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내 것과 아닌 것(3)
소녀의 손에 잡힌 일리드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개졌다. 티 없이 맑은 은빛 눈동자가 한 점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일리드는 입술을 달싹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리드는 소녀가 누구여도 상관없었다. 실비아 실란다가 아니어도, 귀족이 아니어도, 그 누가 되었든 정말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 애가 자신이 누군지 아는 건…… 그건 너무나도 싫었다.
황족이란 이유로 사람들이 보이는 아부와 위선적인 행동이 싫었다. 자신이 바라는 건, 지금처럼 이 소녀와 허물없이 지내는 것 하나뿐이었다.
이 소녀에겐 어떨지 몰라도 일리드에게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사귀어본 친구였다. 프리모스를 대할 때처럼 그늘진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고, 헬리온을 볼 때처럼 아버지의 경고를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나… 나는…….”
언제까지고 자신이 누군지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황족임을 알아도 이 애는 자신을 지금처럼 대해줄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결국 일리드는 자신을 잡은 소녀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듯 도서관을 달려 나왔다.
* * *
“다시 아카데미로 가볼까…….”
다음 날, 평소와 달리 일리드는 아카데미 대신 황궁 정원을 걸었다. 아직 그 애를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가지 않으면 더는 그 애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 애는 훔친 출입증을 가지고 아카데미를 드나들었다고 했다. 방학이 끝나면 못 온다고 했으니 지금이라도 가서 이름을 물어봐야 했다.
“그래. 우선은 그 애를 만나야해. 그다음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심한 일리드가 걸음을 멈추었다. 몸을 돌려서 황궁 정원을 나가려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프리모스가 반갑게 웃으며 그를 향해 달려왔다.
“일리드 형, 이 시간에 정원엔 무슨 일이야? 아카데미 갈 시간 아니야?”
“아, 황태자 전하. 그냥 고민이 좀 있어서 걷고 있었습니다.”
일리드가 공손히 인사하자 프리모스가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마침 잘됐네. 지금 새장에 이슈텔이 왔다고 해서 가는 길인데. 나랑 같이 가자.”
“아, 리젠트라 공녀요?”
안 그래도 언제 한 번 만나려고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은 누굴 만날 기분이 아니었다.
머릿속을 가득채운 실비아, 아니, 이젠 누구라고 불러야할지도 모를 그 소녀 생각만 계속 떠올랐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도 적극적인 프리모스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새장으로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새장에 가까워질수록 어린아이의 투정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들어도 헬리온의 칭얼거림인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어, 또 헬리온이 이슈텔을 괴롭히나 보다!”
프리모스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새장 가까이로 갈수록 헬리온의 새빨간 머리카락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직 자그마한 헬리온은 저보다 머리 하나는 거뜬히 큰 여자 아이의 주위를 빙빙 돌며 정신을 쏙 빼 놓고 있었다. 그 앞에선 금발의 소녀는 헬리온의 방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새들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실비아랑 비슷하네.’
긴 금발과 여린 체구의 뒷모습이 왠지 그 애를 떠올리게 했다. 일리드는 리젠트라 공녀와 인사만 나누고 가야지 생각하며 새장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헬리온이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팔꿈치로 공녀의 손에 든 커다란 모이통을 치는 바람에 모이가 전부 바닥에 쏟아지고 말았다.
신이 난 비둘기들이 공녀 주변으로 날아왔고 공녀는 눈 깜빡할 사이에 하얀 비둘기들 사이에 파묻혔다.
“야아아, 헬리온! 내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잔뜩 화가 난 공녀가 하얀 깃털을 헤치며 헬리온을 잡으러 새장을 가로질렀다. 겁먹은 헬리온은 열심히 도망쳤지만 몇 걸음 못 가 공녀에게 잡혀 볼을 꼬집혔다.
“아,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아니, 그러니까 저런 애긴 한데 더 좋은 모습도 많은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리모스가 부끄러워하며 재빨리 일리드에게 해명했다.
“이슈텔은 좋은 애야. 형도 알겠지만 헬리온이 짓궂잖아. 헬리온이 유독 이슈텔을 좋아해서 그런지 저렇게 따라다니면서 장난을 치네.”
그러나 일리드의 귓가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헬리온과 뒤엉켜 싸우는 금발의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실비아……?”
“응? 누굴 보고 이야기 하는 거야?”
프리모스가 일리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잔뜩 화가 난 이슈텔이 헬리온의 반대편 뺨을 꼬집고 있었다.
“저 소녀, 실비아 실란다 아닌가요?”
“무슨 소리야, 실비아 실란다라니. 실란다 영애는 쟤보다 한참 언니인데.”
“그럼 저분이……?”
일리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부정했지만 돌아오는 프리모스의 대답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응, 맞아. 이슈텔 리젠트라. 내 약혼녀.”
온몸에 힘이 탁 풀리고 말았다. 믿었던 세상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일리드가 세게 주먹을 쥐었다. 눈가가 뜨거워지며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그때, 프리모스가 새장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이슈텔을 불렀다. 이슈텔과 헬리온의 시선이 동시에 이쪽을 향해 돌아갔다. 익숙한 은빛 시선과 마주하려는 찰나, 일리드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형? 어디가, 형!”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프리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일리드는 돌아보지 않고 황궁 정원을 뛰쳐나갔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과 함께 슬픔이 밀려왔다.
‘왜 그 애가 이슈텔이야? 왜 하필 리젠트라 공녀인 거냐고!’
걸음을 멈춰서고 나서야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후회가 됐다. 차라리 처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말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나는 황족이라고, 일리드 테브로니아라고 말했으면 이슈텔도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 애는 늘 자신을 만나고 싶어 했으니까.
처음부터 서로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애는 프리모스의 짝이니까, 자신은 프리모스의 것을 욕심내지 않으니까.
애초에 그 애를 마음에 품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커지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처량한 처지가 한심해진 일리드가 손등으로 입을 막고 숨죽여 흐느꼈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멀어진 황궁 정원이 보였다. 지금쯤 그 애는 프리모스와 함께 있겠지. 그 어린 헬리온도 그 애 곁에 있을 수 있는데, 왜 자신은 안 되는 걸까. 일리드는 다시금 밀려오는 눈물을 겨우 참아냈다.
‘내가… 내가 황태자였으면…….’
결국 그 생각의 끝이 여기였다. 애써 묻어 두었던 자신의 어두운 감정과 마주한 일리드가 생각을 떨치려 머리를 세게 저었다.
‘내일 이슈텔이랑 프리모스한테 가서 사실대로 말하자. 그러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 애와 솔직히 이야기 나누면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애는 황태자의 약혼녀, 자신은 황태자의 사촌. 그렇게 정리된 관계로 지내다보면 지난 여름처럼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품은 이 감정도 별 게 아닐 수 있다. 그래야 했다.
일리드는 스스로를 달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좋아하는 책도 읽지 않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날 밤, 아버지는 황궁을 떠나 남부 대공령으로 가야한다는 소식을 들고 왔다.
* * *
“일리드 형. 정말 남부로 가는 거야?”
“네, 폐하께 대공령을 하사 받았으니 그래야지요. 이제 수도에 있는 날도 사흘밖에 안 남았네요.”
프리모스와 마지막 인사를 하러온 일리드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프리모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아쉽지 않아? 우리 자주 놀지도 못했잖아. 형이 맨날 아카데미에 가느라. 이제 멀리 가면 자주 보지도 못 할텐데.”
“그러게요. 그건 저도 무척 아쉽네요.”
“이슈텔도 형을 만나보고 싶어 했는데. 나랑 헬리온이랑 노는 것도 좋지만 형이랑 같이 공부하면 더 똑똑해질 것 같다고 했거든.”
“그러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일찍 만나 볼걸…….”
여러모로 착잡한 마음이 들어 일리드는 나이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다 잊혀지겠지……. 레이 로테스도…… 일리드 테브로니아도…….’
자신에겐 추억이 될 시간이 누군가에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기억이란 게 못내 씁쓸했다. 일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프리모스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황태자 전하. 그동안 전하를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가벼운 악수로 이별하고자 했는데, 갑자기 프리모스가 와락 일리드를 껴안았다.
“전부 끝인 거처럼 얘기하지 마. 나중에 또 봐, 형. 자주 편지할게.”
지금껏 일리드는 마음 한구석에서 늘 프리모스와 거리를 두었다. 너무 가까운 사이가 되면 그의 것을 탐하게 될까 봐 그랬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왜 그렇게까지 했나 싶었다. 어차피 이렇게 헤어지게 될 것을, 조금 더 친하게 지내도 되지 않았을까.
‘미안해, 프리모스.’
일리드가 양팔을 벌려 프리모스를 안아주었다. 언제 만나도 참 선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아주 가끔은 이 아이가 없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었다. 그 모든 시간들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 * *
며칠 후, 일리드는 아버지와 함께 남부 대공령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사실상 리젠트라 공작가에 패해 수도를 떠나는 것이기에 황궁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일리드를 무척이나 아꼈던 황제와 황후는 황궁 밖까지 나와 조카와 볼테로를 배웅했다.
그러나 고모인 알렌시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리젠트라 공작가에 굴복한 쌍둥이 남동생을 비겁한 놈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까지 했으니 다정한 이별을 기대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헬리온이랑은 인사도 못 했는데…….’
일리드는 고모와 헬리온을 좋아했다. 가식적인 아버지와 달리 솔직한 고모가 좋았고, 그런 어머니를 둔 헬리온이 부러웠다. 이제 떠나면 한참 후에야 볼 수 있을 텐데 인사 한번 건네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쉬웠다.
사실 아쉬운 건 그거 한 가지만은 아니었다. 이슈텔, 그 애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커다란 마차가 황궁을 떠나 수도 시가지로 접어들었다. 동남쪽 귀족 저택가를 지나 광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무심코 마차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던 일리드가 크게 놀랐다. 리젠트라 공작가의 마차에서 이슈텔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