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 저주(1)
“에보니가…… 공작 자리를 내려 놓았다고……?”
아침 신문을 읽던 카리나가 제 눈을 의심하며 기사를 다시 읽었다.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기사에는 에보니 블라딘이 공작 위를 큰오빠에게 넘긴다는 기사가 적혀 있었다. 에보니는 이제 블라딘 공작이 아닌, 레이디 블라딘이 되었다.
표면상의 이유는 악화된 건강 문제였지만 실상은 다를 것이다.
신문 기사는 에보니가 리젠트라 공작가를 완전히 축출해내지 못해,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아니야. 고작 실수에 책임을 진다고 공작 자리를 내려놓을 인간이 아닌데…….”
카리나는 에보니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에보니는 책임과 의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만한 위인이 못된다. 실수를 했다면 더 큰 함정을 파려고 준비할 인간이지 작위를 내려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대로 끝난다고……? 이렇게 쉽게……?”
카리나가 주먹을 꽉 쥐자 신문 끝이 부스럭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에보니의 모친인 블라딘 백작 부인이 카리나를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나이 지긋한 백작 부인이 장자를 아껴 막내딸을 눈엣가시처럼 여긴다는 소문은 카리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가끔 그렇게 자식을 차별하는 부모들이 있었다. 이해는 안 가지만 그들은 제가 예뻐하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다른 자식을 기꺼이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족속들이었다.
백작 부인이 그런 부류의 인간인 것 같아 한 번 만나보려고 했건만, 저쪽에서 급하게 약속을 취소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
에보니가 스스로 공작 위에서 물러난 것은 기뻐할 일이나, 무슨 연유로 그리 된지 짐작이 가지 않아 찝찝했다.
“그래도 이젠 상관없는 일인가? 어차피 이슈텔 리젠트라도 황궁에서 쫓겨난 마당에.”
거슬리는 사람이 둘이나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진 건 분명 축하할 일이었다.
에보니 역시 공작에서 한낱 가문의 일원으로 밀려난 이상, 이제 공작 부인인 자신에게 대적할 만한 힘은 없는 것이다.
묘한 승리감에 젖은 카리나가 작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근처로 가자 쌔근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든 아이가 보였다.
루비아가 새로 선물 받은 곰 인형을 품에 안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루비아…….”
카리나가 조카를 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뺨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아이가 깰까 봐 감히 건드려 보지도 못했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사라지고 자신이 황궁의 안주인이 된 후, 가장 좋은 점은 바로 루비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전에는 이슈텔을 의식하여 루비아를 황궁으로 부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실란다 백작 저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실상 아이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모든 권력이 제 발 아래 무릎을 꿇게 되자 제일 먼저 찾게 된 이가 루비아였다. 이제 이슈텔도 없고 릴체 후작 부인도 죽었으니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실란다 백작 부인은 무척이나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 루비아와 만나게 해달라 편지를 쓰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이를 황궁으로 보내주었다.
이제는 귀족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된 카리나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함부로 아이를 만나지는 않았다. 귀족들이 황궁에 발걸음하지 않는 날을 골라 아이를 불러 함께 밥을 먹고 선물을 주는 등 만남을 이어갔다.
첫 인상이 썩 좋지 않았던지라 루비아는 카리나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카리나가 지극정성으로 아이와 놀아주고 온갖 선물 공세를 펼친 덕에 루비아의 마음도 조금씩 열렸다.
요새는 이렇게 와서 함께 황궁을 거닐기도 하고, 때때로 낮잠을 자고 가기도 했다.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었기에 카리나도 무척 기뻤다.
“예쁘네, 우리 루비아.”
카리나가 잠든 아이의 뺨에 흘러내린 갈색 머리카락을 귀에 걸어 주었다.
그녀와 그녀의 언니는 달빛처럼 아름다운 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과 다른 갈색 머리카락이 처음엔 어색했지만, 아이의 금빛 눈동자를 볼 때면 꼭 언니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록펠트 공작 부인.”
처소 문을 열고 하녀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카리나를 불렀다.
“말씀하신 하녀들을 전부 모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카리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소를 떠나기 전, 카리나는 잠든 조카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루비아와 함께 살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일이야.’
조카를 돌려받기 위해선 누구도 넘보지 못할 힘이 필요했다. 카리나는 그 힘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셈이었다.
* * *
신전의 맨 꼭대기 층.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작은 방에 하녀 다섯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왜 우리를 황궁이 아니라 신전으로 부르셨을까?”
“글쎄, 무슨 일이려나. 에시, 너는 뭐 아는 거 있어? 넌 록펠트 공작 부인과 친분이 있잖아.”
하녀들의 시선이 모두 에시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왔기는 에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글쎄요, 저도 잘…….”
이제는 리젠트라 공녀가 된 윈테라 공작 부인이 황궁을 떠난 이후, 카리나는 황궁의 살림을 거의 돌보지 않았다.
살림과 계획안 같은 복잡한 일은 전부 친분이 있는 귀부인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파티와 사냥 같은 즐거움에 몰두했다. 그랬기에 제아무리 친분이 있던 에시라도 카리나의 의중을 알아채기 힘들었다.
그때, 낡은 문이 열리며 방 안으로 카리나가 들어왔다. 잔뜩 긴장한 하녀들 틈을 헤치고 그녀가 의자에 앉았다.
“해야 할 이야기가 기니 우선 차부터 마시고 시작하지.”
카리나는 하녀들 앞에 놓인 빈 잔에 손수 뜨거운 차를 따라주었다.
“감사…… 합니다…….”
에시가 어색하게 인사하며 카리나에게서 차를 받았다.
왠지 모르게 찝찝한 느낌이 든 에시가 다른 하녀들을 곁눈질했다. 그녀와 달리 다른 하녀들은 아무 의심 없이 차를 마셨다.
어쩔 수 없이 에시도 카리나가 준 차를 마셨다. 새콤한 과일 향의 뒷맛을 남기는 게 무척이나 맛 좋은 차였다.
‘그런데 카리나가 갑자기 왜 이러지? 귀족들이랑 어울리느라 하녀들한테 신경 쓸 시간이 없을 텐데.’
빈 잔을 내려놓던 에시가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그 순간, 입술 사이로 하얀 연기가 새어 나왔다.
놀란 에시가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를 맴돌던 연기가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한겨울도 아니니 입김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체 뭐였을까 의아해하는 찰나, 모든 하녀들의 잔이 빈 것을 확인한 카리나가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부른 건, 너희들이 따로 해줘야 할 일이 있어서다.”
“해야 할 일이요?”
하녀 하나가 카리나의 말을 따라했다.
“그럼 황궁에서 하셔도 될 텐데 왜 굳이 신전까지……?”
“아무도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서 그렇지.”
카리나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들, 옥새를 찾아와라.”
순간 하녀 다섯 사이에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모두들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옥새를 찾으라니. 옥새란 황제가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며, 그 위치도 주기적으로 바뀌었다.
하물며 우연히 그 위치를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못 본 척 입을 다물어야만이 복잡한 일에 얽히지 않을 수 있다.
록펠트 공작 부인이 옥새를 찾아서 무엇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분명 옳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황제 폐하 몰래 찾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
하녀들은 직감적으로 자신들이 심각한 일에 엮였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황궁의 모든 권력을 쥔 록펠트 공작 부인 앞에서 하지 않겠다고 나서지도 못했다.
“우리가 왜요?”
그때, 가장 어린 에시가 침묵을 깼다.
“옥새는 황제 폐하께서 직접 관리하시는 물건인데, 우리 같은 하녀들이 어떻게 찾을 수 있어요? 게다가 그런 복잡한 일에 얽히고 싶지도 않고요.”
에시의 말에 다른 하녀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면 동의를 표했다. 그러자 카리나의 금빛 눈동자가 가장 끝자리에 앉아 있는 에시 쪽으로 돌아갔다.
“윗전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어디서 쓸데없는 토를 다는 거지? 대체 그런 버릇은 어디서 배운 건지. 이슈텔 리젠트라와 가까이 지내며 배운 게 고작 이런 건가?”
“그분한테 배워서 이 정도지, 록펠트 공작 부인한테 배웠으면 이 정도도 못 됐을 걸요?”
옆에 있던 하녀가 에시의 언행에 놀라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에시는 그 손길을 뿌리쳤다.
안 그래도 에시는 최근 들어 카리나에게 몹시 실망하던 차였다.
에시는 정치니 권력이니 하는 어려운 사정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카리나는 그녀의 오랜 친구였고, 이슈텔 님은 존경하는 윗사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에시에게 좋은 사람들이었고, 무슨 사정이든 둘의 사이가 좁혀질 수 없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슈텔 님이 궁을 떠난 이후 보인 카리나의 행보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살뜰하게 궁을 돌보던 카리나는 황궁의 일을 하나 둘 놓더니 이제는 완전히 나몰라라 했다.
처음에는 권력에 취해 귀족들과의 파티를 즐기나 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그녀는 옥새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에시는 걸린 가족이 많은 아이였다. 이런 위험한 일에 엮여서 혹시라도 처벌이라도 받게 된다면 가족들은 살고 있는 집을 떠나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에시뿐만 아니라 다른 하녀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갓 아이가 백일이 지난 하녀, 어린 동생들이 줄줄이 딸린 하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하녀. 어떻게 골라도 이렇게 어려운 처지의 하녀들만 골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으나, 옥새같이 중요한 것은 저희 같은 아랫것들의 손을 빌리지 말고 록펠트 공작 부인께서 혼자 찾으시길 바랍니다.”
강한 어조로 말한 에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앉아.”
카리나가 살벌한 목소리로 짧게 명령했다. 문으로 향하던 에시가 카리나를 돌아보았다. 처음보는 냉랭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에시를 보며 고개를 까딱했다.
“감히 내 앞에서 건방지게 굴지 말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싫어요.”
“싫어도 어쩔 수 없을걸? 네가 마신 차에 내가 뭘 좀 탔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