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단 한 발자국
‘일리드, 이 빌어먹을 개자식!’
카리나의 잇새로 숨기지 못한 욕설이 섞여 나왔다.
숨을 죽인 채 일리드와 황제의 대화를 엿듣던 카리나가 조용히 비밀 통로를 빠져나왔다.
처소로 돌아가는 내내 심장이 쿵쿵 뛰었다. 복도의 하녀들이 인사하는 것이 귓가에 들리지도 않을 만큼 정신이 곤두서 있었다.
“제기랄!”
방에 들어온 카리나가 분에 찬 비명을 지르며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쓸었다. 깃펜이 들어있던 잉크병이 쓰러지며 책상이 온통 검게 물들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카리나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단 한 발자국이면 되는데! 누구 덕에 여기까지 온 줄도 모르고 일을 그르쳐?!”
이제 와서 회개하는 척, 모든 것에 달관한 사람처럼 황태자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일리드가 가증스러웠다.
가족을 인질로 잡고 그 여자를 제 것으로 만들려고 할 때는 언제고.
그깟 독약 한 번 마신 게 무슨 대수라고, 그 여자가 걱정돼 벌벌 떠는 꼴이 같잖고 우스웠다.
조카인 일리드나 삼촌인 황제나 결국 똑같은 것들이었다. 리젠트라를 잡겠다고 온갖 술수는 다 써놓고 결국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해 이 사달을 만든 것이다.
이슈텔 리젠트라. 그 여자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그럴까 봐 겁이 나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나는 이대로 죽어도 된다는 거야?”
일리드, 그 유약한 자식은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헬리온에 대한 질투와 이슈텔에 대한 욕심만 믿었을 뿐, 일리드라는 인간 자체는 카리나의 경계 밖의 인간이었다.
“헤브론 황제. 당신이 내게 이러면 안 되지.”
하지만 황제가 자신에게 이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황후도 되지 못한 마당에 이슈텔이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된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살아남을 방도 정도는 말해주고 결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바로 교지를 써내려 갈 수 있단 말인가. 이슈텔을 끔찍이 사랑하는 헬리온이 황제가 된다면 제일 먼저 죽일 사람이 자신인데.
“옥새를 찾아야 해. 그래서 반드시 교지든 유언장이든 조작해야 해.”
황제가 작성한 문서에 효력을 발휘하려면 옥새가 필요했다. 조만간 황제는 자신이 쓴 교지에 찍기 위해 옥새를 꺼내 들 것이다.
카리나는 신전에서 저주를 건 하녀들을 황제전으로 배치할 생각이었다.
그들 중 하나는 옥새가 황제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위치를 파악하여 옥새를 손에 넣을 셈이었다.
“그래. 당신네들 같은 황족이 뭘 알겠어. 평생 무언가를 위해 목숨 한 번 걸어본 적 없는 것들이.”
믿었던 황제에게 완전히 배신당했다는 충격에 카리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댁들처럼 약해빠진 정신머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끝까지 모질지 못하면 결국 패배자가 될 뿐이야. 황제, 일리드, 에보니. 일은 자기네들이 벌여놓고 마무리는 내가 짓게 생겼잖아!”
그러니 결국 승자가 되는 것도 카리나 자신뿐일 것이다.
카리나는 당장에라도 달려가 일리드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허나 그렇게 해도 이미 그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깃펜을 주웠다. 약해 빠진 아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건 그의 아버지밖에 없었다.
카리나가 책상 위로 흐른 잉크에 펜을 적신 후 편지를 써 내려갔다.
[일리드가 스스로 황태자 자리를 포기했다.
황제가 곧 헬리온을 후계자로 발표할 것이다.
그러니 언제라도 황궁을 점령할 수 있게 군대를 준비해두어라.]
볼테로가 본다면 눈이 뒤집힐 만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단번에 그를 미치게 할 수 있을 만큼 자극적인 내용으로 편지를 쓴 카리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카리나가 편지를 접어 창가에 있는 새의 발에 매달았다. 회색빛 전서조가 남부 대공령을 향해 날아올랐다.
남부에게 거병을 하라고까지 적었으니, 혹시라도 중간에 편지가 발각된다면 목숨을 보전하진 못할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야 말로 정말 단두대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은 목이 날아갈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겁쟁이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끝내 마지막 선을 넘지 못하는 멍청이들과도.
이 길이 틀렸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끝을 봐야 했다.
자신은 지체 높은 황족이나, 황제가 아끼는 외척과는 출발점부터 달랐다. 그들은 실패해도 돌아갈 곳이 있지만 자신에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 난 내 선택에 최선을 다한 거야.”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은 이 길 하나뿐이었다.
* * *
황제 폐하의 부름을 전해 들은 건 어느 날의 이른 오전이었다.
가족들과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칠 무렵, 황궁에서 사람이 왔다. 폐하께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늦지 않게 궁으로 들라는 부름이었다.
“뭐야. 이번엔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이슈텔을 부르는 거지?”
황궁 하인이 떠나자마자 자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태자비 자리를 내려놓은 것도 치가 떨리는데 이제 와서 얼굴 보고 할 이야기가 뭐 있다고.”
“그래도 이슈텔, 준비는 잘 해 가지고 가요. 괜히 책잡히지 않게. 특히 옷이랑 소지품 확인 잘 하고요.”
드레스에서 독초가 발견된 사건 이후, 실비아는 옷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되었다. 새언니의 걱정을 잘 아는 나는 알겠다고 하고 내 방으로 돌아가 황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헬리온까지 함께 부르신 이유가 있을까.’
나 혼자 가는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의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전 라비에게 들은 말로는 헬리온도 폐하의 부름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 둘을 함께 부르신다면 분명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 * *
황궁에 도착한 나는 먼저 헬리온의 처소에 들렸다. 그러자 하녀는 헬리온이 황제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황제전이 가까워지자 문 앞에 서있는 헬리온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워 한달음에 그에게 다가갔다.
“헬리온.”
“아, 이슈텔.”
나를 발견한 헬리온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 역시 갑작스레 함께 오라는 폐하의 부름이 의아한 듯했다.
“폐하께서 왜 우릴 부르셨을까?”
“글쎄. 나도 밤새 고민했는데 잘 모르겠어. 최근 들어 나를 보실 때도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기도 했고.”
헬리온의 대답에 궁금증만 더욱 깊어져 갔다. 불안한 마음에 내가 헬리온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의지하고 싶었다. 폐하를 뵙기 전까지 이렇게 손이라도 잡고 있지 않으면 불안감에 질식될 것만 같았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들어가자.”
헬리온이 괜찮다고 다독이며 나를 데리고 황제전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를 지나자 휠체어에 앉아 계신 황제 폐하가 보였다. 침상에 누워 계실 줄 알았는데 시중드는 하녀 하나 없이 홀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폐하의 탁한 푸른 눈동자가 나와 헬리온의 맞잡은 손에 닿았다. 우리가 눈앞에 가까워질 때까지 폐하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와 헬리온이 동시에 폐하께 인사를 드렸다. 폐하께선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와 헬리온을 번갈아 보셨다.
“이리 오거라…….”
폐하의 힘없는 손짓에 나와 헬리온이 긴장한 발걸음으로 폐하께 가까이 다가갔다. 폐하께선 먼저 헬리온을 향해 고개를 돌리셨다.
“왜 너희를 함께 불렀는지…… 궁금하겠지……. 바로 말해주겠다…….”
긴장감으로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폐하께서 잠시 숨을 고르신 후 천천히 입을 여셨다. 그리고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헬리온. 네가 나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헬리온의 푸른 눈이 놀라움으로 커다래졌다. 놀라기는 옆에 서 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이렇게 후계자를 정하시다니. 물론 그간 헬리온이 꾸준히 보여준 능력은 황태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폐하, 갑자기 무슨 말씀을……?”
헬리온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폐하와 독대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그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인 듯했다.
“내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오히려 지금 정한 것이…… 몹시 늦은 것이지…….”
폐하께서 더듬더듬 말을 이으시다 책상 위를 가리키셨다. 황제의 교지가 적힌 금빛 문서였다.
내가 교지를 가져다드리자 폐하께서 붉은 매듭을 푸시고는 나와 헬리온에게 건네셨다.
빼곡한 문장 아래로 가장 먼저 보인 건 옥새가 찍힌 붉은 자국이었다. 제국의 운명을 뒤흔들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문서였다.
내 손이 쉼 없이 떨리자 나 대신 헬리온이 교지를 넓게 펼쳤다. 우리는 글자 하나하나 빠르게 읽어가기 시작했다.
황제의 옥새가 찍힌 공식 문서인 만큼 어려운 단어와 문장이 가득했다. 그중 맨 앞장에 적힌 문장들이 황제의 뜻을 밝히고 있었다.
[헤브론 황제의 첫째 동생이자 제국의 황녀, 북부 대공령의 주인인 알렌시아 테브로니아의 아들 헬리온 테브로니아를 후계자로 정한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긴장이 풀리며 어지러움이 밀려드는 바람에 눈을 꼭 감았다.
‘된 거야. 그래, 헬리온이 황태자가 된 거야.’
현기증이 밀려가자 안도감이 온몸을 감쌌다. 혹여나 헬리온이 황태자가 되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던 시간을 더는 겪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이, 이슈텔. 여기 좀 봐.”
내가 계속 눈을 감고 있자 헬리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 바람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헬리온이 내게 교지의 뒷장을 보여주었다.
“이… 이게…….”
글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고 긴 문장 중 그 한 문장이 내 시선을 붙잡아 두었다.
[이슈텔 벨로나 리젠트라를 헤브론 테브로니아의 양녀로 입적시켜 헬리온 테브로니아와 혼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