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130화 (130/160)

130화 : 테브로니아

“폐하, 이게 대체…….”

놀란 내가 고개를 들어 황제 폐하를 보았다.

헬리온이 후계자가 될 거라는 건 바로 기뻐할 수 있었지만, 내 이름이 적힌 문장은 아무리 읽어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제의 양녀라니. 지금껏 이런 선례는 없었다.

후사가 없는 황제의 뒤를 잇기 위해 같은 황족을 양자로 들인 적은 있어도 나처럼 황족도 아닌 이가 양녀라니. 도무지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슈텔. 네가 나의 딸이 되어라……. 그래야 헬리온과 혼인할 수 있다…….”

폐하께선 어눌한 말로 나와 헬리온에게 설명을 시작하셨다.

황제께선 헬리온을 후계자로 정하면서 나와 그가 혼인할 수 있는 방법을 제일 먼저 생각했다고 말씀하셨다.

헬리온이 황제의 양자가 되어 황태자가 되는 건 정통성과 공정성 면에서 아무도 반발하지 못할 사안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의 정비가 되는 건 문제가 달랐다.

나는 스스로 황태자비 자리를 내려놓고 황궁을 나왔다. 다시는 황족과 결혼할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반대 의견들을 묵살하고 황후가 된다 하더라도 잡음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내 세력이 약해지는 순간이 오면 모두들 가장 먼저 나를 황후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할 것이다.

황제께선 그런 상황들을 전부 막을 거라고 하셨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리젠트라가 아닌, 황족인 테브로니아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폐하, 다른 귀족들이 반대할 겁니다. 게다가 제가 황녀가 되면 헬리온과의 후계 구도도 몹시 복잡해질 텐데…….”

폐하의 뜻대로 된다면 나와 헬리온은 법적 사촌인 상태로 혼인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폐하의 딸이 되고, 헬리온은 황제의 양자가 아닌 사위가 된다.

하지만 황제의 딸이 황제의 사위보다 후계 서열이 밀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는 건 곧 나도 그에 못지않은 지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슈텔…….”

“예, 폐하.”

“황후가 아니라 황제가 되어…… 헬리온과 공동으로 즉위해라…….”

폐하의 말씀은 놀랍다 못해 가히 충격적이었다.

황족이 아닌 귀족이 황제의 양녀가 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게다가 공동 즉위라는 것 또한 제국 역사상 최초였다.

제아무리 제국에서 제일가는 공작가 출신이라 할지라도 버거운 자리였다. 나는 그 자리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폐하. 폐하의 뜻은 감사하오나 제겐 황위를 이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헬리온을 양자로 들이시어 황태자로 삼아주십시오.”

그러나 내 간곡한 청에도 폐하께선 완강히 고개를 저으셨다.

“하지만 너를 제대로 지키려면…… 이 길뿐이다……. 내가 죽으면…… 널 끌어내리려는 자들이…… 더욱 활개 칠 게야…….”

“허나-”

“나는 너를……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아…….”

폐하의 말씀에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폐하께서 힘없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으셨다. 그리고는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어리석어서…… 너를 잃고 난 후에야…… 네 소중함을 알았어…….”

“폐하…….”

“네가 약을 먹고 쓰러졌을 때…… 신이 있다면…… 너 대신 나를 데려가라고 빌었다……. 프리모스 때처럼…….”

프리모스의 이야기에 순식간에 붉어진 내 눈에서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폐하께선 나를 지킬 확실한 방안을 남기지 않으면, 죽어서도 황후와 황태자를 볼 낯이 없다고 하셨다.

폐하께서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계신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갑작스런 이별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것도 슬픈 일이었다.

내가 대답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리자 폐하께서 위로해주려는 듯 내 어깨를 다독여주셨다.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니…….”

폐하의 눈에서도 닦아 내지 못한 눈물이 떨어졌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늦지 않았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고개를 저었다.

긴 시간 켜켜이 쌓아온 마음속의 응어리가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가슴 속에서 녹아내린 감정들이 눈물이 되어 뺨 위로 흘렀다.

너무 오랫동안 돌고 돌아온 길.

서로를 아껴주면서도 미워하던 그 긴 시간들의 이름은 결국 사랑이었다.

* * *

같은 시각.

카리나는 처소에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하고 있었다. 황제가 이슈텔과 헬리온을 불렀다고 해서 몰래 비밀 통로로 가보려고 했건만, 때마침 기사들이 그녀의 처소를 에워싼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황제께서 궁인들을 모두 처소 밖으로 나오지 말게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카리나는 자신은 궁인이 아니라 황후가 될 공작 부인이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기사는 황족인 일리드도 처소에 있다며 그녀의 반발을 단번에 일축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확실한데…….’

의자에 앉은 카리나가 다리를 꼰 채 불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일리드가 황태자 자리를 포기했으니 헬리온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수작을 부리려는 게 분명했다.

“이봐, 에시.”

카리나의 부름에 창문을 닦고 있던 에시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옥새에 대해 뭐 알아낸 거 없어?”

“아직 없어. 찾게 되면 바로 알려줄게.”

실망스러운 대답에 카리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여차하면 남부에서 거병을 할 수 있게 손을 써두었다. 그렇게 만발의 준비를 다 해놓았건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기만 했다.

에시는 카리나의 불규칙한 숨소리를 들으며 쿵쿵거리는 심장을 붙잡았다. 평소에 자연스럽게 거짓말하는 연습을 해둔 게 이렇게 쓸모 있었다.

‘폐하의 옥새. 초상화 방에 있는 게 분명해.’

그 날은 에시가 황제전을 담당하는 날이었다.

황제의 휠체어 곁에 서 있는데 심각한 표정의 일리드 대공이 찾아왔다. 황제는 하녀들을 물렸고 에시는 황제전 문 앞에서 일리드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뒤 황제전을 나온 일리드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웠다. 그리고 잠시 후, 에시는 창밖으로 마차를 탄 대신관이 황궁에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

에시가 대신관의 뒤를 쫓은 건 순전히 직감 때문이었다. 황제와 일리드의 독대, 이어진 대신관의 입궁. 카리나가 낌새를 챌 만도 한데 그녀는 무엇을 하는지 처소에 박혀 한참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

이때가 기회다 싶었던 에시는 몰래 대신관을 따라갔다. 따라온 수행인들까지 물리고 대신관이 찾은 곳은 초상화 방이었다. 그리고 대신관은 황제를 알현한 후 신전으로 돌아갔다.

대신관이 떠난 후 황제전 청소를 하러 들어간 에시는 책상 위에 놓인 금빛 서류를 발견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없던 물건이 생긴 건 분명 의아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금빛 서류는 한눈에 보아도 중요한 문서 같아 보였다.

에시는 본능적으로 그 문서에 옥새가 찍혀있음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대신관이 들른 곳에 옥새가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내가 먼저 옥새를 찾아서 공녀님께 가져다 드려야 해.’

허나 에시 자신을 포함한 다섯 하녀들을 감시하는 카리나의 눈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초상화 방은 다른 하녀들이 담당하는 구역이라 에시가 함부로 출입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랬다간 카리나의 의심을 살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은 에시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록펠트 공작 부인.”

그때, 기사 한 명이 카리나의 처소로 들어왔다. 카리나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기사를 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찾아계십니다.”

* * *

‘나는 또 무슨 일로 부르는 거야?’

카리나의 신경질적인 발걸음 소리가 황제전으로 향하는 복도를 가득 울렸다.

안 그래도 황제가 이슈텔, 헬리온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엿듣지 못해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친 상태였다. 카리나가 날카로운 표정 그대로 황제전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벌써 다 갔잖아?’

혹여나 이슈텔이나 헬리온이 있을까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휠체어를 탄 황제의 주위에도 하녀 하나 없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나 보군.’

불길한 예감에 카리나가 가슴께에서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찾아계셨습니까, 폐하.”

“그래……. 이리 가까이 오거라…….”

카리나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황제가 금빛 서찰을 건넸다. 꽤 오랜 시간 황제의 곁에서 지냈던 카리나도 처음 보는 문서였다.

“읽어 보거라…….”

카리나가 의아한 얼굴로 문서를 펼쳤다. 그리고는 빠르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헬리온을 황태자로 세우겠다는 교지로군.’

예상은 했지만 막상 헬리온을 후계자를 정한다는 교지를 보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카리나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래도 황제가 내 살길은 마련해뒀겠지.’

헬리온이 황제가 되면 카리나 자신이 죽은 목숨이 된다는 건 황제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공작 부인 작위를 반납시키고 한적한 시골로 보내라고 했을 것이다. 과거의 죄를 물어 처벌하지 말라는 유언 정도는 남겼을 것이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자신이 황제였어도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그 정도뿐일 것 같았다. 물론 볼테로와 손을 잡은 카리나는 그 뜻을 따라줄 생각이 없었지만.

카리나가 교지의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들어온 문장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았다.

[이슈텔 리젠트라를 헤브론 황제의 양녀로 입적시킨다.]

[헬리온 테브로니아는 이슈텔 테브로니아와 혼인하여 선황의 조카 겸 사위 자격으로 황위를 잇는다.]

[테브론 제국은 헬리온 테브로니아와 이슈텔 테브로니아 두 황제가 공동 즉위하여 통치하게 한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문장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양녀라니 공동 즉위라니. 헬리온이 황제가 되는 것도 모자라 이슈텔까지 황제가 된다고?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그보다 더 믿기 힘든 사실이 있었다.

헤브론 황제.

카리나의 보호자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던 황제가 그녀를 위한 어떠한 대비책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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