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저주(2)
카리나의 말에 하녀들이 동시에 자신들의 잔을 보았다. 하지만 이미 모든 잔은 깨끗이 비워진 뒤였다.
‘분명 마실 때 이상한 맛은 안 났는데.’
조금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던 에시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차를 마실 때 입에서 하얀 연기가 나왔다. 분명 그것과 관련된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 신전에는 신기한 사람들이 많더라. 신성력뿐만 아니라 주술에 능한 이도 몇몇 있었고.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좀 구했지.”
“그래서 우리가 마신 차에 주술을 걸었단 말이에요?”
“그래. 맞아.”
에시의 물음에 카리나가 눈을 깜빡이며 죄책감 하나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발설하면 저주가 발현되지. 너희들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을 거야.”
그 말에 죽은 듯 침묵하고 있던 하녀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두 명은 너무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 에시를 제외한 다른 둘은 마신 차를 토해내려 듯 헛구역질을 했으나 소용없었다.
“거짓말. 그런 저주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그래,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어.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카리나는 얼마 전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불쾌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별로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니었으나 하녀들의 입을 막기 위해선 꼭 들려줘야할 이야기였다.
카리나는 얼마 전, 신전 신관들 중 말리파처럼 특이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소개 받았다. 특정한 조건을 걸어 저주가 발현되게 하는 능력이었다.
처음에는 카리나도 그런 저주가 있으리라 믿진 않았다. 하지만 몇몇 사형수를 데리고 실험을 하는 것을 보고 믿게 되었다.
“못 믿겠으면 직접 해 보던가. 말리지 않아.”
카리나의 말에 하녀들이 전부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하녀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협박하듯 말했다.
“리타와 소냐는 어린 자식이 있지? 엘리에겐 홀어머니가 있고. 에시, 너는…… 뭐, 말 안 해도 네 사정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카리나가 하녀들 중에서도 걸린 게 많은 이들을 고른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제 몸 하나만 간수하면 되는 이들은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지만, 짊어진 것들이 많은 자들은 함부로 배신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너희들은 원래 하던 일에서 제외시켜 주겠다. 황제전과 황후전은 내가 찾아볼 테니 너희들은 황궁의 다른 방들을 찾아보아라.”
그러나 하녀들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처한 상황이 당황스러우면서도 극도의 공포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입 단속만 잘하면 아무 문제없어! 그러니까 허튼 생각하지 말고 옥새나 찾아. 그러면 주술에서 풀려나게 해줄 테니까.”
하녀들의 우물쭈물한 태도에 카리나가 벌컥 짜증을 냈다. 대답 하나 쉽게 하지 못하고 징징거리는 꼴들이 꼭 언제라도 자신을 배신할 것처럼 느껴져서 신경질이 났다.
“더 물어볼 거 없으면 그만 나가. 황궁으로 돌아가서 옥새를 찾아 내 앞에 가지고 와!”
카리나의 불호령에 에시를 제외한 하녀들이 부리나케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카리나는 에시를 보며 따라 나가라고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나 에시는 슬픈 표정으로 카리나를 보았다.
“카리나, 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러는 너야말로 왜 이래? 감히 다른 하녀들 앞에서 나와 그 여자를 비교해? 이제는 나보다 작위도 낮고, 빈털터리 신세로 황궁에서 쫒겨난 그 여자랑?”
카리나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에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나마 옛정을 생각해서 봐준 줄 알아. 다른 것들이 그랬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비틀어 버렸을 거야.”
카리나의 금빛 눈이 살기로 번쩍이는 것을 본 에시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에시는 카리나의 말과 행동이 손톱만큼도 이해가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황궁에 오기 전부터 윈테라 공작 부인을 좋아하고 존경했다. 늘 그분 곁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하던 카리나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게다가 윈테라 공작 부인은 에시 자신은 물론, 카리나에게도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도 모자랄 판에, 그분 몰래 무슨 음모를 꾸미려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카리나, 이러지 마. 너도 공작 부인을 좋아했잖아. 왜 그렇게 그분과 척을 지려고 해?”
“또 내 앞에서 그 여자 편을 들어? 너도 그 여자와 가까이 지내더니 그 여자한테 홀리기라도 한 거야?”
이슈텔 이야기가 나오자 카리나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흥분했다.
“그렇게 그 여자가 좋으면 가서 내가 옥새를 찾게 시켰다고 말해봐. 그럼 너도 그 즉시 죽을 테니까. 너 하나 죽는다고 그런 귀족 여자가 눈물 한 방울 흘려줄 거 같아?”
카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에시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에시의 등을 떠밀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장 나가서 내가 시킨 일이나 해. 안 그러면 너라고 더 이상 봐주는 일 없어!”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세게 밀려난 에시가 몸을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어깨를 세게 부딪혀 아플 법도 한데 머리가 복잡한 탓에 아픈 줄도 몰랐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현실적인 에시는 주술 따위는 믿지 않았다. 카리나가 하녀들을 협박하기 위해 꾸며낸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이슈텔 님한테 말한다고 하면 카리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할 거야.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하녀들을 시켜서 계속 옥새를 찾을 거고.’
차라리 자신이 먼저 옥새를 찾아 카리나가 아닌, 이슈텔에게 옥새를 가져다주는 편이 현명할 터였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내가 먼저 옥새를 찾자.”
굳은 다짐을 한 에시가 신전을 나가 황궁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덜컹이며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나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태자비 자리를 내려놓은 이후, 처음으로 황궁에 가는 길이었다.
며칠 전, 공작 저로 텔론 백작 부인의 편지가 도착했다. 황후 폐하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자신이 추모식을 진행해본 적이 없어 도움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원래라면 카리나가 했어야 할 황궁의 살림이었다. 하지만 듣던 대로 카리나는 뭐에 정신이 팔렸는지 궁 안을 전혀 살피고 있지 않았다.
내가 황궁으로 갈 채비를 하자 새언니 실비아와 이모 투렌 남작 부인이 길길이 날뛰었다.
가서 신경 써서 일 해줘봤자 카리나만 좋은 일 시켜주는 꼴이라며 극구 반대했다. 황후 폐하의 시녀장이었던 이모마저 이번 기일은 모른 척하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마차가 황궁에 도착했으나 마중 나온 이는 하나 없었다.
하녀들과 하인들이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반갑게 인사했지만 끝내 가까이 오거나 소리 내어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카리나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게 틀림없었다.
“공작 부인!”
이제는 내 작위도 아닌 호칭인데 나도 모르게 뒤를 돌고 말았다. 저 멀리서 하녀장 애비게일이 손에 묻은 흙을 털며 내게로 다가왔다.
“여긴 왜 오셨어요? 그냥 모른 척 오지 마시지.”
황후의 추모식 준비가 진전되지 않으니 애비게일 역시 내가 온 이유를 단번에 알아챘을 것이다.
내가 황궁을 떠난 후, 애비게일도 하녀장에서 평하녀로 경질당했다. 카리나의 옷장을 관리하며 고생하다 최근에는 황궁 텃밭을 관리하는 한직으로 밀려났다고 들었다.
적지 않은 나이인데 한참 어린 하녀들과 같은 주급을 받으며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일하는 것이 안쓰러웠다.
“나는 괜찮네. 자네는…… 잘 지내냐는 말조차 미안해서 못하겠군.”
“공작 부인께서 미안해하실 일이 뭐가 있습니까.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하루 빨리 다시 이 황궁에 돌아오실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요.”
그녀의 말에 씁쓸하게 미소 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
황궁을 떠날 때만 해도 언제가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헬리온을 황태자로 만들고, 그의 반려가 되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그날도 그렇게 호기롭게 황궁을 떠났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천천히 상황을 되돌아보니 모든 것이 내가 바라던 대로 쉽게 해결될 것 같진 않았다.
에보니를 우리 편으로 만들었지만 아직 그녀가 제 몫을 다 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일리드와 카리나의 세력도 여전히 건재했다.
더욱이 헬리온이 황제가 된다 하더라도, 내가 황후 자리에 오를 수 있을 지도 미지수였다.
어쩌면 정말 헬리온의 말대로 내가 릴체 가문에 입적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내 처지가 몹시 처량하게 느껴졌다.
“자네 가족들은 걱정하지 말게. 공작가에서 부족하지 않게 도움을 주고 있으니 자네는 그저 잘 버텨주기만 하면 돼.”
거칠어진 애비게일의 손을 잡고 말하자 그녀가 걱정하지 말라며 일부러 괜찮은 얼굴을 해보였다.
애비게일과의 짧은 만남 후, 서둘러 본궁 안으로 들어왔다.
이 넓은 황궁을 하녀 하나 없이 걷는 게 조금 어색했다. 텔론 백작 부인이 카리나 몰래 부른 탓에 오히려 내가 눈치를 봐야할 판이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나를 발견한 하녀들이 숨을 죽인 채 눈으로 인사했다. 그렇게 어색한 순간들을 지나 약속 장소인 황후전을 향해 걸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렇게 넋을 놓고 걷다 흐린 시선 위로 익숙한 황가의 제복이 보였다. 고개를 들자 내 앞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스치듯 지나갔다.
‘일리드…….’
그가 날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일리드의 뒤로 그의 시종인 테셀라 경과 하녀들이 줄 지어 지나갔다. 홀로 덩그러니 서있던 나는 그의 일행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어, 고, 공작 부인!”
나를 지나치던 테셀라 경이 다시 뒤를 돌아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자 하녀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공작 부인’이라는 말에도 일리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내가 아닌 카리나와 마주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테셀라 경이 얼른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리젠트라 공녀님이십니다, 대공 전하.”
그 말에 그제야 일리드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