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포기
황후의 추모식은 황족들과 황후 생전의 측근들만 모여 단출하게 진행됐다. 지난 추모식 때만 해도 황태자비 자격으로 참석했던 이슈텔은 올해는 황후의 측근 자격으로 추모식에 왔다.
투렌 남작 부인과 함께 온 그녀는 행사 내내 헬리온의 옆에 서 있었다. 맞은편에 일리드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인사만 건넸을 뿐, 한 마디 말을 걸지 않았다.
록펠트 공작 부인 카리나는 추모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녀가 황후의 생전 작위를 물려받았기에 식에서 호칭을 부르기 혼란스럽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궁 사람들은 카리나가 황후의 기일을 챙기지 않아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리나 역시 이를 눈치챘는지 추모식 전후로는 황제에게 납작 엎드린 채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삼갔다.
황궁은 그 후로도 늘 똑같았다. 황제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어갔다. 모두들 함부로 입에 올리진 못했지만 황제가 곧 승하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황제가 쓰러지기 전까지 경쟁의 우위는 일리드가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를 정도로 일리드는 필요 이상의 국무를 돌보지 않았다. 아직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그는 황태자 자리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자연히 무력한 일리드보다 헬리온 쪽으로 여론이 기우는 수순이었다. 그러나 중앙 귀족 중에 황제에게 빨리 후계자를 정하라고 말할 만큼 배짱 좋은 이는 없었다.
황제가 이대로 유언 하나 없이 세상을 떠난다면 북부와 남부 사이에 마찰이 생길 건 불 보듯 뻔했다.
마찰 정도면 순한 표현이었다. 후계 문제는 프리모스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던 문제였다.
그때도 황제는 알렌시아와 볼테로 중 황태제를 정하지 못했었다. 그 문제가 이제는 두 사람의 자식 대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일리드는 제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황제가 헬리온을 후계자로 정하는 걸 보고만 있지도 않을 뿐더러,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황좌를 뺏어올 이였다.
일리드는 자신 때문에 제국이 전쟁에 휘말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지금 황제전으로 걸음을 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황제 폐하, 일리드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일리드가 황제전에 당도하자 하녀장 소피가 고했다. 곧 문이 열리자 일리드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황제전 안으로 들어갔다.
카리나가 곁에서 모시고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황제전은 조용했다. 대신 다른 하녀 두 명이 창밖을 보고 있는 황제의 뒤에 서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폐하.”
일리드가 가까이 다가가자 황제가 천천히 자신의 조카를 돌아보았다. 늙고 수척한 얼굴에 생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기력 또한 없는 모습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쳐보였다.
“잠시 주위를 물려도 되겠습니까?”
일리드의 말에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하녀들이 조용히 황제전을 빠져나갔다. 일리드는 의자를 가지고 와 황제의 휠체어 앞에 앉았다.
“왜 이리…… 여위었느냐…….”
황제가 반쯤 감긴 눈으로 일리드를 보며 걱정했다. 그토록 잘생긴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총명하던 푸른 눈도 생기 없이 죽어있었다.
“스스로를…… 잘 돌보아라……. 너는…… 황족이니…….”
“네, 폐하.”
황제는 제 몸도 성치 않으면서 일리드를 먼저 걱정했다. 그 말에 일리드는 가슴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눈물을 겨우 참아냈다.
“그래…… 무슨 일로…… 온 거냐…….”
“폐하…….”
일리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이곳에 오기 며칠 전부터 굳게 마음먹은 일이었지만 막상 황제를 보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제는 일리드를 재촉하지 않았다. 조카가 스스로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일리드가 황제의 탁한 푸른 눈을 보았다. 스무 해 전에는 자신과 꼭 닮았던 푸른 눈이, 이제는 죽음을 앞둔 것처럼 빛이 바래 있었다.
“폐하. 폐하께 전해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겨우 내뱉은 말과 함께 일리드가 품 안에서 두꺼운 서찰을 꺼냈다.
북부의 인장이 찍힌 편지. 그간 카리나와 남부 대공령이 그토록 숨기고자 했던, 휘어튼 가문의 일이 적힌 편지였다.
“제가 전부 설명드리겠습니다.”
붉은 인장을 뜯는 일리드의 손이 떨려왔다. 꼭 해야 할 일임을 알지만 막상 제 입으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하니 목소리까지 갈라졌다.
그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알고 있다…….”
편지를 뜯던 일리드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황제가 알고 있다고? 남부와 휘어튼가의 이야기를? 하지만 황제에게 가는 편지는 철저하게 막았는데.
하긴. 이제 와서 누가 어떻게 전했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기회를 엿보던 북부 가신들이 전했을 수도 있고, 이슈텔이 손을 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영원히 진실을 숨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일리드는 허망한 마음을 애써 지워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폐하, 황태자 자리를 포기하겠습니다.”
일리드는 몇 달간 마음 깊이 품어온 말을 꺼냈다. 아버지가 들었다면 기함을 할 이야기였지만 이젠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 되었다.
“제가 아닌 헬리온을 황태자로 세워주십시오. 헬리온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됩니다.”
일리드는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제국을 짊어지기엔 너무나 유약했다.
반면 헬리온은 달랐다. 늘 어리고 충동적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는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왕재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슈텔. 일리드 자신은 황제가 되지 않더라도 그녀는 황후가 되어야했다.
황궁을 떠나야 할 사람은 이슈텔이 아니라 일리드 자신이었다. 자신만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폐하.”
일리드가 황제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저와 제 아버지를 벌하여 주십시오. 다시는 황위를 넘보지 못할 만큼 큰 벌을 내리시어 헬리온의 치세에 초석으로 삼아주십시오.”
무릎 꿇은 일리드의 검은 머리카락 위로 황제의 깊은 한숨이 내려앉았다. 한참을 대답이 없던 황제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포기하느냐……. 황제가…… 되고 싶다지…… 않았느냐…….”
일리드의 말은 황제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황제도 처음부터 일리드를 황태자로 세우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간 헬리온은 어리석다 싶을 정도로 우직하게 정정당당한 방법만을 고집했다. 하지만 일리드는 아니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황제를 찾아가 오직 자신만이 리젠트라 위에 황권을 바로 세울 수 있다며 황제를 설득했다.
황제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늙고 병든 자신 대신, 젊고 영리한 조카가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이루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결국 그 선택이 자신도 조카도 전부 망가뜨린 것이다.
“전부 제 욕심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 벌을 받고 싶습니다.”
애초에 일리드는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프리모스의 부고가 들려오자 크게 기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그는 깊은 환멸감을 느꼈다.
황태자 자리에 관심 없다고, 헬리온에게 황태자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예정대로 시에라와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했다.
그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말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제 뜻을 전하는 편지를 썼어야했다.
황좌에 대한 아버지의 욕망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적이었다. 시에라가 죽은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일리드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제 아버지라는 마음에 결국 아비의 죄를 덮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외부의 강압적인 힘 없이는 아버지를 멈출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대공비가 될 시에라 휘어튼을 독살한 죄, 휘어튼가에 누명을 씌워 자신의 죄를 덮으려한 책임을 물어 제 아비를 벌해주시옵소서.”
“…….”
“그리고…… 저 또한 아비의 죄를 덮은 책임을 함께 물어주십시오. 그래야 헬리온이 황태자 자리에 오를 때 어지러운 잡음이 없을 것입니다.”
늦었지만 자신도 시에라의 죽음을 외면한 벌을 받아야 했다. 황제가 어떤 벌을 내리더라도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설령 아버지가 평생 감옥에서 살게 된다하더라도 변호하지 않을 거였다.
“일리드…….”
황제가 천천히 조카의 이름을 불렀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얼마 전, 황제는 에보니가 은밀히 전한 편지를 받았다. 볼테로와 휘어튼가의 비밀이 적힌 편지였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지만, 사실 황족이 얼마 남지 않은 제국에서 이 일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눈감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헬리온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선 이 사건을 빌미로 볼테로와 일리드를 끌어내려야 했다. 제 형제를 누구보다 아끼는 황제였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을 우선시 할 때가 아니었다.
황제 역시 일리드가 자신처럼 섬세하고 유약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 진작에 눈치챘다.
억지로 제국을 짊어지게 하여 조카를 중압감 속에 살게 하고 싶진 않았다. 일리드가 원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예, 후회하지 않습니다.”
일리드가 망설임 하나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부디 결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제국을 위해서도,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도 헬리온이 폐하의 뒤를 잇게 해주십시오.”
일리드의 의지는 확고했다. 황제 역시 이를 느낄 수 있었다.
“종이와 펜을…… 가져 오거라…….”
황제가 일리드에게 명했다. 근래 들어 황제도 마음을 정했던 일이었다.
그간 남부의 반발을 대비하고자 미루고 있었지만, 오늘 일리드가 스스로 물러난 덕분에 확실히 결정할 수 있었다.
테브론 제국의 다음 주인은 헬리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