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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122화 (122/160)

122화 : 에보니와 블라딘(2)

내 말에 에보니가 대단한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양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녀의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한참이나 낄낄거리고 나서 어이없단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 말씀은 고맙고 마음은 갸륵하다만, 너무 그렇게 애쓰지 마요. 지금껏 내가 한 악랄한 짓을 다 말하면 당신은 당장 내 머리에 총을 겨누고 싶어질걸요?”

“말해 봐요. 총을 쏠지 안 쏠지는 내가 판단할 테니.”

담담한 내 말에 에보니의 보랏빛 눈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마치 내 신경을 건드리려고 작정을 한 듯 퉁명스럽게 읊조렸다.

“황제 폐하께 카리나를 공작 부인으로 만들고 황후 자리까지 올리라고 충동질한 게 나예요. 지금 카리나가 그렇게 황후 자리에 목을 매는 것도 다 나 때문이죠.”

“그건 이미 알고 있네요.”

“볼테로 황자의 야망을 폐하께 전한 것도 나죠. 폐하께서 일리드를 황태자로 낙점하신 것도 다 내가 힘쓴 덕이고요.”

“그 또한 잘 알고 있고요.”

“일리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혼인 무효가 아닌, 이혼 소송으로 하라고 말한 적도 있네요. 그 때문에 당신이 거의 평생을 살아온 황궁에서 쫒기듯 나온 거고.”

“궁을 나온 건 결국 내 선택이었어요. 그러니 신경 안 써요.”

“당신 새언니에게 누명을 씌워서 아이가 조산된 건 말 안 해도 잘 알 거고.”

“그래, 그랬죠. 확실히 그건 아직도 화가 나네요.”

“이런데도 나와 손을 잡겠다고?”

보랏빛 눈을 가늘게 뜬 에보니가 마치 나를 시험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손을 잡기는커녕 지금 당장 목을 비틀고 싶겠지. 당신은 이런 날 살려 둘 수 있어?”

“그보다 더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난 당신을 살릴 거예요.”

에보니의 시험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생각 없었다. 이 정도의 각오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승부수를 던지러 온 게 아니었으니까.

“아까도 말했다시피 블라딘 백작 부인, 당신의 법적 어머니가 나를 찾아왔어요. 당신을 끌어내리는 걸 도와주면 앞으로 블라딘은 리젠트라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들고요.”

“뭐, 놀랍지도 않군. 그 늙은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

“아마 내가 거절한다면 백작 부인은 카리나에게 가겠죠. 난 그런 상황은 되도록 만들고 싶지 않네요. 당신과 손을 잡고 내 편에 서게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나보고 이번엔 당신의 개가 되라……?”

“당신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죠. 자기 손을 더럽히는 걸 주저하지도 않고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욕이에요 칭찬이에요?”

“욕같이 들리겠지만 칭찬이에요.”

에보니가 황당한 듯 헛웃음을 짓더니 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는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날 받아들이겠다고?”

“못 할 것도 없잖아요.”

“하……”

에보니가 짜증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는 내 표정에서 숨겨진 진심을 읽으려는 듯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뚫어져라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나는 숨기는 게 없었다. 내가 시선을 피하지 않자 결국 에보니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이러는 거예요? 아니면 숨통을 끊어놓기 전에 괴롭히는 걸 좋아하나? 그것도 아니면 원래 이렇게 물러 터진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내 반응에 에보니가 검은 눈썹을 한껏 찡그렸다. 내가 그녀를 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당신을 괴롭히려는 것도, 뒤통수를 치려는 것도 아니에요.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뿐이에요.”

나는 블라딘 가문의 차용증을 다시 그녀 앞으로 밀었다.

“우리 사이의 수많은 악연들, 이제는 끊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끊지 않으면 우리의 아이들이 이어서 고통 받을 거예요. 루비아가 그런 것처럼요. 그리고 당신과 카리나도…… 결국 이 긴 싸움의 희생자잖아요.”

“……이봐요, 이슈텔. 난 동정 받는 덴 별로 안 익숙해서. 그렇게 착하고 바른 말을 할수록 왜 이러나 의심만 간다고.”

에보니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그러니까 이제 장난 그만 쳐. 무슨 생각으로 자꾸 이러는진 모르겠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에보니. 블라딘 공작이 되었어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죠?”

나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자세로 말했다. 책상 앞에 반쯤 엎드린 에보니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궁시렁거렸다.

“이제 블라딘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를 위해서 살아요. 그렇게 하면 나도 당신의 과거를 묻어줄게요.”

“이 아가씨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계속 이대로 간다면 당신은 결국 남들 손에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할 거예요.”

“그니까 그걸 왜 댁이 신경쓰냐고.”

“당신 어머니에 대해 알아봤어요.”

에보니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 처음에는 율리언이 그녀의 약점을 캐내기 위해 조사한 것이었다.

“당신 어머니, 당신이 감금령에서 풀려나 저택을 떠나고 얼마 뒤에 사망했다면서요? 블라딘 백작 부인의 괴롭힘이 심하긴 했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결국 자살이었고.”

“이봐요, 지금 갑자기 무슨 말을-”

“당신 어머니가 자신의 신분이 딸에게 해가 될까 봐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거. 우리 쪽도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친모의 이야기가 나오자 에보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불쾌하면서도 내가 자신의 친모 이야기를 하는 게 당황스러운지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약점이 있다. 부끄러워서 감추고 싶은 치부이든, 떠올리기 싫어서 묻어둔 기억이든 간에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늘 여유로워 보이는 에보니였지만 그녀에게도 그런 약한 구석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 그녀의 친모는, 자신이 지키지 못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에보니의 얼굴에서 늘 보이던 가벼운 미소조차 지운 듯 사라졌다. 그녀는 나를 피해 시선을 아래로 떨구더니 손까지 다급히 책상 밑으로 숨겼다.

손은 숨겼어도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까진 어찌할 바가 없었다. 애써 평소처럼 행동하려 해도 에보니가 몹시 긴장하고 있단 것이 느껴졌다.

‘어린 시절에 늘 저런 모습이었을까.’

그 모습에서 문득 나도 모르는 에보니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늘 위축되고 긴장한 어린아이. 본부인과 이복형제들 사이에서 눈치 보고 구박받는 아이.

그렇지만 발톱을 숨기고 숨죽여 때를 기다리던 그녀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에보니, 당신은 릴체 후작 부인을 존경한다고 했죠? 블라딘을 망가뜨리고 새로운 가문을 세워서 분가한 우리 할머니를요.”

“…그래요. 당신 할머니만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다간 사람이 또 없지.”

그제야 고개를 든 에보니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이야기를 꺼냈다.

“에보니, 당신을 우리 할머니처럼 될 수 있게 해줄게요. 블라딘 가문에서 나와요. 그리고 당신이 새로운 가문의 주인이 돼요. 헬리온이 황제가 되면 그렇게 할 수 있게 도와줄게요. 블라딘이 아닌, 당신 어머니의 성으로 살 수 있게.”

“…….”

에보니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짐짓 무감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 어머니의 이름이 뭐죠?”

“……아샤. 아샤 칼렛.”

“그럼 당신은 칼렛 후작이 되겠네요.”

“하…….”

크게 헛웃음 소리를 낸 에보니가 마른 가지처럼 앙상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눈가를 가린 채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에보니가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늘 보이던 의뭉스런 미소가 사라진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 당신은 참…… 사람 다룰 줄을 아네요.”

그녀가 왼쪽 눈가의 흉터 위로 흐른 눈물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그 여자’한테 유독 그렇게 약한 것도 결국 같은 이유에서인가? 선대의 악연을 끊어내기 위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에보니가 말하는 ‘그 여자’가 카리나라는 것은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에 대해서 생각하려면 몇 날 며칠 밤을 꼬박 샐 수 있지만, 지금은 우선 그 생각을 접어두었다.

나는 눈앞에 있는 에보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좋은 친구가 되긴 어렵겠죠. 하지만 적어도 괜찮은 파트너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지금 당장 대답해 달라는 건 아니에요. 마음이 바뀌면 율리언을 통해서 연락줘요.”

에보니는 시선을 숙인 채 입술을 떨었다. 검은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대답을 하지 않을 것 같기에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자를 챙기고 걸음을 옮겨 문고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탁-

여윈 손이 내 손목을 세게 잡았다.

“난 자존심 같은 거 없어요. 체면 같은 것도 모르고.”

에보니가 보랏빛 눈동자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날 잡은 손에서 그녀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어차피 내게 남은 선택지도 없으니 더 생각할 것도 없죠.”

“…….”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죠?”

“당신답네요, 좋아요.”

내가 그녀의 여윈 손목을 잡고 창가 쪽으로 이끌었다.

창밖 너머로 저 멀리 커다란 황궁이 보였다. 나는 황궁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키며 에보니에게 속삭였다.

“북부의 서신. 카리나가 숨기고 있는 그 서찰을 황제 폐하께 전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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