠다, 이제 옥새만 찾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질 것이다.

내 말에 홀린 그는 일행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접고 다시 말에 올랐다.

“공녀님께 말 한 필 내어드려라.”

대장의 명령에 기사 하나가 말에서 내려서 자신의 말에 나를 태웠다.

다행히 옥새에 정신이 팔린 대장은 주변 수색을 포기하고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궁으로 향하는 내내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뒤를 돌아볼 수가 없어 차라리 눈을 감았다.

다행히 라비는 내 뜻을 알아차렸는지 남부 기사들을 기습하지 않았다. 옥새는 무사히 수도를 빠져나가 북부로 옮겨질 것이다.

* * *

남부 기사들은 황궁 하인들의 눈을 피해 나를 지하 감옥으로 데려갔다. 차가운 돌바닥에 떠밀리듯 들어가자 온몸에 한기가 퍼졌다.

서있을 힘도 없어 벽에 몸을 기대 미끄러지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자 나 혼자 있는 줄 알았던 감옥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슈텔, 날 구해주러 온 거예요?”

어두운 감옥 구석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주위가 어두웠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보니?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

지금쯤이면 못해도 헬리온과 북부 가신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어야할 에보니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놀란 내가 멍한 표정을 짓자 에보니가 머쓱한 웃음소리를 냈다.

“나도 잡혔어요. 젠장, 역시 그놈들도 머리가 나쁘지는 않더라고요. 제일 먼저 전서조들을 가두려고 새장부터 오더군요.”

“그래서 서신은 날렸어요?”

“당연하죠. 그놈들이 얼음독수리를 전서조로 쓸 줄은 몰랐나 봐요. 회색 전서조들만 우리에 가둔 탓에 내가 얼음독수리를 날린 건 몰라요. 지금쯤 북부 대공령을 향해 훨훨 날고 있을 거예요.”

“그건 다행이네요.”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냉정한 말이지만 나보다 옥새가 중요한 것처럼, 에보니보다 중요한 건 서신이었다.

우리 둘 다 이렇게 잡혀오긴 했지만, 그래도 맡은 바 임무는 완수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옥새는 텔리아 경이 가지고 갔나요?”

에보니가 주위를 둘러보다 한껏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지친 얼굴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가 말을 구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 사달이 나긴 했지만…….”

“와, 헬리온 대공이 텔리아 경을 가만두지 않겠는데요? 기사가 지켜야하는 레이디를 두고 자기만 살아 돌아가다니.”

에보니가 손가락으로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나는 작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텔리아 경은 나를 구하려고 했어요. 내가 구하지 말라고 신호를 줘서 이렇게 된 거고요. 내가 아니라 그가 옥새를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었죠.”

“흐음, 하지만 헬리온 입장에선 안 그럴걸요?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만 이렇게 적진에 홀로 잡혀있는데 어떤 남자가 눈이 안 뒤집히겠어요.”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예요. 나와 텔리아 경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예요.”

“뭐, 덕분에 나도 감방 동기가 생겨서 심심하지는 않네요.”

에보니가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어 둘둘 말더니 베개처럼 베고 누웠다.

“좀 누워요. 이슈텔 당신도 피곤할 거 아니에요. 늦어도 모레부터 엄청난 일들이 휘몰아치듯 불어닥칠 텐데.”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감옥이 제집인 것처럼 늘어져있는 에보니와 달리 나는 모든 것이 숨 막힐 듯 어색했다. 이렇게 좁은 곳에 갇혀있는 것도 처음이었고, 다른 이의 손에 내 목숨이 달린 것도 처음이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딱 두 개죠. 죽거나 살거나.”

에보니가 감옥 천장을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마 나는 죽고 당신은 살 거예요. 포로의 가치는 죽여서 적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거나, 살려서 협상의 패로 사용하거나 둘 줄 하나잖아요. 나는 전자, 당신은 후자.”

“당신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어볼게요.”

나도 포로가 된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스웠지만 그래도 최대한 노력할 생각이었다. 반쪽짜리긴 해도 블라딘 가문의 피가 흐르는 에보니를 그리 쉽게 죽일 수 있나 싶기도 했다.

내가 침울한 표정을 짓자 에보니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내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거참, 다정도 병이네. 내 걱정 말고 당신 걱정이나 해요. 당신 친척도 그러더니…….”

“율리언 말인가요?”

“네. 그 사람한테 수도를 빠져나가라고 말했더니 도망갈 생각은 안 하고 나보고 살아 돌아오라는 말부터 하더군요.”

율리언이 에보니에게 그런 말을 했다니 의외였다. 고지식한 율리언과 제멋대로인 에보니는 그야말로 상극이었다. 그래도 근래에 여러 사건을 겪으며 미운 정이 든 건지도 몰랐다.

“이슈텔.”

“네?”

“혹시라도 내가 죽으면…… 릴체 후작한테 살아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거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전해줘요.”

“……안 할래요.”

“너무하네요.”

“그냥 당신이 살아서 약속을 지켜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상황 돌아가는 꼬라지가 영 별로라…….”

그 말을 끝으로 에보니는 쌔근쌔근 잠에 들어버렸다.

나는 앞치마를 벗어 에보니가 했던 것처럼 둘둘 말아 그 위에 머리를 뉘였다. 잠들지 못할 것 같았는데, 결국 지쳐버린 나도 그녀의 옆에 누워 같이 잠에 빠졌다.

그 후 이틀 동안 물과 음식을 건네주는 하인만 드나들 뿐, 우리는 아무런 바깥소식도 듣지 못한 채 지하 감옥에 갇혀있었다.

그렇게 감옥에 갇힌 지 사흘째 되던 날, 간수들이 문을 열고 나와 에보니를 끌고 나갔다.

“볼테로 황자님께서 찾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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