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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116화 (116/160)

116화 : 내 것과 아닌 것(2)

“나는…… 잘 모르겠어.”

일리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한 번도 이 일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물어봤자 화만 더 돋우는 꼴이 될 테니 질문할 생각조차 한 적 없었다.

“어차피 법안이 통과 됐잖아. 좋든 싫든 따라야 할 텐데 내 생각이 뭐가 중요해.”

“그런 말이 어딨어? 너 커서 정치하려고 비싼 돈 내고 여기 아카데미 다니는 거 아니야? 그러면 너만의 판단과 생각이 있어야 한다고!”

소녀의 입에서 깐깐한 노인네가 할 법한 잔소리가 쏟아졌다. 귀는 따갑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러니까 리젠트라 공작가가 발휘한 그 법안을 좋아하시지 않아.”

일리드는 며칠 전 아버지가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권력은 황가에서 나와야하는데 그걸 귀족들과 평민회가 나누어 갖겠다는 거잖아. 아버지 입장에선 좋은 일이 아니니까.”

“아니, 내가 물어본 건 네 의견이지 너희 아버지 생각이 아니잖아.”

소녀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일리드는 소녀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른들의 생각을 따르는 게 나쁜 거야?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경험도 많은 분들이시잖아.”

“어른들도 실수를 해. 그리고 어른들이 실수한 거라면 우리가 자라고 나서 바로잡아야 하고. 난 그저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나만의 기준을 갖고 싶은 거뿐이야.”

소녀는 아이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예쁜 은회색 눈을 반짝이며 일리드를 보았다.

“그리고 너한테도 그런 게 필요해 보이는데……. 좋아, 이틀 뒤에 다시 여기서 보자. 그때까지 아버지 말고 네 생각을 정리해 와. 나도 좀 더 고민해 볼 테니까.”

“아니, 저기 난-”

내가 왜 그래야하냐고 말하려는데 소녀는 그의 뒷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책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휴, 어떡하지.”

일리드는 수학과 경제 같은 학문을 좋아할 뿐, 정치니 권력이니 하는 것들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탐욕스런 아버지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일리드는 그 소녀를 다시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래서 이틀 동안 아무 생각도 없는 머리를 쥐어짜며 숙제하듯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틀 뒤가 되었다.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서자 그날 본 소녀가 먼저 와 있었다. 그 애는 금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단정하게 땋은 채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리드는 가슴이 쿵쿵거리는 걸 느꼈다. 이게 소녀에게서 쏟아질 잔소리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았다.

“안녕. 레이.”

소녀가 일리드를 보며 맑게 미소 지었다. 일리드가 자리에 앉으며 작게 인사했다.

“아, 안녕. 실비아.”

“실비…… 아, 아니야. 그래서 이틀 동안 네 생각 잘 정리해봤어?”

“어, 으응.”

일리드는 마치 숙제 검사를 받는 기분으로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사실 이틀 동안 여러 가지 책을 읽어봤는데…… 이렇다 할 답을 찾지는 못했어. 방계 황족의 세력을 이렇게 대폭 줄인 선례가 없어서 그런지 비교할 만한 사례도 찾지 못했고. 그래서 그냥 내 나름대로 생각을 해봤는데…….”

“해봤는데……?”

“그러니까 나는…… 권력이 황가나 다른 귀족에게 있든 아니면 평민회에 있든 그건 크게 상관없는 것 같아. 제국민들을 행복하게만 해줄 수 있다면 그게 누구든 간에 그 사람한테 권력이 가야한다고 생각해.”

말하면서도 일리드는 자신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감성적이고 쉬운 말은 누구든 못할까. 이 영리한 소녀가 원하는 건 이런 말이 아닐 텐데.

그걸 생각이라고 한 거냐고 쏘아붙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소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티 없이 맑은 눈동자로 일리드를 보았다. 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맞는 말이네. 난 그 생각은 못 하고 어느 쪽이 맞니, 그르니 이런 것만 생각해왔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걸 놓친 기분이야.”

소녀의 칭찬에 일리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조금 풀어지자 소녀에 대해 이런저런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런데 너는 왜 처음 보는 사람을 붙잡고 이런 이야기를 해? 친구 없어?”

“아냐, 친구 있어. 다만 친구들이 너무 어려서 이런 얘기를 어려워해. 언니 오빠들은 이미 할아버지랑 할머니한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자기 생각이 거의 없고. 난 그렇게 되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 나누고 싶었던 거야.”

“하긴, 나도 아직 아버지 생각이 내 생각인 거 같아.”

“그럼 우리 다음에도 여기서 만날래? 너랑 이야기하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의견을 들어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

소녀의 눈이 일리드에 대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오늘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 관심 없는 정치 이야기를 하기도 싫었고 소녀가 내준 숙제로 골머리를 앓기도 싫었다.

하지만…… 막상 소녀가 다음을 이야기하니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소녀가 일리드의 얼굴을 빤히 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또다시 가슴이 쿵쿵거렸다. 긴장은 이제 다 풀렸는데, 그럼 대체 이건 어떤 감정인 걸까.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일리드는 저도 모르게 진심으로 미소 짓고 말았다.

* * *

그날부터 일리드는 생전 펼쳐보지도 않은 정치서를 정독했다. 아버지는 드디어 아들이 정치에 관심을 보인다며 좋아했지만 일리드의 생각은 다른 쪽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버지가 자신에게 심어둔 편견과 사상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왜 리젠트라는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한 걸까? 그들이 개편한 법과 제도 중엔 좋은 것들도 많았다. 이번 방계 황족에 관한 법은 분명 과한 면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은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해 여름 동안, 일리드는 소녀와 여러 번의 만남을 가졌다. 처음에는 깐깐한 사감 선생처럼 보였던 소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답게 천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했지만, 자신의 오빠 이야기나 친구의 사촌 동생과 놀다 싸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일리드는 점점 그 애가 좋아졌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아카데미로 갔지만, 어느 날부터는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옷과 신발도 가장 좋은 걸로만 골라 신었고, 하녀들에게 머리 손질도 받았다. 정작 소녀는 그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일리드는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소녀와 이야기하며 일리드의 내면엔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이슈텔 리젠트라를 만나 보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버지에 의해 가지게 된 편견이 아닌, 자신만의 시선으로 그 애를 만나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 애는 정말 좋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와, 형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긴 한데. 요새 이슈텔이 많이 바쁜 거 같아.”

그러나 프리모스를 통해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리젠트라 공녀는 늘 자신을 만나고 싶어 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돼 버렸다.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가요?”

“나도 잘 모르겠어. 계속 아카데미에 드나드는 거 같은데.”

“아카데미는 지금 방학인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나랑 헬리온이 놀자고 해도 요샌 거기만 가네.”

“뭐, 지금 당장 급한 건 아니니 이슈텔 양이 시간 될 때 천천히 말씀해주세요.”

“응, 그럴게.”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한 프리모스가 문득 의아한 눈길로 일리드를 훑어보았다. 일리드가 왜 그러냐고 묻자 프리모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형, 요새 왜 이렇게 멋있게 하고 다녀?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예?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일리드는 누가 봐도 아닌 게 아닌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 모습에 프리모스가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여자애들은 꽃을 좋아해. 이슈텔도 꽃 선물을 해주면 엄청 좋아하더라. 형도 한 번 해 봐.”

“아니라니까요, 참…….”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벌써 일리드는 머릿속으로 어떤 꽃을 사면 좋을지 고민했다.

* * *

유난히 선선했던 여름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곧 개강을 앞두고 학생들도 하나 둘 아카데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일리드는 방학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그러면 소녀와 같은 수업을 신청해서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소녀와의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일리드는 책상 아래 숨겨둔 라일락 꽃다발을 보았다. 이 꽃을 받고 좋아할 소녀의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실비아, 여기야!”

저 멀리서 긴 금발이 보이자마자 일리드가 손을 흔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소녀가 가까워질수록 일리드는 떨리는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애의 표정이 이상했다. 근심이 있는 듯 자못 심각한 얼굴이 평소답지 않았다.

“실비아,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

소녀는 계속 침묵했다. 잠시 후, 오랜 정적을 깨고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나 이제 방학 끝나면 여기 못 와.”

“갑자기 왜? 어디 영지로 내려가기라도 해?”

“아니.”

소녀는 또다시 한참동안 말이 없다 겨우 입을 뗐다.

“사실 나, 실비아 실란다 아니야. 이 출입증은 아는 언니 걸 훔쳐온 거야. 이제 실비아가 돌아와서 다시 제자리에 돌려놔야해.”

순간 일리드의 심장이 바닥까지 쿵하고 떨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머리가 새하얘지는 듯했다.

“그럼 넌 누구야? 실비아 실란다가 아니면 대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소녀의 눈동자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심과 경계의 빛이 돌았다. 그리고는 일리드를 추궁하듯 날카롭게 물었다.

“너도 나한테 거짓말 했잖아. 레이 로테스 아니잖아, 너.”

일리드는 변명거리도 생각 못 한 채 멍하니 시선을 떨구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거짓말을 들켰단 생각에 손이 덜덜 떨렸다. 악의는 아니었지만 어쨌건 거짓말은 거짓말이었다.

“내가 알아봤는데 로테스 가문의 셋째는 열여덟 살의 여자던데? 레이나 로테스라고. 근데 넌 열여덟 같지도, 여자 같지도 않네.”

“아니, 그러니까… 난…….”

당황한 일리드가 고개를 숙인 채 우물쭈물 거리자 소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가 손을 뻗어 양손으로 일리드의 얼굴을 잡았다.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려 자신과 눈을 마주보게 했다.

“내 눈보고 똑바로 말해, 네가 누군지. 그럼 나도 내가 누군지 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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