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기습
초상화 방에는 대여섯 명의 하인들이 흩어져 옥새를 찾고 있었다. 다들 영문도 모른 채 새벽에 불려온지라 눈이 반쯤 감겨있었고 옥새를 찾는 행동도 굼떴다.
하인들은 우리가 들어온 것을 한 번 스윽 보고는 관심 없는 듯 다시 설렁설렁 방을 수색했다.
내가 라비의 팔을 살짝 잡아 당겼다. 그러자 그가 목청을 한 번 가다듬고는 하인들을 향해 외쳤다.
“나와 이 하녀가 초상화 방 수색을 맡게 되었으니 다른 분들은 이만 숙소로 돌아가 보아도 좋습니다.”
라비의 말에 하인들이 반색을 하며 서둘러 방을 떠났다. 마지막 하녀까지 자리를 떠난 후에야 나는 계속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텔리아 경, 우리도 서두르죠.”
“네, 공녀님. 어디부터 찾으면 될까요?”
“이리로 오세요.”
나는 라비를 데리고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초대 황제와 황후의 조각상이 있는 곳을 지나 방 안쪽으로 가면 현 세대 황족들의 초상화가 있었다.
하녀들은 대부분 황족들의 초상화가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었다. 벽에 박힌 못을 빼고 고정쇠를 힘주어 당기면 어렵지 않게 그림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많은 초상화 중 어느 하나의 뒤에는 어린아이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 어린 시절, 헬리온과 프리모스와 함께 이 방에서 숨바꼭질을 하다가 발견한 곳이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고 초상화의 배치가 바뀐 탓에 그 위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선 황제 폐하의 초상화부터 하나씩 내려 주세요.”
내가 옆에 있던 사다리를 들고 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초상화 사이에 기대어 두었다. 라비가 사다리 위로 올라가 커다란 초상화를 내렸다.
폐하의 초상화가 있던 자리는 다른 벽지보다 색이 바라지 않았다. 나는 벽면 뒤에 다른 공간이 있나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텔리아 경, 여기 황후 폐하의 초상화도 내려 주세요.”
라비가 사다리를 옮겨 황후 폐하의 그림을 내렸다. 그러나 역시 이곳에도 공간은 없었다.
우리는 좀 더 속도를 내서 그림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라비는 커다란 그림들을 떼어냈고 나는 비교적 작은 그림들을 맡았다.
그렇게 삼십여 분의 시간이 흐르고, 초상화 방의 모든 그림들이 벽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그림이 걸린 자리를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비밀 공간은 없었다.
“공녀님, 아무리 봐도 말씀하신 공간이 없습니다. 혹시 저희가 빠뜨린 곳이 있을까요?”
“아니요. 분명 전부 제대로 확인했는데…….”
당황한 내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빈 벽면을 두드려 보았다. 딱딱한 두드림 소리 이외에 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럼 혹시 저 자리는 어떤 그림이 있던 자리인지 아십니까?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긴 했는데.”
라비가 가리킨 곳은 헬리온과 일리드의 초상화 사이였다. 한 때 내 초상화 두 개가 걸려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저기는 제 초상화가 있던 자리예요. 지금은 없지만.”
“저곳은 확인해보셨습니까?”
“아뇨.”
내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황족도 아니고 그림까지 내려간 마당에 그 자리에 옥새를 숨겨두었을까 싶었다.
그러자 사다리에서 내려온 라비가 성큼성큼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라비가 비어 있는 두 자리 중 첫 번째 그림이 있던 자리로 갔다. 그는 단도를 꺼내 칼집으로 벽면 여기저기를 확인했다. 그러나 칼집이 벽을 긁는 소리만 요란할 뿐이었다.
“여기는 없군요. 그럼 저곳도 확인하겠습니다.”
라비의 움직임을 따라 칼집이 옆쪽 벽면을 훑었다. 이번에 무언가 발견되지 않으면 정말로 끝이었다.
‘더 늦지 않게 대신관한테 가봐야 할까?’
황제 폐하 이외에 옥새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대신관이 유일했다. 이렇게 무작정 옥새를 찾느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대신관에게 가서 모든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구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공녀님!”
그때 라비가 흠칫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의 칼집이 무언가에 걸려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무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단도를 꺼내 칼날 끝으로 소리 난 부분을 찔렀다. 그러자 칼끝에 작은 고리가 걸리더니 벽돌이 움직일 것처럼 덜컹거렸다.
“거기인 것 같아요. 텔리아 경, 잠시만 비켜주세요. 제가 한 번 당겨 볼게요.”
손이 큰 라비 대신 내가 고리에 손가락을 걸어 힘껏 끌어 당겼다. 쇠고리에 손가락이 쓸리는 고통과 함께 끼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 작은 문이 열리고 그 안에 검은 공간이 보였다.
“공녀님, 이 곳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들어가서 확인해 볼게요.”
내가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상체를 작은 문 안으로 넣었다. 어릴 적엔 이 곳에 들어가 몸을 숨기기도 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윗몸만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게 있습니까?”
“아뇨, 아직요. 잠시만요.”
나는 손끝의 감각에 의지한 채 어둠 속을 더듬었다. 아직 만져지는 것이 없어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멀리 뻗은 손에 단단하고 커다란 무언가가 만져졌다.
“텔리아 경, 날 좀 꺼내줘요.”
“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라비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아 그대로 뒤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좁은 문틈으로 내 몸이 쑥하고 빠졌다. 나와 함께 손에 쥔 단단한 물건도 문 밖으로 나왔다.
“이게 옥새인가요?”
라비가 내 손에 들린 큼직한 물건을 보며 물었다. 위로는 날개를 펼친 정교한 황금빛 독수리가, 받침대 아래로는 황제의 문양이 새겨진 각인이 보였다.
“한 번 확인해 볼게요.”
옥새가 찍힌 교지는 본 적이 있어도 옥새 자체를 보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나는 등불을 들고 도장의 아랫면을 비추어 보았다. 폐하의 교지에 찍힌 자국과 같은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맞아요, 이게 우리가 찾던 옥새예요.”
내 말에 라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내게서 옥새를 받아들었다. 그는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 옥새를 안전하게 넣었다.
“공녀님, 저희도 빨리 황궁을 벗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래요.”
나와 라비는 조용히 초상화 방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복도는 우리가 처음 왔을 때보다 경비가 더 삼엄해졌지만 다행히 하녀복을 입고 있어서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있었다.
나와 라비는 황궁 뒷문으로 나와 북쪽 숲으로 향했다.
* * *
황궁을 나와 북쪽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지친 몸을 재촉하면서도 자꾸 걱정스런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우리 이외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에보니 블라딘은 아직인가요?”
“네. 분명 이쪽 길로 와야 할 텐데 먼저 간 게 아닌 이상 저희의 뒤를 따라오는 것 같진 않습니다.”
“먼저 갔어야할 텐데…….”
옥새를 찾는 건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지만 새를 날려 보내는 건 그보다 훨씬 빨리 끝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에보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공녀님, 여기가 수도의 마지막 마을 같은데 이쯤에서 말을 구해오는 게 좋겠습니다.”
검은 숲 속으로 들어가기 전, 라비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마침 나도 지쳤던 탓에 말이 절실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제가 최대한 빨리 말을 구해오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라비는 재빨리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너무 작은 마을이라 말이 있을 진 모르겠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을 구해오는 편이 나았다. 무작정 숲으로 들어가서 언제 나올지 모를 다음 마을까지 계속 걸을 순 없었다.
“하…….”
지친 나는 근처에 있는 나무에 기대 땅에 주저앉았다.
새벽에 악몽을 꾸고 깨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오래 지난 건 아니지만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은 내 평생의 시간에 견줄 만큼 버거웠다.
‘황제 폐하…… 에시…….’
생사 여부도 불확실한 황제 폐하와 허망하게 떠난 에시가 생각났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일수록 더 냉정하게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무릎을 구부린 채 앞치마에 얼굴을 묻었다. 밤이 깊은 탓에 이렇게 운다 하더라도 라비에게 들킬 염려가 없었다.
라비가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지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 *
정신이 돌아온 건 주변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화들짝 놀라 정신이 돌아온 내가 앞치마에 묻어둔 고개를 들었다.
‘텔리아 경인가……?’
눈물에 흐려진 눈을 비비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눈앞에 보인 사람은 라비가 아니었다.
심지어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기사들이었다. 수많은 눈동자가 내가 기대있던 나무를 에워싼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누구지? 설마 남부의 기사들인가?’
놀란 내가 짐짓 태연한 척 그들을 보며 앞치마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만일을 대비해 챙겨온 리볼버가 있었다. 그러나 일대일도 아니고, 족히 서른 명은 되어 보이는 이 기사들을 전부 상대할 수는 없었다.
“넌 누구냐?”
기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말에서 내려와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평범한 하녀들처럼 기사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황궁에서 심부름을 나왔다가 길을 잃어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기사님들은 가시던 길을 가시지요.”
‘제발 그냥 지나쳐줘, 제발.’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남부의 기사들이 황궁을 향해 가는 것도 심각한 상황이지만 여기서 내가 붙잡히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부디 이들이 내게 쓸데없는 관심을 보이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내 말에 기사단 대장이 크게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하지 마. 오늘 황궁 출입을 허가 받은 하인들은 없다고 했어. 똑바로 말해, 안 그러면 이 자리에서 죽는다.”
그의 말에 소름이 쫙 끼치며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카리나가 미리 손을 써둔 거야.’
머리속이 새하얘져서 더 이상 어떻게 거짓말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황한 내가 머뭇거리자 스릉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검 날이 순식간에 목 옆으로 다가왔다. 대장이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넌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