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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127화 (127/160)

127화 : 친구

빈집털이를 하는 도둑이라니. 아무리 블라딘 가문이라도 다른 귀족들을 상대로 해선 안 되는 모욕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페리아 영애와 다른 레이디들은 얼굴이 새빨개지기만 할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황제 폐하 역시 에보니를 말리지도 않으셨다.

“그대들도 록펠트 공작 부인께서 계속 부르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온 거죠? 그렇죠? 미치지 않고서야 리젠트라 공녀가 출궁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황태자비를 세워요.”

누가 들어도 ‘너희들 미쳤니?’라고 대놓고 조롱하는 꼴이었다.

역시 에보니 블라딘이었다. 정적이었을 때는 그녀의 능글맞은 성격과 직설적인 화법이 몹시 껄끄러웠지만, 이제 내 편이 되니 이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었다.

“영애들, 대답 좀 해 보세요. 혹시 그대들의 아버지가 그대들에게 황태자비가 되라고 헛바람을 넣던가요?”

레이디들이 우물쭈물하자 에보니가 신이 나서 그들을 몰아붙였다.

“아무튼 절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세요. 폐하께서 아직 황태자비를 뽑겠다고 하시지도 않았잖아요. 그런 자리를 함부로 탐내지 말라고요.”

“이봐요, 블라딘 공녀. 이제는 블라딘 공작도 아닌데 말씀이 너무 심하시군요.”

제가 불러온 사람들이 모욕을 당하자 카리나가 눈을 부릅떴다.

“당신이 뭔데 내가 하는 일에 끼어들어요?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내가 엄연히 알아서 폐하께 추천드릴 예정이었어요. 나라고 아무 생각 없이 독단적으로 황태자비를 세우려는 줄 알아요?”

“에이,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황태자비를 세우려는 게 아니라 세우지 못한다고 해야 맞는 말이죠. 황후 폐하도 아니신데. 그런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하니까요.”

에보니가 여전히 휠체어에 삐딱하게 몸을 기댄 채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끈한 카리나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폐하께서 한참 만에 입을 떼셨다.

“그만…….”

폐하께서 탁해진 푸른 눈동자로 레이디들을 보셨다.

“그대들은 그만 돌아가라…… 그리고…… 따로 명이 있기 전까지…… 황궁에 오지 마라…….”

명백한 황궁 출입 금지 명령이었다. 더 이상 카리나와 어울리지 말라는 의중을 포함하신 걸 수도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폐하.”

황제께 인사드린 후, 영애들은 앞 다투어 황궁을 빠져나갔다. 황궁에 오지 말라는 명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다들 넋이 나간 얼굴들이었다.

눈치를 보던 텔론 백작 부인도 이때다 싶었는지 그들의 뒤를 따라 나갔다.

“카리나…….”

주변이 조용해지자 폐하께서 카리나를 부르셨다.

“황후의 추모식을…… 왜 신경쓰지 않느냐…….”

힘없는 폐하의 목소리엔 깊은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

카리나가 잠시 폐하에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꼭 감고 숨을 골랐다. 그러더니 이내 순순히 미소를 지으며 휠체어 앞에 다가가 무릎을 접어 앉았다.

“폐하, 오해이십니다. 제가 금방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조수인 텔론 백작 부인이 혼자 조바심을 내서 벌인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카리나가 반짝이는 보석과 팔찌로 치장한 손으로 폐하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폐하께선 카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 잡힌 손을 빼내셨다. 그리고는 내게로 고개를 돌리셨다.

“이슈텔…….”

“예, 폐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름이 불리자 괜히 긴장이 됐다. 무슨 말씀을 하실까 걱정하는 찰나, 폐하께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수고했다……. 이제는…… 네 일도 아닌데…….”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카리나가 거짓말을 했음에도 폐하께선 침묵하고 있던 나를 믿어주신 것이다.

가만히 있던 에보니가 소리 없이 피식 웃더니 휠체어 방향을 카리나에게서 내 쪽으로 틀었다. 폐하께서 내 눈을 보며 말씀하셨다.

“황후에 기일에…… 너도 꼭 오거라…….”

카리나와 내가 부딪치는 상황이 오면 폐하께선 늘 그녀의 편을 들어주셨는데. 이렇게 카리나와 에보니가 같이 있는 데서 나를 혼내지 않으신 것만으로도 솔직히 놀랐다.

“알겠습니다, 폐하.”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고 짧게 대답했다. 옆에서 나를 노려보는 카리나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 * *

“답답해, 정말. 왜 거기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요?”

마차를 타고 공작 저로 돌아가는 길. 맞은편에 앉은 에보니가 창틀에 팔을 기댄 채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뭐 자선 사업하러 왔어요? 차라리 ‘그건 내가 했소’ 말이나 하면 티라도 나지. 일은 일대로 하고 공은 카리나가 채 가잖아요.”

“상관없어요. 황후 폐하의 추모식만 제대로 진행되면.”

“아이고, 이 사람아. 가만 보면 당신, 정말 속도 없는 바보 같은 거 알아요? 하긴,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나랑 아무 일도 없단 듯이 지내고 있는 거겠지.”

나와의 거래 이후, 에보니는 미련 없이 블라딘 공작 자리를 내려놓았다.

늙은 블라딘 백작 부인과 그 자식들은 에보니를 죽여 후환을 없애고자 했지만, 에보니는 내가 준 차용증으로 그들을 협박했다.

릴체 후작가에 빌린 어마어마한 양의 빚이 세상에 알려졌다간 가문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들은 에보니가 제 발로 가문을 떠나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순조로웠다. 릴체 후작 저 근처에 작은 저택을 얻은 그녀는 율리언의 비호 아래 은밀히 나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에보니와 카리나는 이미 오래전 사이가 틀어져서 지금처럼 비꼬듯 행동해도 상관없었지만 남부와는 아니었다.

에보니는 여전히 볼테로의 신임을 받으며 그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중 첩자인 셈이었다.

근래 들어 자주 황궁에 드나드는 것도 남들의 눈을 피해 북부의 서신을 황제께 전하기 위함이었다.

“근데 말이에요, 이슈텔.”

에보니의 부름에 내가 대답 없이 고개만 돌려 그녀를 보았다.

“나중에 모든 것이 당신 뜻대로 되면. 그러니까 헬리온 대공이 황제가 되고 당신이 황후가 되면 그 사람을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카리나 말인가요?”

“네. 나야 뭐, 어차피 이렇게 한 배를 탄 몸이 됐으니 목숨은 살려줄 거잖아요. 아닌가?”

“죽여 달라 그래도 살릴 거예요. 내가 한 약속에 책임을 질 거니까요.”

내 말에 에보니가 장난스럽게 킬킬거렸다.

“그래서 그 여자도 나처럼 살릴 거예요?”

“나는 신이 아닌데 어떻게 사람의 생사를 결정해요.”

“테브론 제국의 황후면 신은 못 돼도 바로 그다음 가는 자리 정도는 되잖아요.”

일부러 대답을 피한 건데 에보니는 집요하게 내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다시 마차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잘 모르겠어요. 오히려 카리나의 생각이 궁금하네요. 왜 내가 자신을 미워하길 바라는 걸까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게 사람이다. 그것이 좋은 감정이든 아니면 나쁜 감정이든.

나에 대한 카리나의 감정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날 향한 그녀의 미움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만 갔다.

“음, 나는 왜 그런지 알 것 같은데요?”

에보니가 혼자만 정답을 아는 어린아이처럼 우쭐댔다.

“당신을 미워하고 싶은데 그럴만한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슈텔 당신이 카리나를 미워하면 제 감정에 명분이 생길 텐데 당신은 그러질 않으니 더 화가 나는 거겠죠.”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멍하니 에보니를 쳐다보자 그녀가 제 생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쩌면 당신과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없으니 차라리 서로 끝장을 보자는 걸 수도 있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상대의 밑바닥을 보면 미워하기가 더 쉬워지는 거. 그러려고 당신을 일부러 더 자극하는 걸 수도 있고.”

“난 이제 그런 거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아요. 난 그저 카리나도 나도 더 이상 복잡한 일에 얽히지 않길 바랄뿐이에요.”

“글쎄요. 아마 카리나는 멈추지 않을 거예요. 저도 모르는 제 진심을 깨닫기 전까진.”

저도 모르는 진심……?

카리나에 대해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냥 흘려듣기엔 에보니의 목소리는 꽤나 확신에 차있었다.

“그녀의 진심이 뭔데요?”

“나도 하녀 출신이라서 그런가. 대충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알 것 같거든요. 그래서 카리나의 마음을 손쉽게 조종하기도 했던 거고.”

에보니가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쥐며 제 눈에 갖다 댔다. 내 얼굴을 망원경으로 쳐다보는 시늉을 하며 그녀가 능글맞게 웃었다.

“내가 카리나를 단두대에 세우지만 않았어도 좀 나았으려나? 그때 이후로 그 여자가 급격하게 미친 거 같아서 좀 미안하긴 하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장난스러웠으나 내 마음은 호수에 돌멩이가 던져진 것처럼 어지럽게 파문이 일었다.

“에보니, 당신은 나름 카리나와 가깝게 지냈잖아요. 그러니 대답해줘요. 대체 그녀가 내게 뭘 더 바라는지.”

“워워, 화내지 말아요. 예쁜 얼굴에 주름 생기면 안 되잖아요.”

에보니가 손을 내저으며 재빨리 대답했다.

“음, 아마도 카리나는 당신과 동등해지길 바랄 거예요.”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나마 동등해졌어요. 둘 다 같은 공작 부인이었죠. 그때도 카리나는 만족하지 못했어요.”

그 정도에서 멈췄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겠지. 적어도 내가 뭘 원하냐고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만 해줬어도 괜찮았을 거다.

“난 정말 모르겠어요. 그녀가 바라는 것이 대체 뭔지.”

한숨 가득 섞인 내 목소리에 에보니가 작게 혀를 끌끌 차더니 손을 들어 내 이마를 콕 찔렀다.

“이 답답한 사람. 한번 잘 고민해 봐요.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아니, 지금에 와서는 제일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구나.”

의뭉스럽게 중얼거린 에보니가 마부를 불러 마차를 세웠다.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린 후, 나를 향해 눈을 찡긋하고는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하…….”

나는 멀어져가는 에보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몸을 돌려 저 멀리 있는 황궁을 보았다.

‘지금에 와서는 제일 어려운 일…….’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에보니는 어렵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리 쉽지도 않은 말이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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