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131화 (131/160)

131화. 카리나의 절망

“카리나…….”

카리나가 교지를 든 채 몸을 심하게 떨자 황제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카리나는 교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읽은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보아도 처음 읽은 것과 다른 점이 없었다.

교지의 마지막 장을 뒤집어 보았다. 혹시라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써두었을까 싶어 뒷면까지 전부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안에 적힌 이름은 이슈텔과 헬리온뿐이었다.

황제는 철저히 카리나를 외면한 것이다.

“폐하, 어찌 제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카리나가 황제의 눈앞에 교지를 들이밀며 소리쳤다.

“차라리 저한테 자결하라 명하세요. 그러면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겠죠. 다 죽어가는 폐하를 여태껏 살려드린 게 전데, 이런 제겐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렇게 황제 앞에서 언성을 높인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마구 지껄였다.

“이걸 왜 제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이제 죽을 날을 받아놨으니 알아서 궁을 나가라 뭐 그런 말씀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카리나…….”

황제는 여전히 걱정스런 목소리로 카리나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얼굴이 새빨개진 채 가슴을 들썩였다.

“이슈텔에게 사과해라……. 그러면 너를 해치지 말라고… 교지에 적어 두겠다…….”

“하!”

황제의 말에 카리나가 크게 코웃음을 쳤다.

“거참 대단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군요. 예, 목숨만은 살려주시니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근데 교지 몇 줄 적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사과까지 해야 합니까?”

카리나가 있는 힘껏 교지를 바닥으로 던졌다.

“전 그 여자한테 잘못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라고요!”

“…….”

“그 여자가 황궁을 나간 게 다 제 탓 같으신가요? 아니요. 전부 일리드 대공의 욕심이고 에보니 블라딘의 야망 탓이며, 폐하의 우유부단함 때문입니다!”

“…….”

“나를 천하의 악녀로 만들어 욕받이로 써 놓고, 이제 와서 책임도 혼자 지라는 거잖아요!”

카리나는 억울했다. 황제와 일리드, 그리고 에보니는 그 여자에게 굳이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비슷한 힘을 가진 자들끼리는 과거를 묻는 게 쉽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중요하다며 언제 싸웠냐는 듯 의기투합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결국 희생양이 되는 건 가장 약한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제 카리나는 이슈텔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던 때와 달랐다.

사과를 하는 것이 자존심 상해 미칠 것 같았고, 용서를 구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토록 경멸하고 비웃던 귀족적인 면모가 자신에게도 생긴 것이다.

“허나 카리나… 그 애가 널 살린 건…… 사실이지 않느냐…….”

황제의 말에 카리나가 몸을 움찔했다.

이슈텔 리젠트라, 그 여자가 자신을 몇 번이고 살려준 것은 카리나에게 늘 극복하기 힘든 약점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살려준 목숨으로 사사건건 그녀와 반목했다. 그 사람 덕분에 살아 있으면서 이제는 그녀가 사라지길 바랐다.

‘이제 와서 그게 뭐?’

하지만 황제의 교지를 보는 순간 일말의 죄책감조차 사라졌다.

황후도 아니고 황제가 된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모든 걸 다 잃고 황궁을 떠난 그 여자가. 이제 세상을 다 가진 자가 되어 모든 이들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설령 그 여자가 끝까지 자신을 살리려는 위선을 떤다고 하더라도, 그 옆에 있는 신하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리젠트라가 위태로울 때 제일 먼저 자신에게 붙은 것들. 그들이 가장 빨리 자신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전부 카리나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더욱 가혹하게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때는 정말 단두대에서 죽는 게 감사할 정도로 끔찍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황제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슈텔에게 사과해라……. 그럼 그걸 이유로…… 지금처럼 부족함 없이…… 살 수 있게 해주겠다…….”

지금까지 이슈텔에게 보인 카리나의 행보가 심각했기에 형식적으로 나마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사죄를 해야 했다.

그래야 그걸 빌미로 카리나에게 같은 죄를 씌워 벌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황제라고 이제 와서 두 사람이 정말로 화해하길 바랄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카리나가 어떻게 생각하든, 황제로서는 그녀를 살려줄 최선의 방안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폐하께서 제게 사죄를 종용할 자격이나 되십니까?”

그러나 지금 카리나에게 황제의 의도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 여자는 양녀로 들이시어 황제 자리까지 준다 하시고는, 제겐 살기 위해 필요한 황후 자리조차 주지 않으셨잖습니까.”

그 말을 내뱉고 나니 마음속에 진 응어리가 더욱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황후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 여자에게는 바라지도 않은 제위를 주면서.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그저 남들 앞에서…… 보여주기만 해라……. 뒤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싫습니다.”

“싫어……?”

“네, 싫습니다.”

카리나가 오기를 부리듯 단호하게 거절했다.

황제가 굳은 얼굴로 카리나를 응시했다. 카리나는 그 시선을 받아치듯 황제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결국 황제가 표정만큼이나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다……. 네가 감히 황제의 옥새를 찾는 것에…… 책임을 묻겠다…….”

순식간에 카리나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다.

너무 놀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여기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정말 죽을 지도 몰랐다.

“내가 봐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카리나……. 그러니 이제 그만…… 멈추어라…….”

황제의 탁한 푸른 눈이 정확히 카리나의 얼굴을 향했다. 카리나는 그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라고 속으로 무시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황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끝났어, 전부 다.’

카리나가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황제의 시선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제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것 같았다.

카리나가 황제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황제전을 뛰쳐나갔다.

* * *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카리나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황궁 복도를 걸었다.

며칠 안에 교지에 적힌 내용이 공표될 것이다. 황제가 살아있는 한 공표된 내용을 막을 방도가 없을 것이다.

볼테로 황자가 반발하고 나설 수 있지만 이미 일리드가 제 아비의 치부를 전부 고발했다. 볼테로와 일리드는 휘어튼 가문을 몰살한 죄를 물어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헬리온이 황위를 잇게 되는 걸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럴만한 명분을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테브로니아가 되는 거. 그래, 그거는 사안이 사안인 만큼 곧바로 해결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문제일 뿐이다.

황제와 리젠트라 공작가의 뜻이 같다면 이 제국에서 못할 일은 없었다. 게다가 헬리온은 이슈텔 리젠트라를 정비로 들이기 위해서 뭐든 할 위인이었다.

‘결국 내 손으로 그 여자를 황제로 만들어준 꼴이 된 거야.’

에보니 블라딘이 과욕을 부렸다가 리젠트라 공작가에 면죄권을 쥐어준 것처럼, 이번엔 자신이 너무 조바심을 내어 황제의 마음이 이슈텔에게 기울게 된 것이다.

‘아니, 어차피 이리 될 운명이었던 건가? 그 여자는 언제나 나보다 가진 게 많았잖아.’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하늘은 그녀의 불행에 더 큰 행운으로 보답해주고, 자신의 행복은 짧은 순간만 허락해주었다.

신을 믿지 않지만 만약 있다면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카리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넓은 황궁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결국 갈 곳이라곤 자기 방밖에 없는 카리나가 처소로 돌아왔다. 한참을 자리에 앉아 멍하니 눈만 끔뻑이고 있는데 무언가 창문을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서조.”

남부로 보냈던 새가 답장을 달고 돌아왔다. 재빨리 창가로 간 카리나가 새의 발목에 묶인 편지를 풀었다.

카리나의 예상대로 볼테로는 그녀의 편지에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그녀가 말한 대로 군대를 준비해뒀으며, 다시 전서조를 보내면 언제라도 황궁을 점령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두었다는 내용이었다.

카리나는 이슈텔 리젠트라가 헬리온과 공동으로 즉위할 거라는 답장을 쓸까 고민하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지금 볼테로에게 그 사실까지 알렸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카리나는 곧바로 편지를 불에 태워 증거를 없앴다. 마지막에 자신의 편에 선 사람이 황제나 에보니도 아닌,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볼테로 황자라는 게 우스웠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황제의 맘을 돌리려는 짓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이미 결과는 정해졌다. 황제는 이슈텔 리젠트라를 택했고 자신은 철저하게 이용당하다 버려진 것이었다.

가장 좋은 것은 황제가 교지를 발표하기 전에 죽는 것이었다. 살아서 교지를 발표한다면 이를 뒤집을 방안이 없었다.

카리나가 창문가로 걸어가 황궁 사냥터 쪽을 바라보았다. 요즘같이 찬바람이 부는 계절에는 독초가 잘 자랐다.

황궁 사냥터에 있는 잡초들. 남들이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닌 그 풀이 병약한 노인에겐 얼마나 큰 독이 될 수 있는지 카리나는 잘 알고 있었다.

“폐하. 지금껏 제가 폐하의 목숨을 살려드렸으니, 마지막 숨은 저를 위해 남겨 주셔야겠습니다.”

진작 끊어져야 했을 목숨이 여기까지 이어진 건 전부 카리나 자신의 공이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 황제를 보내주는 것 정도는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카리나는 가슴 속에 번져나가는 죄책감을 끝내 외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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