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출궁
‘황실과 리젠트라 공작가의 혼담을 정식적으로 파기한다. 이 시간부로 이슈텔 벨로나 리젠트라는 테브론 제국의 황태자비가 아니며, 윈테라 공작 부인 작위를 반납한다.’
사흘 후, 이른 오전. 신전에서 황가와 리젠트라 공작가의 파혼을 발표했다. 소식은 빠르게 퍼질 거고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허겁지겁 찾아오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것이 싫어 이미 출궁 준비를 전부 끝마쳤다.
황태자비 자리를 내려놓은 이상 내가 황궁에서 지낼 명분이 없었다. 행여나 황제께서 새로운 황태자비를 뽑는다고 하시면 더더욱 궁에 머물러선 안 됐다.
막상 주변을 정리하려고 하니 가진 물건이 많지 않았다. 입은 옷들은 전부 황실의 소유였고, 보석도 황후 폐하께 물려받은 게 전부였다. 사비로 산 것들이 아니기에 출궁 전, 하나도 빠짐없이 반납했다.
그러고 나니 가진 게 없어 입고 나갈 옷이 마땅치 않을 정도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수수한 순백색 드레스가 내가 가진 전부였다.
어젯밤, 후원 새장에 가서 새들과 마지막 인사도 했다. 정말 마지막은 아니지만, 이제 예전만큼 자주 올 수 없을 테니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인사해주고 싶었다.
다른 새들과 달리 공작 저에서 데려온 칸과 헬리온에게 선물 받은 뮬은 내 소유의 아이들이었다. 출궁할 때 함께 데려갈까 하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황궁 새장보다 더 좋은 환경을 꾸며줄 자신이 없었다. 새들에게도 낯선 공작 저보다는 친구들도 많고 오래 지낸 이곳이 나을 것이다.
내 분위기가 평소와 다름을 느꼈는지 칸과 뮬이 양옆에서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그날따라 메이가 그리웠다. 장난을 치며 나와 헬리온, 그리고 프리모스를 놀려대던 낭랑한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귓가에 선했다.
사가로 돌아가기 전, 아침 일찍 프리모스의 무덤을 찾았다.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오지 못했는데, 이렇게 황궁을 떠나게 되니 더 이상 마음대로 찾아올 수도 없게 되었다. 그간 더 자주 오지 못한 게 미안해졌다.
“프리모스, 예전에 너한테 와서 네 사촌 중에 누가 더 좋은 사람이냐고 물었던 거 기억나?”
가져온 꽃다발을 무덤가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때만 해도 정말 궁금했었는데 이젠 아니야. 지금은 그 답을 알거든.”
“…….”
“프리모스, 나 헬리온이 좋아졌어. 그 애는 우리한테 심술이나 부리던 어린아이였는데 지금은 몰라볼 정도로 커서 엄청 멋있어졌어. 너도 보면 깜짝 놀랄걸? 하지만 이젠 이 말조차 무색하네. 나, 황가와의 혼담을 파기했거든.”
때마침 불어온 서풍이 마치 프리모스의 물음 같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가에 걸며 그에게 답했다.
“그때 말한 그 하녀 기억나? 카리나한테 당했거든. 내가 불행해지는 꼴을 보겠다며 달려드는데 어떻게 막아낼 방도가 없더라고.”
“…….”
“사실 아무한테도 말 못 했지만, 나 너무 힘들어. 못 견디게 비참하고, 죽을 것처럼 슬퍼. 황궁은 내 집이고 황태자비는 내 자리인데. 내가 왜 이렇게 쫓겨나듯 궁을 떠나야하는지 모르겠어.”
짧게 인사만 하고 가려 했건만, 답답한 마음에 하소연이 나왔다. 프리모스에게만 오면 늘 그랬다. 나도 잘 모르는 내 안 가장 깊숙한 감정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 애를 살리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안 어울리게 마음 약한 짓을 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하잖아. 이미 지나간 일이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인데도 자꾸만 그 생각이 나를 괴롭게 해.”
늘 그랬듯 프리모스는 대답이 없었다. 계속 불어오는 바람에 무덤가에 핀 작은 꽃이 흔들렸다. 그 꽃이 마치 지금 내 모습 같았다.
“사실 나 가끔 널 원망했어. 네가 살아있었다면 모두가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거든.”
“…….”
“너와 내가 예정대로 결혼했으면 일리드의 약혼녀, 그 가여운 여자도 그렇게 억울하게 죽진 않았겠지. 그 사람과 나도 이렇게 복잡한 감정으로 엮이지 않았을 테고.”
“…….”
“하지만 이젠 원망 안 해. 네가 떠난 후로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그동안 나도 많이 자랐거든. 이제는 황태자비가 아니라 한 명의 신하로 돌아가서 헬리온을 좋은 황제로 만들도록 할게.”
왼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 프리모스의 무덤 앞에 놓았다. 그가 나에게 주었던 선물을 이렇게 돌려주게 되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찾아올게. 그때까지 잘 있어, 프리모스.”
* * *
프리모스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처소로 돌아왔다. 반짝이는 보석으로 가득했던 화장대는 텅 비었고, 드레스로 채워졌던 옷장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입고 있는 푸른색 드레스가 마지막으로 반납해야 할 옷이었다. 하녀장 애비게일이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장식을 떼고 옷의 단추를 하나하나 푸는 동안 애비게일의 뺨은 눈물로 젖어들었다.
“애비게일, 자네가 내 처소로 배정된 게 언제였지?”
“정식으로 배정된 건 황후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난 후였습니다.”
“그래. 원래 자네는 황후 폐하의 하녀장이었지. 내가 자네를 끝까지 책임져줬어야 했는데, 이렇게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한 마음뿐이야.”
“아닙니다, 공작 부인.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이제 그렇게 부르면 안 되지. 앞으론 처음 봤던 날처럼 공녀님이라고 부르게.”
애비게일은 끝내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아끼던 푸른 드레스를 벗고 수수한 하얀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이런 평범한 옷을 입는 건 오래간만인지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조금은 어색했다.
“에시.”
애비게일의 부름에 에시가 빗과 머리끈을 가져왔다. 애비게일이 내 머리카락을 곱게 빗고 또 빗었다. 금빛 머리카락을 실타래처럼 하나로 모아 올린 후, 끈으로 흐트러짐 없이 묶었다.
“에시, 내가 널 여기로 데려와 놓고 그동안 신경을 많이 못 써줬구나.”
떠날 때가 되니 남겨질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눈물만 계속 훔치는 애비게일과 달리 에시는 코끝만 빨개질 뿐 꿋꿋이 눈물을 참았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공작 부인. 제가 하녀장님도 잘 보살펴 드릴 테니 아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너와 카리나는 이전부터 아는 사이니까 널 많이 괴롭히지는 않겠지. 내 몫까지 남은 사람들도 두루두루 신경 써 주거라.”
“네, 그러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에시의 모습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이제 정말 궁을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들었던 처소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이 방이 원래 이렇게 넓었던가. 손때 묻은 가구들이 치워진 방이 이전보다 훨씬 크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처소 문을 닫고 나오자 복도 밖에 줄지어 서 있는 하녀들과 하인들이 보였다. 황궁에서 지낸 시간이 길다 보니 모두들 얼굴과 이름이 익숙한 자들이었다.
황제전은 물론, 헬리온과 일리드, 그리고 카리나 처소의 하녀들까지 모두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
“공작 부인…….”
하녀들이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애써 괜찮은 모습을 보이려 고개를 끄덕였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하인들의 행렬은 본궁 문 앞까지 이어졌다. 스스로 황태자비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사실상 내가 카리나에게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기에 다른 귀족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황궁 사용인들의 배웅만으로도 충분했다.
“가는 건가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대조되는 휘황찬란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카리나였다.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당신이 이런 식으로 황궁을 나가게 될 줄이야.”
그녀의 얼굴은 승리감에 가득 차 있었다.
“당신, 정말이지 극단적이네. 타협도 모르고 구부릴 줄은 더더욱 모르고. 이게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지 나는 잘 모르겠어서.”
“네 생각 물어본 적 없어.”
내 대답에 카리나가 크게 코웃음을 쳤다.
“이제 나한테 그렇게 편하게 말하면 안 되지. 이렇게 지위도 작위도 다 내려놓고 빈손으로 떠나는 주제에. 앞으론 나한테 존대를 해야 할 거야.”
“불만이면 가서 폐하께 말하던가. 네가 할 줄 아는 거라곤 그거밖에 없잖아.”
“이렇게 쫒기듯 나가면서 자존심은.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의기양양할 수 있나 보자고.”
카리나가 혀를 차며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목에 걸린 목걸이가 반짝 빛을 냈다.
낡은 황금빛 장미 목걸이. 단두대에 섰던 날 이후 까맣게 잊고 지내던 그녀의 목걸이었다.
나는 성큼성큼 카리나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피할 새도 없이 손을 들어 목걸이를 떼어냈다.
“지금 뭐 하는!”
카리나의 눈이 당혹감으로 커졌다. 그녀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게 목걸이를 높이 들어올렸다.
“괜한 심술부리지 말고 내놔!”
“아니. 넌 아직 내게 이 목걸이 값을 치르지 않았어. 그러니 이건 내 거지.”
값을 치르지 않았다는 말에 카리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 기세였지만 주위에 눈을 의식했다. 카리나가 금세 표정을 가다듬고는 여유로운 척 목소리를 꾸며냈다.
“이제 나도 처음 당신을 찾아왔을 때랑 달라. 눈 있으면 지금 당신 모습을 좀 봐. 그때의 나 못지않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하지만 적어도 너처럼 은인을 배신했다는 죄책감도 가지진 않겠지.”
“난 죄책감 같은 거 없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딴 걸 가져!”
카리나가 내지른 고함에 복도가 크게 울렸다. 그녀는 주변에 하인들이 있다는 것도 금세 잊었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나도 이제 손에 쥔 게 많아. 그러니 값을 불러봐. 얼마든지, 뭐든지 내줄 테니.”
“아니, 넌 절대 이 값을 치르지 못해. 난 널 용서할 생각이 없거든.”
“용서? 용서라고?”
그 말에 카리나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미묘한 표정이었다.
“처음 날 찾아왔던 날, 그때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돌려주려고 했지. 하지만 이제는 안 되지. 그동안 네가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나는 그녀의 눈앞에 목걸이를 보여준 뒤 소매 안으로 깊숙이 넣었다.
“내가 널 살려주고 받은 거니 돌려받고 싶다면 내게 용서를 빌어. 아니면 목숨을 내놓던가. 그 정도 각오가 되어 있으면 다시 날 찾아와.”
얼빠진 카리나를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십여 년을 지낸 황궁을 나가는 순간, 손에 쥔 건은 이 낡은 목걸이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