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어린 희생
“에시? 이 밤중에 네가 왜 여길?”
내 물음에 에시가 대답도 못하고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아는 아이입니까?”
라비가 의심의 눈초리로 에시를 쳐다보며 내게 물었다.
“네. 제가 데리고 있던 하녀예요.”
내 대답에 라비가 그제야 경계를 풀었다. 잠시 후, 숨을 고른 아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공녀님, 꼭 드려야할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지금 황궁으로 가셔서 옥새를 찾으셔야 해요. 하녀들이 모두 불려가서 옥새를 찾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찾기 전에 공녀님께서 먼저 찾으셔야 해요.”
갑자기 나타나 옥새 이야기를 하는 에시를 보며 나는 크게 당황했다.
안 그래도 나쁜 꿈과 카리나의 전서조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옥새 이야기까지 나오니 머리가 그대로 멈추는 것 같았다.
나는 말에서 내려 아이를 진정시키고 다시 물었다.
“에시, 천천히 말해줘. 갑자기 옥새라니. 그게 왜?”
내 말에 에시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붉어졌다. 아이는 무슨 말을 전하고 싶어 입을 벙긋거렸으나 작은 한숨 소리만 낼 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에보니가 벌컥 짜증을 냈다.
“아, 답답하네.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으면 분명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온 거 아니야? 근데 왜 바쁜 사람들을 세워놓고 머뭇거려? 대체 뭔 말을 하려고?”
“저, 그게…….”
에시가 우물쭈물하자 에보니가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보았다.
“이슈텔, 다시 말에 올라요. 지금 여기서 이렇게 허비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요. 당신은 빨리 가서 몸을 숨겨요.”
에보니의 말이 맞았다. 에시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고 걱정되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이를 기다려 줄 수가 없었다.
“에시, 어차피 옥새가 있는 곳은 아무도 모르니 걱정할 거 없어. 지금은 나도 황궁에 갈 처지가 못 되니 나중에 찾아보도록 하마.”
나는 아이의 손을 잡아 달래준 후 다시 말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에시가 무언가 결심한 듯 내 팔을 잡았다.
“공녀님, 카리나가 옥새를 찾고 있어요.”
“뭐? 카리나가?”
“네. 처음에는 하녀 다섯에게만 은밀하게 시킨 일이었는데, 지금 갑자기 황궁 하인들을 전부 깨워서 옥새를 찾고 있어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분명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게 틀림없어요.”
잔뜩 긴장했는지 에시의 목소리가 떨려오며 눈가가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옥새는 초상화 방에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교지를 작성하시던 날, 대신관님이 초상화 방으로 가신 것을 보았어요. 제가 찾아다 드리고 싶었지만 경비가 삼엄하여 그러지 못했어요. 그러니 그 방에 가셔서…….”
에시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기침을 하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가 손을 들어 제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기침을 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제기랄, 역시 카리나가 뭔 짓을 꾸몄군. 얘야, 그거 말고 뭐 더 들은 건 없니?”
에보니가 에시에게 더 이야기 해보라며 재촉했다. 라비 역시 어느 쪽의 경비가 삼엄하냐고 재차 물었다.
그런데 에시의 반응이 이상했다. 밤이 깊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현기증이 난 사람처럼 몸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에시!”
바로 다음 순간, 아이가 몸을 휘청거리며 그대로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놀란 내가 다가가 에시를 일으켜 앉혔다. 그러자 밤바람을 타고 비릿한 피냄새가 끼쳐왔다.
“에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아이의 뺨에 손을 올렸다. 입가에서 만져지는 건 분명 피였다.
“카리나가… 차에…… 저주를…….”
에시가 고통스런 기침을 하며 괴로워했다. 아이가 입을 벙긋거릴 때마다 입가에서 자꾸만 피가 흘러나왔다.
“라비! 이 아이를 좀 봐줘요, 빨리!”
다급하게 소리치자 라비가 말에서 내려와 에시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에시는 계속해서 더욱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공녀님…… 죄송해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에시가 피 묻은 손을 뻗어 내 옷자락을 잡았다. 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겨우 참으며 아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괜찮아, 에시. 내가 곧 의사를 불러올게, 조금만 참아.”
갑작스레 일어나는 이 상황들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왜 에시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지? 저주라니. 카리나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에시를 이렇게 만들 이유가 없는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공녀님…… 저를 거둬주셔서…….”
에시는 마치 자신이 이렇게 될 것을 짐작이라도 한 것 같았다. 내가 황궁을 떠난 사이에 이 어린아이 혼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망가지는 것처럼 아팠다.
“부디…… 제 가족들을 잘 보살펴 주세요…….”
“약속할게, 네 가족들을 반드시 책임질게. 그러니 제발 일어나봐, 에시. 응?”
에시의 몸이 자꾸 힘없이 늘어졌다. 아이에게 계속 말을 걸어 잠들지 않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내 목도 울음에 잠긴 터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숨죽여 흐느꼈다. 에시가 힘없이 손을 들어 나를 안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죽어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저는 공녀님을 만나서…… 행복했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시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에시! 에시!”
아무리 불러도 에시는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몸을 흔들어보아도 팔이 힘없는 수초처럼 축 늘어졌다.
“공녀님…….”
라비가 침울한 얼굴로 내게서 에시를 떼어 놓았다. 그리고는 아이의 시신을 안아 근처 나무 옆에 내려놓았다.
에보니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에시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가요, 이슈텔. 이 아이의 죽음이 헛되게 할 순 없잖아요.”
에보니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나를 재촉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나무 아래 누운 에시를 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내렸다. 이 모든 상황이 실감이 안 나 울음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끌어다 깊은 심연 속으로 자꾸 밀어 넣는 것만 같았다.
내 자존심을 지키자고 황궁을 떠난 것이 잘못이었던가? 에시는…… 에시는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면 안 되는 아이인데.
영리하고 싹싹한 아이라 오래도록 곁에 두고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인 것 같았다. 주위 사람들을 더 세심하게 챙기지 못한 내 불찰 같았다.
내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자 에보니가 심란한 목소리로 라비에게 말했다.
“텔리아 경. 리젠트라 공녀를 북부 저택으로 데려다 주고 와요. 지금은 황궁에 사람을 많이 들일 수 없으니 나랑 당신이 옥새를 찾는 게 낫겠어요.”
“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라비가 다가와 조심히 나를 일으켜 세웠다. 힘없이 몸을 일으키던 나는 저 멀리 있는 황궁을 보았다.
황궁의 창문 곳곳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에시의 말대로 카리나가 황궁의 모든 이들을 깨워 옥새를 찾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 아이의 죽음이 헛되게 할 순 없잖아요.」
아까 전, 에보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대로 에시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에시가 죽은 것이 카리나의 저주 탓이라면 나는 절대로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무고한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을 물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 모든 상황이 카리나의 뜻대로 돌아가게 두어선 안 됐다. 에시의 당부대로 내가 먼저 옥새를 찾아야 했다.
“내가 찾을 게요, 옥새.”
나는 라비의 손을 놓고 턱 끝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나보다 황궁 구조를 잘 아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러니 내가 가야해요. 그래야 빨리 옥새를 찾아서 황궁을 빠져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공녀님, 초상화 방은 넓지 않습니까. 바로 찾으실 수 있으신가요?”
라비의 걱정스런 물음에 내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짐작이 가는 곳이 있어요.”
* * *
“하, 옷이 작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키 큰 하녀를 기절 시킬 걸.”
에보니가 툴툴거리며 능숙한 솜씨로 앞치마 리본을 묶었다.
나와 에보니, 그리고 라비는 외딴 성벽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하인들을 기절시킨 뒤 옷을 갈아입었다.
굼뜬 내 몸짓이 답답했는지 에보니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반면 변복에 익숙한 라비는 우리 중 제일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자, 그럼 이쯤에서 각자 갈 길을 가는 걸로 할까요? 나는 새장으로 갈게요.”
에보니가 하얀 헤드 드레스를 매만지며 채비를 했다. 내가 그녀를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조심해요, 에보니. 뮬에게 서신만 전달하고 바로 궁을 빠져나가요.”
“나는 신경쓰지 말아요. 여기서 잡히면 가장 곤란해지는 사람이 당신인데 누굴 걱정해요.”
에보니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새장 쪽으로 멀어졌다.
“저희도 서두르지요.”
라비의 재촉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서 초상화 방으로 향했다.
에시에게 들은 대로 황궁은 새벽 시간인 것이 무색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하녀들과 하인들이 황궁의 여러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옥새를 찾느라 분주했다.
그나마 외딴 곳에 있는 초상화 방은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와 라비가 초상화 방 앞에 있는 병사에게로 갔다.
“초상화 방에 배정받았습니다. 문을 열어주시지요.”
라비가 병사에게 말했다. 잠이 오는지 눈을 끔뻑거리던 병사가 나와 라비를 쳐다보았다.
“아까 들어온 하녀들이 전부라고 전해 들었는데?”
“아, 저희가 추가로 이곳에 배정 받았습니다.”
라비가 사람 좋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병사가 의아한 듯 눈썹을 찡그리더니 나를 힐끗 보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공손한 하녀인 양 병사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아무리 하녀 복장을 하고 있더라도 공작 부인이었던 나를 알아볼 사람들이 많아 조심해야했다.
병사가 나를 쳐다보는 내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여차하면 라비가 병사를 기절시키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들어가 보시오.”
다행히 병사는 큰 의심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라비와 시선을 교환한 후, 초상화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