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남겨진 사람들(1)
이슈텔 리젠트라가 황궁을 떠난 후, 하늘에선 사흘 동안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황궁 사람들은 빗물이 죽은 황후와 황태자가 흘리는 눈물이라며 모두들 슬퍼했다.
황태자비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이슈텔과 북부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이번 사건을 통해 헬리온과 이슈텔의 관계는 더욱 단단해졌고, 텔리아 세 남매 역시 여전히 그녀와 가까이 지냈다.
아론 텔리아는 리젠트라 공작가와 북부 대공령을 이어주는 사자 역할을 했다. 라비도 공작가에서 지내며 계속 이슈텔의 호위 기사로 있었고, 슈리는 로제와 함께 매일 그녀를 찾아가 말벗을 해주었다.
이번 일은 분명 리젠트라 공작가의 뼈아픈 패배였다. 하지만 꼭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황제가 리젠트라 공작 부인의 독살 혐의를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했기 때문이다.
리젠트라 공작가를 옥죌 수 있는 패를 내려놓은 건 또 다른 공작가인 블라딘가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황제는 에보니에게 쏟아진 불리한 증언을 막고자 리젠트라 공작 부인의 혐의를 묻기로 한 것이다.
황궁을 떠난 후로도 이슈텔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오히려 달라진 쪽은 황궁이었다. 황궁 하인들은 모두들 이슈텔 리젠트라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누가 들을세라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린 하녀 하나가 윈테라 공작 부인이 불쌍하다고 했다가 록펠트 공작 부인에게 걸린 일이 있었다. 하녀는 윗전의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올렸단 이유로 회초리를 맞고 그날로 황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록펠트 공작 부인은 궁에 남은 이슈텔 리젠트라의 흔적을 모두 지우기로 작정한 듯했다. 하인들이 이슈텔을 언급할 때 윈테라 공작 부인이라는 호칭을 쓰며 크게 화를 냈다. 어지간하면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고, 꼭 말해야하는 일이 있으면 폐빈(廢嬪)이라 부르게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모욕적인 호칭으로 이슈텔 리젠트라를 부르지 않았다. 황태자비 자리는 이슈텔 스스로 내려놓은 거였다. 잘못을 하여 폐위당한 것도 아닌데 폐빈이라니. 하인들은 차라리 입궁 전처럼 이슈텔을 리젠트라 공녀라고 불렀다.
‘차 시중 하녀로 있을 때는 안 그랬는데, 왜 저렇게까지 악랄해진 거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하인들의 생각이었다. 인간의 욕심이란 건 참 끝이 없다며 하인들 모두 황궁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이슈텔 처소의 하녀들은 전부 황궁 내 한직으로 밀려났다. 다분히 보복적인 인사였다. 그중 가장 심한 처사를 받은 사람은 당연 하녀장 애비게일이었다.
애비게일은 하녀장 자리를 뺏기고 말단 하녀로 내려온 것도 모자라 록펠트 공작 부인 처소로 배정받았다.
“내가 말했지? 언젠가 내가 옷 입는 걸 도와주게 될 거라고.”
카리나가 드레스를 가지고 온 애비게일을 보며 비웃었다.
“예전에 날 무시했던 대가를 치러야지. 넌 앞으로 내 옷장에 드레스들이나 관리해.”
뻔뻔하기 짝이 없는 카리나를 보며 애비게일은 비참한 심정을 억눌렀다.
카리나는 제 방 옷장을 이슈텔이 입던 드레스를 전부 채웠다. 그녀가 아끼던 드레스를 제 몸에 맞게 수선해서 입었다.
더 크고 화려한 황후의 패물들은 이제 손도 대지 않고 이슈텔이 쓰던 보석들을 썼다. 그리고선 마치 이슈텔의 모든 것이 제 것이 된 양 굴었다.
“공작 부인, 연회장에서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카리나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반짝이는 티아라 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를 따라나서는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이 커다란 황궁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이 미치도록 좋았다. 콧대 높던 이들이 자신을 보고 고개 숙이는 것도 몹시 즐거웠다.
“록펠트 공작 부인, 어서 이리로 오시지요. 저희 모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텔론 백작 부인이 가장 먼저 알은체하며 다가왔다. 그녀를 선두로 다른 귀부인들도 한껏 꾸며낸 미소를 지으며 카리나의 눈도장을 찍으려 했다.
카리나는 이슈텔이 황궁을 나간 직후 곧바로 보란 듯이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이슈텔이 없는 황궁에서 카리나는 명실상부 가장 높은 여인이었다. 그러니 비가 그렇게 억수같이 오는데도 귀부인들이 앞 다투어 황궁으로 달려온 것이다.
“궂은 날씨인데도 와주셔서 모두 감사합니다.”
카리나는 겉으론 미소 지으며 속으론 그들을 비웃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빗물에 젖고 진흙 묻은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자신이 처음 황궁에 왔던 날이 기억났다.
‘나와 별반 다른 것도 없는 것들이 그동안 귀족이라고 갖은 유세를 다 떨었단 말이지? 결국 내 앞에서 이렇게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을.’
카리나는 오롯이 저 홀로 쥐게 된 권력의 맛을 즐기고 또 즐겼다. 아직 몸이 안 좋은 황제를 뒤로하고, 저를 찾아온 귀부인들 사이에서 그들이 건네는 아부와 진귀한 선물들을 마음껏 받았다.
이슈텔이 사라지자 카리나를 찾아오는 귀족들은 더욱 많아졌다. 위선적이기 짝이 없는 그들을 비웃으며 카리나는 이상하게 허한 마음 한구석을 채웠다.
* * *
그날 밤도 카리나는 늦은 시각까지 파티를 즐겼다. 귀부인들이 따라주는 술을 전부 마신 탓에 취기가 올라 정신이 몽롱했다.
“록펠트 공작 부인, 어디 가셔요? 좀 더 즐기시지 않고?”
비슷한 또래의 젊은 레이디 하나가 카리나를 잡았다. 그녀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이만 황제 폐하를 모시러 가야해서요.”
“어쩜, 성실하셔라. 이렇게 즐겁게 어울리다가도 폐하를 걱정하시다니.”
나이 든 귀부인들이 카리나를 칭찬했다. 그녀는 매끄럽게 꾸며낸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다가온 하녀가 카리나에게 물었다.
“황제전으로 가시나요?”
“아니, 집무실로 가자.”
카리나는 황제전과 조금 떨어진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무도 들이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뒤따르던 하녀들을 문밖에 세워둔 후,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황제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집무실은 어둡고 조용했다. 카리나가 벽에 붙은 촛대에 불을 붙였다.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아까보다 훨씬 주변이 밝아졌다.
“그동안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신경을 못 썼지. 이젠 정말 찾아야하는데.”
그녀가 몇 날 며칠째 찾고 있는 옥새. 아직까지 옥새에 대한 행방을 찾지 못했다.
“황제전에 없으니 여기엔 있을 거야, 분명히!”
지난 며칠 간 황제전을 이 잡듯이 뒤져보았지만 옥새는커녕 도장이 찍힌 서류 한 장 발견하지 못했다.
카리나는 날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볼테로의 재촉이 나날이 심해졌다. 리젠트라 가문이 황태자비 자리를 내려놓았으니 그사이에 빨리 황제를 설득해 일리드를 황태자로 만들라고 닦달했다.
그러나 카리나는 더는 황제를 설득할 마음이 없었다. 괜히 일리드를 옹호하다가 지금 가진 록펠트 공작 부인 작위까지 위협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황후 자리지 일리드의 황태자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옥새를 찾는 데 매달렸다.
‘게다가 황제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 그 여자가 다시 궁으로 돌아올지 몰라.’
황제가 내쫓았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불안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슈텔 리젠트라는 제 발로 황궁을 나갔다. 그리고 카리나는 황제와 그녀 사이의 끊기 힘든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마음이 너무 물러. 그 여자를 내보낸 걸 후회하게 되는 날이 오면 난 정말 끝이야.’
카리나는 속도를 내서 집무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취기에 몽롱했던 정신이 긴장감으로 도로 말짱해지는 기분이었다.
가구가 많은 처소와 달리 집무실은 책상과 책장밖에 없는 비교적 단출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옥새는 없었다.
“없어! 없다고!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제 목숨과 직결된 물건을 찾지 못한 불안감에 카리나가 절규했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비참하게 쫓겨난 걸 떠올리면 즐겁다가도 옥새만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나 혼자선 못 찾아. 말이 새어 나갈 위험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
하다못해 하녀들을 시켜서라도 황궁 안을 더 세세히 뒤져봐야 했다. 하지만 하녀들 중엔 아직까지 이슈텔 리젠트라를 따르는 이가 많았다.
만에 하나 자신이 옥새를 찾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황후는커녕 공작 부인 자리도 위태로웠다.
‘뭔가 확실히 협박할 만한 것이 있어야 할텐데…….’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 문득 신전에서 본 말리파가 생각났다.
그 늙은이의 주술로 이슈텔 리젠트라가 무의식 속을 헤매다 깨어났다. 하녀들에게 그런 정신적인 주술을 걸면 비밀이 새어 나가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게 좋겠어. 말리파가 아니어도 신전엔 다른 신관들이 많으니 못 할 것도 없잖아? 가서 하녀들을 구속할 수 있는 주술이 있냐고 물어봐야겠어.”
카리나는 스스로의 총명함에 감탄하며 집무실을 나왔다. 곧바로 신전으로 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옆에서 바퀴 끄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휠체어를 탄 황제가 보이자 카리나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녀장 소피가 휠체어를 멈춰 세웠다. 황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괜히 제 발이 저린 카리나가 먼저 휠체어로 다가갔다.
“밤이 늦었습니다, 폐하. 침소에 드시지 않고 왜 나와 계십니까?”
“너는… 어딜… 가느냐…….”
“저는 잠이 오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 황궁에 남은 사람은 저와 폐하 둘뿐이지 않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입니다.”
뻔뻔스런 카리나의 말에 소피가 작게 헛웃음을 쳤다. 카리나는 황제에게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확인시켜주려 짐짓 마음에도 없는 말을 이어갔다.
“리젠트라 공녀가 떠난 황궁은 너무나 크고 씁쓸합니다. 이제 공녀 대신 제가 온전히 폐하를 모셔야 하니 새삼 그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집니다. 앞으로 가끔 만나며 황궁 생활에 대한 조언도 듣고 안부도 전하며 그렇게 지내고자 합니다.”
“그런 애가… 매일…… 연회장에… 사람을… 불러……?”
황제의 말에 카리나의 표정이 단박에 딱딱하게 굳었다. 입가에 걸렸던 그림 같은 미소도 순식간에 지워졌다.
“사람 하나 나갔다고 황궁 분위기가 축축 처지는 게 보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카리나가 이를 악문 채 거센 비난조로 말을 이었다.
“곱게 정략결혼이나 해야 하는 주제에 남편감이 싫다고 궁을 박차고 나간 사람입니다. 죄지은 제 새언니 살리겠다고 황가와 파혼한 사람인데 그게 안타깝다고 수군대는 꼴이 우스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불러서 분위기를 환기한 게 그리 큰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