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 새로운 일상
황궁에서 나온 후, 지난 십여 년간의 삶과 전혀 다른 나날들이 흘러갔다.
우선 공작 부인 작위를 내려놓자 그에 따라오던 막중한 업무와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늘 하던 일이 사라진 것에 대한 허전함은 있었지만 그만큼 여유가 생긴 건 좋았다.
“마티나, 고모 친구들 왔어. 인사해야지.”
품에 안은 아기가 로제와 슈리를 보고 방긋방긋 웃었다. 여자 조카는 처음인지라 예쁘고 사랑스러운 마티나를 보며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와, 너무 작고 귀여워요.”
마티나를 처음 본 슈리가 아기의 볼을 손가락 끝으로 콕 찔러보았다. 순한 아기는 슈리의 손이 닿자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아기를 볼 여유도 있고 좋네요, 공작 부인. 아니, 공녀님.”
아직까지 바뀐 호칭이 익숙하지 않은 로제가 실수한 제 입을 부채 끝으로 톡 쳤다.
“요새 내가 마티나만 본다고 로시엔이랑 엔리케가 질투를 많이 하더라. 그래도 다들 동생이 예쁜가봐.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
아기란 참 고마운 존재였다. 내가 황궁을 떠난 이후 슬퍼하던 몰리도 마티나의 유모가 된 후로는 우는 날이 줄어들었다. 자르와 실비아도 아기 덕분에 그나마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재판은 취소 됐지만 오빠와 새언니는 그날의 정신적 충격 때문에 공작 저 밖으로 쉽게 출입하지 않았다. 나도 함부로 외출하는 걸 자제하고 있어서 대신 친구들이 이렇게 공작 저로 놀러오곤 했다.
“그런데 이모는 왜 안 오셨어? 같이 오기로 한 거 아니야?”
한참을 기다려도 투렌 남작 부인이 오지 않았다. 원래 함께 오기로 해놓고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러게요, 록펠트 공작 부인이 붙잡고 안 보내주나 본데요.”
로제가 팔짱을 낀 채 ‘록펠트 공작 부인’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슈리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안 그래도 투렌 남작 부인께서 그 공작 부인의 파티에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으신 것 같더라고요.”
“맞아. 오늘도 눈치 보다가 빠져나온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못 오시는 걸 보면 분명 그 여자한테 붙들려 있는 게 뻔해요.”
틈만 나면 공작 저에 놀러오는 두 친구와 달리, 투렌 남작 부인은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적었다.
황궁의 주인이 된 이후로 카리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살롱에서 파티를 벌인다고 들었다.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던 투렌 남작 부인은 카리나의 주요 손님이 되었다. 남작 부인이 참석하는 파티와 아닌 파티는 그 급의 차이가 다르게 취급됐기 때문이다.
록펠트 공작 부인의 살롱 파티 초대권은 수도뿐 아니라 지방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윈테라 공작 부인의 권리와 권한까지 이어받은 록펠트 공작 부인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궁 밖까지 줄을 설 정도였다.
남들은 못 가서 안달인 파티였지만 투렌 남작 부인은 아니었다. 조카를 몰아낸 이의 파티에 가서 유명 인사가 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카리나가 투렌 남작의 사업을 걸고넘어지는 바람에 가지 않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 망할 여자가 저는 아예 황궁 출입을 금지시켰어요! 제 일을 한참 어린 후배한테 시키고 있다고요. 아주 저한테 모욕을 주려고 작정한 모양이에요.”
로제가 테이블 위에 놓인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결과만 놓고 보면 로제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내 탓이었다. 아기만 없으면 술이라도 따라 주며 위로해줬을 텐데.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참, 공녀님 그 소식 들으셨어요? 실란다 백작가 이야기요.”
슈리가 내 얼굴을 살피며 조심히 말을 꺼냈다.
“요새 공작 저 밖에 자주 안 나가시니 모르실 것 같은데, 그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아니, 따로 들은 바는 없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슈리와 로제가 서로 얼굴을 마주본 채 눈치를 살폈다. 잠시 후, 슈리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록펠트 공작 부인이 루비아 실란다를 황궁으로 자꾸 불러들인다고 합니다.”
“루비아? 그 애를?”
“네. 처음엔 실란다 백작 부인이 거절했지만 이제는 황궁에서 사람을 보내 아이만 데려간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로제가 신랄하게 소리쳤다.
“이제 눈치 볼 거 없다 이거죠. 자기가 그럴수록 피해 보는 게 루비아라는 걸 알아야 할 텐데.”
“라비 오빠가 뒷조사를 해봤다는데 요새 록펠트 공작 부인이 법원에도 자주 드나든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아이를 자기 밑으로 들이려는 게 아닌가 싶어요.”
걱정 가득한 슈리와 달리 로제는 여전히 불만에 찬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웃겨 정말. 아주 애 인생 망치려고 작정을 했어, 작정을.”
로제의 분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막상 듣고 있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품 안에 안은 마티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곤히 잠든 아기는 어른들의 이야기 소리는 들리지 않는지 작은 몸을 움직이며 쌔근거렸다.
만일 이 세상에 나와 마티나만 남았다면. 하지만 지척에 두고도 아이를 만나지 못한다면, 나 역시 카리나처럼 어떻게든 아이를 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선뜻 카리나의 행동을 비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선 어떠시니? 혹시 들은 바 있어?”
유쾌하지 않은 주제에서 우울한 주제로 말을 옮겼다. 차라리 폐하의 안부를 걱정을 하는 게 카리나와 루비아를 떠올리는 거보다 나을 지경이었다.
“글쎄요. 전 황궁 출입 금지라……. 슈리, 넌 뭐 들은 바 없어?”
“나도 요샌 황궁에 잘 안 가서. 헬리온 말로는 여전히 건강이 안 좋으신 거 같던데.”
“안 봐도 뻔하지. 록펠트 공작 부인께서 그렇게 밖으로만 놀러 다니시니 폐하께서 쾌차하실 리가 있나.”
로제가 그럴 줄 알았다며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공녀님. 공녀님은 폐하가 밉지도 않으세요? 어떻게 이렇게 출궁하고 나서도 챙기실 수가 있죠?”
“야, 말이 너무 심하잖아.”
슈리가 굳은 얼굴로 로제를 째려보았다. 충성스런 군인 집안 출신인 슈리가 보기엔 로제의 언행은 불충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수도 귀족인 로제에겐 못 할 말도 아니었다.
“왜! 우리끼리 있는데 이런 이야기도 못 하냐? 너도 입장 바꿔서 생각해봐. 네가 공녀님 입장이면 폐하가 밉겠냐 안 밉겠냐? 옆에서 지켜만 봐도 이렇게 속이 터지는데.”
“그건 그렇긴 하지만…….”
“아니, 공녀님이 그동안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대신 황궁에서 혼자 얼마나 고군분투하셨는데! 피 안 섞인 사람이랑, 그것도 지체 높으신 황제 폐하랑 같이 지내는 거 쉬운 일 아니잖아요. 수년간 일은 일대로 하고 눈치는 눈치대로 보면서 살았는데 그 말로가 결국 이거냐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로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말 해도 너무 하시지. 아무리 곁에서 오래 모셔봤자 소용없다니까. 며느리는 자식도 아니다 이거지. 와, 그런 시아버지 만날까 봐 무서워서 결혼 못 하겠어.”
로제는 그제야 속이 편한지 한결 후련한 표정이 되었다. 내 입으로는 차마 못할 말을 친구가 대신 해주는 것 같아 잠깐이나마 내 속도 후련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왠지 모를 씁쓸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이제는 예전만큼 자주 만날 수도 없건만, 여전히 폐하와의 관계는 풀리지 않는 숙제만큼 어려웠다.
“공녀님, 헬리온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하녀의 알림에 멍해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하녀에게 마티나를 맡긴 후 공작 저 정문으로 향했다.
* * *
“헬리온!”
정문 안쪽에서 서성이고 있는 헬리온이 보였다.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자 헬리온의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보고 싶었어, 이슈텔.”
헬리온이 내 어깨에 팔을 감아 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오랜만에 보는 헬리온이 오늘따라 더 멋있게 보였다.
“이게 얼마 만이야, 보름 만인가? 그동안 많이 바빴어, 헬리온?”
“응, 자꾸 일이 쌓이네. 앞으로 자주 올게.”
“아니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만 와. 너무 자주 황궁을 비우면 입지 다지기가 어려워.”
“하지만 보고 싶은 걸 어떡해. 네가 황궁에 안 오니까 내가 와야 하잖아.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당연히 보고 싶었지.”
그 말에 금세 헤벌쭉해진 헬리온이 나를 더 꼭 끌어안았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그는 나를 볼 때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했다. 처음엔 남들이 볼세라 부끄럽기도 했지만 익숙해지다 보니 나도 점점 더 헬리온에 대한 마음이 커졌다.
“오늘도 같이 걸을까?”
“응, 좋아.”
헬리온이 내민 손을 잡고 공작 저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라비 한 명만 데리고 사람들이 많은 시장으로 갔다. 매번 만날 때마다 공작 저나 북부 사저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지루해진 감이 있었다. 게다가 헬리온은 대부분의 시간을 황궁 안에서만 보내니 이럴 때라도 바깥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다.
“이슈텔, 우리 저거 먹자!”
예상대로 시장에 나온 헬리온은 무척이나 들떴다. 그는 나를 이끌고는 꼬치가 가득한 노점앞으로 갔다. 헬리온은 닭꼬치를 사서 내게 건네고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슈텔,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네가 이름을 바꿔야 할 거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닭꼬치를 먹다말고 뜬금없는 개명 권유라니. 뭔가 싶어 헬리온을 쳐다보니 그가 자못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 결혼 말이야. 법을 바꾸는 게 가장 좋긴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차라리 편법을 쓰자.”
“무슨 편법을?”
“황가와 파혼한 사람은 다시는 황족과 혼인하지 못하잖아. 하지만 이름을 바꾸고 다른 집안에 양녀로 가면 서류상으로는 다른 사람이니까 혼인이 가능한 거 아냐? 어차피 이름이라는 게 서류상의 호칭일 뿐이잖아.”
“음, 그래서?”
“그러니까 네가 릴체 가문으로 들어가는 거야. 율리언의 동생이 되는 거지. 이슈텔 릴체, 어때? 꽤 어울리잖아. 그러면 너는 릴체 가문의 사람이 되고, 서류상으로 한 번도 황족과 파혼한 적 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
헬리온의 엉뚱한 발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농담을 하는 줄 알았는데 헬리온은 왜 웃는지 모르겠단 듯 의아한 얼굴이었다.
“왜 웃어? 나 지금 진지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