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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114화 (114/160)

114화 : 남겨진 사람들(2)

“록펠트 공작 부인, 폐하께 이 무슨 무례한 언행이십니까!”

“무례한 건 상전들이 말씀하시는데 아랫사람이 함부로 끼어드는 거지. 넌 빠져.”

카리나가 소피의 말을 단번에 무시하듯 꺾어버렸다. 소피는 금방이라도 반발할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으나 이내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직 남아있는 술기운에 황제에게 날선 말을 뱉었지만 사실 카리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못할 말을 했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짧은 시간 안에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밝으면서도 고분고분한 성격 때문이었다. 이 자리까지 올라왔지만 아직까진 그런 모습을 보여야했다. 그래야 원하는 곳까지 갈 수 있다.

“폐하.”

정신을 차린 카리나가 다시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폐하께서 리젠트라 공녀를 그리워하시는 거 저도 다 압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 사람은 자존심이 센 사람입니다. 게다가 평생을 귀족에 황족이 될 예정으로 살아왔으니 황궁 밖의 삶에 잘 적응하지 못할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발로 황궁에 돌아오겠죠.”

“…….”

“그러니 아무 염려마시고 마음 편하게 계십시오. 그 사람이 돌아왔을 때 부끄럽지 않게 제가 이 황궁을 잘 돌보고 있겠습니다. 그래야 공녀도 마음을 바꿔서 하루라도 빨리 궁으로 오지 않겠습니까.”

“정말… 이슈텔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냐……?”

그럴 리가요. 입가에 맴도는 말을 삼키며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리고 저는 공녀와 다릅니다. 전 폐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늘 지금처럼 함께 있어드리겠습니다.”

카리나가 황제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럴 때면 황제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언제나 네 편이 되어주겠다며 아버지처럼 온화하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황제는 그녀를 다독여 주지도, 다정하게 바라봐 주지도 않았다.

“가자… 소피…….”

황제가 하녀장을 재촉했다. 휠체어가 멀어지자 카리나가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까지는 괜찮아. 그래, 아직은…….’

황제의 반응이 바뀌든 말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옥새만 찾으면 앞으로 눈치 볼 일도 없을 테니까.

카리나는 황제가 떠난 반대 반향으로 걸어 신전으로 향했다.

* * *

그 후로도 카리나는 이슈텔 없는 황궁 생활을 만끽했다. 표면적으로는 우선 그랬다. 옥새 문제 때문에 머리가 아팠지만, 여전히 귀족들 사이에 둘러싸여 권력의 달콤함을 즐겼다.

하지만 일리드는 그러지 못했다.

이슈텔이 궁을 나가던 날, 일리드는 창문 밖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생을 살아온 곳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무런 미련도 없는지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멀어지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건 일리드 자신과 그녀를 내쫓은 카리나였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일리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손에 쥐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는 바람처럼 흩어지고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상처 입히더라도 곁에 둘 생각으로 꾸민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녀는 이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영영 떠나갔다.

일리드가 주머니에서 작은 로켓 목걸이를 꺼냈다. 그 일이 있던 날, 시장에서 사 온 목걸이었다.

그가 가진 보석에 비하면 조악하고 볼품없지만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지금으로선 이게 그녀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목걸이가 열리자 그 안에 든 이슈텔의 초상화가 보였다.

그녀가 떠난 후로 며칠째 이렇게 하염없이 목걸이만 보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를 뺏어오겠다는 악의도 열의도 전부 사라졌다. 마치 모든 의지를 상실한 사람처럼.

“저, 대공 전하. 혹시 공작 부인, 아니 그러니까 리젠트라 공녀님이 보고 싶으신가요?”

처소를 청소하고 있던 어린 하녀 하나가 일리드에게 다가가 조심히 물었다. 일리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초상화 방에 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거기에 공작 부인, 아니 공녀님의 초상화가 있거든요. 실물이랑 같은 크기로요.”

“이슈텔의 그림이?”

“예. 예전에 두 분 대공 전하의 초상화가 황궁에 도착했을 때, 그 방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공작 부인의 초상화를 보았습니다.”

하녀가 일리드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슬쩍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 그림처럼 어린 시절의 초상화도 하나 있고 지금 모습의 초상화도 있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지요. 돌아가신 황후 폐하께서 걸어두신 걸 황제 폐하께서도 치우지 않으셨거든요.”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황궁 초상화라면 이 목걸이 속 그림보다 훨씬 크고 정교할 것이다. 그 그림을 자신의 방으로 가져온다면 이 타는 듯한 그리움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일리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곧바로 초상화 방으로 가려는데 하녀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 전하, 제가 알려드렸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한텐 꼭 비밀로 해주세요. 특히 록펠트 공작 부인 처소의 하녀들한테요.”

“그럴 이유라도 있나?”

“네. 사실 요새 록펠트 공작 부인께서 황궁에 남은 윈테라 공작 부인의 흔적을 전부 지우고 계시거든요. 공작 부인이 입던 옷, 쓰던 보석 같은 건 출궁하신 첫날부터 전부 가져가셨고, 처소도 허물어서 당분간 하녀들 방으로 쓰겠다고 하셨거든요.”

하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저희 하녀들에게도 앞으로 황궁에 공작 부인은 자기 하나뿐이니 호칭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될 거라고 엄포를 놓으셨어요. 근데 저희도 하루아침에 말을 바꾸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하녀의 말을 들은 일리드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슈텔에 대한 카리나의 악감정은 날이 갈수록 치솟고 있었다. 이제 황궁을 떠나 더 얼굴 마주 볼 일도 없건만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라.”

일리드의 대답에 하녀가 안도했다. 그는 곧바로 초상화 방으로 향했다.

* * *

황궁 초상화 방은 며칠째 내리는 비바람 때문에 어둡고 스산했다.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졸고 있던 하인들은 일리드가 온지도 모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대공 전하, 어떤 그림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여기에 이슈텔의 초상화가 두 개 있다지?”

“예, 그렇습니다.”

“둘 다 내가 가져가겠다.”

초상화 방을 담당하는 두 하인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한 채 작게 대화를 나누었다.

“어떡하지? 대공 전하께 내어드려도 될까?”

“하지만 록펠트 공작 부인께서 아시면 어떡해?”

“몰래 드리면 되잖아. 게다가 공작 부인보다 대공 전하께서 더 높은 분이신데.”

“하지만 황궁의 살림은 전부 공작 부인께서 담당하시잖아.”

대화는 점점 길어졌다. 결국 듣다못한 일리드가 나섰다.

“록펠트 공작 부인이 초상화를 찾으면 나한테 오라고 해라.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제야 하인들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일리드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

“어디 보자……. 윈테라 공작 부인의 초상화는 여기에 있습니다.”

방 가장 안쪽으로 가자 벽면에 걸린 세 개의 초상화가 보였다. 북부 대공령에서 보낸 헬리온의 초상화, 남부 대공령에서 보낸 일리드의 초상화,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이슈텔의 초상화였다.

“그런데 왜 유리가 깨져있는 거지?”

밖이 어두운 탓에 몰랐다가 가까이 다가가니 초상화 유리에 금이 간 것이 보였다. 얼굴 부분에 동그랗게 찍힌 자국으로 보아 누군가 뾰족한 것으로 세게 내리친 흔적 같았다.

“아니, 누가 이런 짓을! 죄송합니다, 전하. 저희가 누가 이랬는지 바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유리는 금방 교체하겠습니다.”

하인 둘이 새 유리를 들고 오더니 금세 새 걸로 갈아 끼웠다. 깨끗한 유리로 갈아 끼우니 그림도 이전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이것 말고 다른 그림도 있다고 하던데.”

“아, 어린 시절 초상화를 말씀하시는 거면 안쪽 서고에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하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갈 즈음 하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리드 앞에 섰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그게…… 공작 부인의 어린 시절 초상화가 사라졌습니다.”

“뭐? 대체 초상화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참다못한 일리드가 하인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조금 전, 이슈텔의 초상화에 금이 가 있는 것도 넘어가 주었건만. 관리 소홀도 큰 문제지만 그림을 잃어버리기까지 하다니 몹시 화가 났다.

“저, 대공 전하! 아무래도 록펠트 공작 부인께서 갖다 버리신 것 같습니다!”

하인이 넙죽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떨었다.

“공작 부인께서 궁을 나가신 날 밤, 록펠트 공작 부인이 이곳을 찾아오시더니 두 그림 모두 벽에서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홧김에 가져가신 것 같습니다.”

“뭐? 그 여자가 왜 그림을 가져가?!”

“아, 아무래도 록펠트 공작 부인이 윈테라 공작 부인을 미워하시니 어디 경매에라도 팔려고 하시는 게 아닐까요…….”

“당장 가서 그 그림을 찾아와. 안 그랬다간 도난에 관리 소홀 책임까지 물을 것이다!”

일리드의 호통에 두 하인이 앞다투어 초상화 방을 나섰다.

방에 혼자 남은 일리드는 창문을 열어 찬바람을 맞았다. 비 오는 날의 서늘한 바람이 머리끝까지 오른 화를 아주 조금은 식혀주었다.

그는 이슈텔의 초상화를 보다 벽에 남은 빈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헬리온 사이에 있는 저 빈 공간이 그녀의 자리였다.

그와 헬리온보다 더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던 사람이, 자신 때문에 이제 이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일리드가 자책하듯 낮게 욕을 뱉은 후, 초상화 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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