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134화 (134/160)

134화. 마지막 당부

교지의 마지막에 적힌 문장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정비가 되지 못한 공작 부인 자리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나면 유명무실해져 권력자들의 먹잇감만 될 수순이었다.

“카리나에게 네게 사과하라고 시켰다……. 그런데 그 애가…… 하지 않겠다고 하더구나…….”

황제 폐하의 힘없는 목소리에 안타까운 감정이 섞여 들어갔다.

“그렇게라도 살려주고 싶었는데…… 그 애가 저버렸어……. 이제 내가 죽으면…… 그 애를 지켜줄 이가 하나도 없을 텐데…….”

폐하께선 귀족들이 카리나를 제물 삼아 처형대에 세울 것을 염려하셨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천천히 그녀의 작위를 반납시키고 성을 빼앗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셨다.

폐하께 하사받은 영지가 있으니 그곳에서 조용히 지낸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폐하께서 바라시는 건 그거 하나뿐이라고 하셨다.

“상황이 우습구나……. 카리나를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것이…….”

말씀하시면서도 허탈한지 폐하께서 허무한 웃음소리를 내셨다.

“너희 둘이 그렇게 된 게…… 결국 다 어른답지 못한 내 탓인데……. 이제 와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게 염치가 없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폐하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저 역시 그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다정히 손을 뻗어 폐하의 여윈 손을 잡았다.

“저와 카리나가 이렇게까지 된 건 결국 다 선대의 잘못입니다. 그 질긴 악연이 저희 대까지 이어진 것이죠. 저도 그 악연이 더는 이어지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께선 마음이 약한 분이셨다. 지금껏 당신의 곁을 지켜준 카리나를 절대 외면하지 못할 것이었다.

정말 씁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카리나의 가장 위험한 적인 내게 이런 부탁을 해야할 만큼 그녀의 곁엔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이슈텔…….”

폐하께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셨다.

“그 애가 이곳에서의 일들을…… 전부 잊고 살 수 있게…… 부탁한다…….”

“네, 그리 하겠습니다.”

폐하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나 역시 그리할 생각이었다. 거기에 폐하께서 남기시는 당부이니 어길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이슈텔…….”

카리나를 부탁하는 말씀이 끝이 아니었다 보다. 폐하께서 다시금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으셨다.

“부디 일리드를…… 너무 미워하지 마라…….”

“…….”

“그 애가 스스로 황태자를 포기하고…… 제 아비의 죄까지 고발했다……. 그러니 어렵겠지만…… 나를 미워하고 다른 아이들은…… 미워하지 말아다오…….”

이 부탁에 대한 대답만큼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직 일리드가 미웠다. 이전처럼 불같이 타오를 듯 증오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그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황태자 자리를 포기한 건 어찌됐든 고마운 일이었다. 그 마음을 생각한다면 나도 그를 용서하기 위해 노력해야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들려드렸다. 폐하께서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더는 일리드에 대해 말을 잇지 않으셨다.

“너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가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이슈텔…….”

“아닙니다, 폐하. 어서 쾌차하셔서 저와 헬리온의 힘이 되어주셔야지요.”

“그래……. 나도 그러고 싶구나……. 부디 내게 허락된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으면 좋겠구나……. 내가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야…… 너희들에게 닥칠 풍파를…… 조금이라도 더 막아줄 텐데…….”

폐하의 걱정 섞인 말씀에 나도 같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폐하를 안심시켜 드리려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폐하.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분명 그리될 것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때 마침 폐하의 담당 궁의가 황제전에 도착했다. 나는 폐하께 인사를 드리고 조용히 황제전을 나섰다.

폐하의 처소를 나가기 전, 나는 궁의에게 진맥을 받는 폐하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날은 그렇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 * *

황제전을 나온 나는 헬리온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텔리아 남매가 긴히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불렀다.

“어서 오세요, 공녀님.”

라비와 함께 처소 안으로 들어가자 슈리와 아론이 나를 반겼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헬리온도 나를 보고는 반갑게 미소 지었다.

“어서 와, 이슈텔.”

헬리온이 나를 자기 옆 자리로 안내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그들이 둘러앉은 책상 위에는 누군가와 주고받은 서찰과 지도, 작은 병사 모형까지 놓여있었다.

“이게 다 뭔가요? 저를 부른 이유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아론을 보며 묻자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알렌시아 선대공께서 보낸 서신 내용 중, 공녀님도 같이 알아두셔야 할 내용이 있어서요.”

“그게 뭐죠?”

“최근 남부의 움직임이 수상쩍다는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그래서 저희 북부 쪽에서도 거병을 해 놓은 상태입니다.”

거병이라는 말에 놀란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입을 여는 순간 헬리온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걱정 마. 우리 쪽 용병들은 전부 상단으로 위장시켜둔 상태야. 위치도 한 곳에 몰아둔 게 아니라 수도와 가까운 지역에 분산시켜서 준비해두었고.”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야? 거병이라니. 잘못 걸리면 반역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어.”

“남부도 거병한 마당에 우리라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걱정스런 나와 달리 헬리온과 텔리아 남매의 표정은 담담했다. 오히려 그들은 거병에 대한 걱정 대신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거병 쪽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부에서 먼저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저희가 먼저 나설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나저나 공녀님, 혹시 최근에 일리드 대공을 만나신 적 있으십니까?”

아론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는데요. 일리드 대공은 왜요?”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에서 먼저 황태자 자리를 포기한 것이 수상해서 말입니다. 끝장을 볼 것처럼 달려들더니 그렇게 맥없이 포기할 줄이야. 그래서 더 의심이 갑니다.”

“맞아요. 혹시 그쪽에서 일부러 다른 수를 쓰려고 함정을 파 놓은 건 아닐까요?”

아론의 말에 슈리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보니 나와 헬리온이 공동으로 즉위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라, 일리드가 무슨 마음으로 황태자 자리를 포기한 건지 정확한 이유를 듣지 못했다.

“그건… 조만간 제가 한 번 일리드 대공을 만나 의중을 떠보겠습니다.”

내가 일리드를 만난다고 하자 헬리온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걸 알기에 차마 만나지 말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혹시 에보니 블라딘에게서 따로 들은 이야기는 없으신가요?”

라비의 물음에 이번에도 나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에보니도 거병에 대해서 크게 하는 말은 없었어요. 다만 자신이 요새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는 것이 있으니 때가 되면 알려주겠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정말 끝까지 의뭉스럽네. 이제 한 배를 탔으면서 이렇게 단독 행동을 하다니.”

헬리온은 에보니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그쪽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우리도 에보니에게 주는 정보가 많지 않으니 적어도 그녀 쪽에서 정보가 새어 나갈 일은 없을 거야.”

“그래. 그래야지.”

대답은 그렇게 했으나 헬리온의 목소리는 여전히 착잡했다.

잠시 후, 자리를 비켜달라는 헬리온의 명에 텔리아 남매가 처소를 나섰다. 마지막으로 나선 라비의 발소리까지 멀어지자 헬리온이 내게 물었다.

“이슈텔, 오늘 폐하께서 널 불러다 무슨 말씀을 하셨어?”

“아, 어. 나중에 폐하께서 승하하셔도 카리나를 해치지 말아달라고 하셨어.”

“아……. 사실 내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

“카리나를 해치지 말라고?”

“아니, 나는 그 여자 말고 일리드. 나중에라도 일리드한테 폐하께서 내린 처벌보다 더한 벌을 내리지 말라고 하셨어.”

헬리온 역시 최근 폐하께 당부의 말을 들은 듯했다. 나와 헬리온이 즉위하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두 사람의 미래를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우선 폐하 앞에서는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그쪽에서 허튼 수작을 부리면 가만있지는 않을 거야. 난 후환을 남겨두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폐하께서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셨잖아.”

“아니,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해야하는 거야. 네가 카리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했어도 그 여자가 널 끝까지 괴롭힌다면 난 망설이지 않고 그 여자를 죽일 거야.”

헬리온의 심각한 표정을 보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듯했다. 헬리온은 성정상 나보다 망설임이 없고 행동이 빠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어쩌면 카리나가 가장 조심해야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헬리온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쩌면 일리드도.

아직 카리나에게 연민이 남아있는 나와 달리 헬리온은 사촌 형에게 일말의 동정조차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그래, 헬리온이 맞는 거지.’

장자 계승으로 황위를 승계하지 않은 황제는 필연적으로 정적을 두게 된다. 그들이 태세를 전환하여 황제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이지 않는 이상, 재위 기간 내내 크고 작은 잡음이 발생한다.

결국 나와 헬리온은 카리나, 일리드와 공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폐하의 당부를 지킬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헬리온만큼 단호하지 못한 나는 또다시 망설였다. 오래 전, 헬리온이 마구간지기였던 카리나에게 총을 겨누었던 그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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