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갈림길 위에서(1)
“이야, 드디어 다시 전서조가 날아가네.”
황궁 가장 높은 발코니에서 망원경을 보고 있던 에보니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곳에 있으면 황궁은 물론 수도의 시가지까지 한 눈에 보인다. 시간과 여유만 있다면 동쪽 궁에서 날아오른 회색빛 전서조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이다, 오 분만 더 늦었어도 깜빡 잠들 뻔했어.”
에보니가 망원경을 챙기다 말고 발코니에 벌렁 드러누웠다. 긴 시간 정찰병처럼 주변을 살피고 있던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그녀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 살며시 눈을 감은 채 머릿속을 정리했다.
회색빛 전서조. 주로 제국의 남부 지방에서 이용하는 빠르고 영리한 새였다. 비둘기와 잘 구별가지 않아 보통 사람들이 본다면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에보니는 어린 시절부터 남부와 북부 등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냈다. 게다가 블라딘의 가주로 지내며 볼테로 황자와 연락을 주고받은 탓에 전서조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 날아간 전서조는 카리나와 볼테로 사이를 연결해주는 새가 틀림없었다.
“그래도 아직 발에 색 띠가 묶여 있진 않았어.”
서신을 주고받는 사람들끼리 급한 일이 생기면 새의 발에 색 띠만 묶어 날려 보낸다. 그러면 정찰병들이 망원경을 통해 재빨리 위급 상황을 알아채는 것이다.
‘두 사람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진 몰라도 조만간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겠어.’
근래 들어 볼테로가 에보니에게 연락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에보니는 그 이유가 카리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카리나가 황자에게 지속적인 연락을 취할 거란 예상이었다.
“카리나 입장에선 헬리온이 황태자가 되면 안 되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볼테로 황자의 성정상 거병이라도 할 텐데……. 이제 관건은 폐하께서 얼마나 더 오래 사시느냐겠군.”
이슈텔의 이중첩자가 된 이후, 에보니는 이전보다 훨씬 긴장감 넘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전서조를 발견한 수확을 얻었으니 며칠 만에 깊은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뭐 합니까?”
깜빡 잠이 든 지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누군가 에보니를 불렀다.
퉁명스럽지만 반가운 목소리에 그녀가 한쪽 눈만 살짝 떠올렸다. 태양을 등지고 선 남자는 율리언 릴체였다. 그가 발코니에 누워있는 에보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시하러 왔어요? 나 참. 배신 안 한다니까 그러네.”
“황궁을 순찰하다 우연히 발견해서 온 것뿐입니다.”
“흐음, 우연을 가장한 감시인 것 같은데?”
블라딘 공작에서 레이디 블라딘이 된 후, 에보니는 보잘 것 없는 신세가 되었다. 이슈텔의 이중첩자 노릇을 한다 하더라도 여차하면 망설임 없이 버려질 것이다.
그런데도 릴체 후작은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 그녀를 감시하곤 했다. 에보니에게서 새어 나갈 중요한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하필 새로 얻은 집도 릴체 후작 저 근처라 집에 있을 때도 하루 종일 그의 시선이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다.
“바닥이 찹니다. 그래도 한때 공작이었던 분이 이렇게 아무 데나 누워 있어도 됩니까?”
작게 혀를 찬 율리언이 에보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보니가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제 손을 잡으라는 듯 짧게 고갯짓했다.
“왜 이렇게 다정하게 굴어요? 내 걱정을 하는 건 아닐 테고.”
에보니가 율리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리언이 그녀의 손에 들린 망원경을 보며 말했다.
“망원경으로 뭘 그렇게 보고 있었어요? 감시할 거라도 있습니까?”
“있긴 한데 아직은 나만 알고 있을래요. 때가 되면 말해줄게요.”
에보니는 굳이 지금 카리나와 전서조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감시하는 눈이 많아지면 카리나 쪽에서 먼저 눈치를 챌 수도 있으니까.
그러자 율리언은 찝찝한 얼굴로 에보니를 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율리언. 당신이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거니까.”
그러나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 에보니는 특유의 의뭉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슈텔 리젠트라, 아닌 척해도 그 사람이 날 생각해주는 마음이 기특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죽을 때 죽더라도 뭐 하나는 해주고 갈 생각이에요.”
에보니는 율리언이 뭘 해줄 거냐고 물을 줄 알았다. 그의 호기심을 잔뜩 부풀려 놓고 마지막에 가서는 알려주지 않을 거라고 장난을 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율리언은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에보니가 한 말을 곱씹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는 에보니를 보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에보니. 왜 당신은 항상 그렇게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합니까?”
뜻밖의 질문에 벙찐 에보니가 보랏빛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녀를 보는 율리언의 눈동자는 미동도 없었다.
“어렵게 살아난 목숨이면 그만큼 귀중하게 여기십시오. 자꾸 신경 쓰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에보니가 억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율리언은 그녀의 뒷말은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뭐야. 내가 더 신경 쓰이게…….”
에보니가 율리언이 떠난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 * *
발코니에서 내려온 에보니는 잠시 황궁 복도에 멈춰 서서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
황제는 입궁하자마자 알현했고, 헬리온을 만나러 가는 건 보는 눈이 많으니 포기하기로 했다. 일리드는 아마 처소로 간다 하더라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남은 곳은 하나뿐인가?’
에보니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카리나의 처소로 향했다.
처소에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벽을 긁는 꺼림칙한 소리가 났다. 이게 뭐지 싶어 귀를 기울이자 곧이어 익숙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샤샤!”
에보니가 반갑게 소리치며 검은 털 뭉치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는 발톱으로 처소 문을 긁고 있는 고양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예쁜이!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네 주인은 어디 가고 떠돌이 고양이처럼 처량맞게 있는 거야?”
에보니가 샤샤의 몸을 쓰다듬어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소 주변은 조용했다. 문 앞을 지키는 하녀가 있을 법도 한데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썰렁했다.
“흐음, 네 주인이 뭔가 재밌는 일을 꾸미고 있나 본데? 맞지, 아가야?”
에보니의 물음에 고양이는 노란 눈을 깜빡이고는 크게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에보니가 고양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럼 우리 둘이 몰래 여기 숨어서 네 주인을 기다려보자.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오겠지.”
샤샤를 품에 안은 에보니가 커다란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고양이를 안은 채 깜빡 잠이 들었던 에보니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곤 정신을 차렸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해가 뉘엿뉘엿 지던 하늘은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에보니는 고양이가 깨지 않게 조심히 몸을 움직여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이 천천히 처소 문에 열쇠를 꽂아 넣고 있었다. 커다란 문이 열리는 순간, 에보니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잡았다!”
“이 미친-”
소스라치게 놀란 카리나가 욕설을 뱉다가 말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건만 남을 의식하는 티가 역력했다.
에보니의 품에 안겨있던 샤샤가 기겁을 하며 귀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녀석이 에보니의 품에서 뛰어내리더니 냉큼 제 주인의 뒤로 숨었다.
“네 처소인데 왜 그렇게 도둑고양이처럼 다녀? 뭐 켕기는 게 있나 본데?”
“조용히 해!”
카리나가 이를 악물며 주의를 줬다. 그리고선 손에 든 주머니를 등 뒤로 숨겼다. 향긋한 허브향이 풍기는 게 분명 약초가 든 자루였다.
그러자 에보니가 일부러 눈치 없는 척, 복도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크게 소리쳤다.
“와! 곧 황후가 되실 록펠트 공작 부인께서 친히 궁 밖으로 나가셔서 약초를 뜯어 오셨다! 황제 폐하를 위해서 이렇게 몰래 외출을 하시다니!”
“조용히 못 해?!”
카리나가 냅다 손을 뻗어 에보니의 입을 막았다. 잠시 어찌할까 고민하던 카리나는 에보니가 더 큰 소란을 일으키기 전에 처소 안으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아야, 무슨 힘이 이렇게 세. 팔 부러지는 줄 알았네.”
“당신 미쳤어? 언제부터 이 앞에 죽치고 있었던 거야?”
카리나가 에보니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이를 부득 갈았다. 이 빌어먹을 여자가 제 눈앞에 띄는 것 자체가 거슬렸다.
“황궁에 온 김에 겸사겸사 자기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왔지.”
“됐으니까 입 닥치고 꺼져. 이제 공작도 아닌 너 따위랑 얼굴 보고 할 얘기 없어.”
“어휴, 서운해라. 나는 자기가 하녀일 때부터 다정다감하게 대해줬는데. 이젠 내가 별 볼 일 없게 됐다고 무시하는 거야?”
에보니의 너스레에 카리나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고는 들고 온 자루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곧 방 안 가득 허브향이 퍼졌다.
“음~ 향기 좋아. 무슨 풀이야?”
“알 거 없어. 조용히 앉아있다 나가기나 해.”
망토를 벗은 카리나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은빛 머리카락을 만지는 그녀의 손톱에 흙이 묻어 검게 물들어 있었다.
‘황제 폐하 간호에 소홀하다고 하더니 그런 것도 아닌가 보네. 그런데 이렇게 은밀하게 외출할 필요는 없지 않나?’
카리나와 자루를 번갈아 보던 에보니가 뒷짐을 진 채 오래간만에 온 카리나의 처소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방은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가구는 그대로였고 황제의 약을 달이는 기구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요새 들어 어린 조카와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답게 방 안에 아이 장난감이 많다 정도였다.
‘어, 저게 뭐지?’
에보니의 시선이 방구석에 쓰러져 있는 액자로 향했다. 유리가 깨진 탓에 처음엔 무슨 그림인지 알아채지 못했으나 곧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슈텔 리젠트라,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이 담긴 초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