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 엇갈림
그의 푸른 시선이 내게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오늘따라 긴 머리카락을 묶고 온 것이 몹시도 후회됐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이라도 가려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황궁을 떠나기 전, 그에게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던 것이 떠올랐다. 다행히 시간이 지난 탓에 이제 그런 불같은 감정은 많이 사그라들었다.
대신 견디기 힘든 어색함과 적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는 여전히 그의 시선을 피했고, 그는 미동도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리드에게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했다. 공작 부인일 때는 이렇게까지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되었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일리드가 빨리 자리를 비켜주길 바랐다. 그를 따르는 하인들이 지나가야 황후전으로 갈 수 있었다.
“…….”
그러나 일리드는 걸음을 옮기지도, 그렇다고 내게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선 사람처럼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며 한참 동안이나 침묵했다.
그의 뒤에 선 테셀라 경과 하녀들이 말없이 눈알만 굴렸다. 나도 딱히 어찌할 바가 없어 가만히 있자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복도를 가득 메웠다.
이윽고 일리드가 시종과 하녀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테셀라 경과 하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대편 복도를 향해 갔다.
복도에 단둘이 남았건만, 침묵은 여전히 계속됐다. 최근에 그와 이렇게 함께 있었을 때는 늘 불편한 상황이 생겼다.
언성을 높이며 말싸움을 하거나, 그가 나를 거칠게 잡아 세워 아프게 했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렇다보니 나도 모르게 지금 이 상황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리드가 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를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 분위기를 읽었는지 일리드는 그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잘 지내……?”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치고는 무척이나 평범한 안부 인사였다. 내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네. 당신이 황궁을 떠난 건 전부 내 탓인데 기껏 한다는 말이 이거라니.”
“아니야. 나는 그래도…… 나름 잘 지내고 있어.”
대답하지 말까 하다가 겨우 입을 떼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그의 눈을 마주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황궁에는 어쩐 일이야? 헬리온을 보러 온 거야?”
헬리온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많이 차분해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일리드 역시 나만큼이나 감정을 가라앉힌 듯 했다.
“아니. 며칠 후에 있을 황후 폐하의 추모식 준비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온 거야.”
“당신이 왜 그걸 신경 써? 그건 록펠트 공작 부인이 할 일이잖아?”
“나도 잘 모르겠어. 그저 도움을 달라는 텔론 백작 부인의 편지를 받고 오는 길이라.”
“하, 당신도 참.”
일리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과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조금은 어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일시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그는 내가 알던 예전 모습처럼 차분하고 담담했다. 적어도 얼마 전처럼 나를 구속하려 들지는 않았다.
“당신은…… 어떻게 지내?”
딱히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건넨 질문은 아니었다. 잘 지낸다고 하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 테고, 못 지낸다고 하면 그것대로 찝찝할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한숨 소리와 함께 돌아온 일리드의 대답은 모호했다.
“그냥 살아있어. 아침엔 눈이 떠지니 일어나고, 밤엔 눈이 감기니 자고. 그냥 그렇게 살아.”
“그래. 다들 그렇게 살지…….”
나는 말끝을 흐리며 힘없이 대답했다. 가장 무난한 대답을 들었음에도 맘이 편치 않았다. 여전히 일리드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감정은 무기력함인 것 같았다.
“그렇게 계속 어색하게 있을 거야? 거리감 느껴지게.”
“……이제 예전처럼 가까운 사이는 아니니까.”
담담한 내 말투에 일리드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이어지는 어색한 정적 사이로 왠지 모를 씁쓸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이제 더는 그와 핏대를 올리며 싸울 일은 없지만, 이렇게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 서로를 마주하고 있으니 허망한 감정이 들었다.
이제 내 마음엔 헬리온이 굳게 자리 잡고 있기에 일리드가 돌아올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느껴지는 연민의 정까지 완전히 지워내기는 힘들었다.
“그럼 이만 가 볼게. 약속이 있어서.”
내가 일리드에게 인사한 후 황후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슈텔.”
일리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내가 고개만 돌려 쳐다보자 그가 엷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새장 근처 후원에 라일락이 예쁘게 폈더라. 시간나면 출궁하기 전에 보고 가.”
라일락? 이런 상황에 갑자기 꽃 이야기라니. 뜻밖의 이야기에 눈만 깜빡일 뿐,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당혹감을 누르며 일리드를 바라보았다. 다른 의도가 있나 싶어 그의 표정을 살폈으나 별다른 뜻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알았어. 생각나면 들르도록 할게.”
나는 다시 몸을 돌려 황후전을 향해갔다. 내가 멀어지는 동안 일리드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긴 복도를 걷는 내내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까.
* * *
“리젠트라 공녀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황후전에서 만난 텔론 백작 부인이 나를 보고는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인사했다. 그동안 에보니와 카리나의 편에 섰으니 이렇게 내게 도움을 구하기가 퍽 민망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품 안 가득 서류더미를 들고 와 내게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죽을상을 지으며 제발 일을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하…… 정말.”
첫 장부터 한숨이 나왔다. 정말로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황가를 상징하는 독수리 조각상 정도는 수리되었어야 하는데, 이마저도 일정 맞추기가 빠듯했다.
“펜이랑 빈 종이를 갖다 주세요.”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하나씩 해치우기 시작했다. 몇 년간 해오던 일이기도 했고, 집에서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온 덕에 속전속결로 해결할 수 있었다.
텔론 백작 부인은 내 곁에 앉아 깃펜을 잉크에 담가주는 등, 마치 하녀처럼 시중을 들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마지막 서류를 넘겨주자 부인이 한시름 덜었다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정말 공녀님이 아니었으면 이 일을 다 어떻게 처리했을지…….”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할 때면 편지하세요.”
이제는 내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황후 폐하와 황태자의 일까지 못 본 척 넘어가기는 힘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황족들의 기일은 내가 나서서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말에 백작 부인이 계속해 고마움을 표했다.
“공녀님, 이리로 오시지요. 제가 배웅해드리겠습니다.”
백작 부인이 나를 데리고 황후전을 나섰다. 앞장서서 걷는 그녀를 따라가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부인은 별로 멀지도 않은 거리를 굳이 돌아서 가고 있었다.
“왜 이리로 가나요?”
“아, 그냥 공녀님이랑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백작 부인이 과장되게 꾸며낸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해놓고선 복도를 걷는 내내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
“그쪽보다는 이쪽이 더 가깝습니다. 이 길로 가시지요.”
걸음을 멈춰서 내 예전 처소가 있던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백작 부인이 몹시 당황해 허둥댔다.
“하, 하지만. 이왕 이쪽으로 온 김에 그냥 이 길로 가심이……!”
‘역시 숨기는 게 있는 모양이군.’ 텔론 백작 부인의 호들갑스런 반응이 내게 확신을 주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내 처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처소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함부로 문을 열 수 없는 처지가 되어 가만히 문 앞에 서있었다.
웃음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문이 열리고 나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뚝 멈추었다.
“고, 공작 부인! 아니, 고, 공녀님!”
맨 앞에 서 있던 레이디 한 명이 나를 보고는 놀라 말을 더듬었다. 페리아 백작가의 둘째, 샤론 양이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나오던 젊은 레이디 두 명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들 역시 중앙 귀족가의 영애들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레이디들 뒤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가장 늦게 문을 나온 카리나가 고개를 돌리다 나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찡그렸다.
“리젠트라 공녀. 당신이 왜 황궁에 온 거죠?”
카리나는 거만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안에 담긴 당혹감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오랜만에 보는 카리나의 얼굴은 많이 상해있었다. 짙은 화장으로 여윈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를 오래 본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나도 없겠다, 그렇다고 황궁의 살림을 챙기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어둡네.’
나는 내 옆에 선 텔론 백작 부인을 보았다.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는 것이 몹시 불안해보였다.
내가 카리나와 레이디들을 보면 안 될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 내가 계속 쳐다보는데도 백작 부인은 필사적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무례하군요, 공녀. 윗사람이 하문을 했으면 답을 해야지 뭘 그렇게 멀뚱멀뚱 서있어요?”
나는 카리나의 신경질적인 눈매를 힐끗 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뒤에선 레이디들을 향해 말했다.
“황궁에 드나드는 것은 좋으나 당분간 웃고 떠드는 건 자제해주셨으면 좋겠군요. 황후 폐하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좋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셋이 내게 고개를 숙이며 재빨리 사과했다. 그 모습에 카리나의 표정이 불쾌해졌다.
“이봐요, 공녀. 내가 부른 사람들인데 당신이 뭔데 함부로 혼을 내고 가르치려 들어요?”
“그러니 공작 부인께도 말씀드리는 겁니다. 황후 폐하의 추모식을 준비해야 할 분이 해야 할 일은 내팽개치고 이렇게 노닥거리지는 말아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