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파혼
황제전에 들어온 카리나는 책상 위에 은쟁반을 올려 둔 후, 넓은 방을 돌아다녔다.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처소는 조용했다. 어제저녁에 마시고 잔 약 기운 때문에 황제는 아직까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북부 사람들, 지치지도 않고 참 대단해.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폐하께선 저리 곤히 잠드셨는데.”
카리나가 북부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반으로 찢고 또 찢었다. 갈기갈기 찢긴 편지는 벽난로 불길 아래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제가 서신에 답장을 하지 않자 근래에는 사신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그들도 황제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얼마 전부터 카리나는 황제의 약에 수면 성분이 강한 약초를 갈아 넣었다. 회복을 촉진시키기 위함이라 했지만 실은 황제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잠에 취한 황제는 사람들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고 사신은 발만 동동구르다 돌아갈 뿐이었다.
“이 방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텐데.”
카리나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예민한 눈길로 처소 곳곳을 살펴보았다. 며칠째 이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옥새. 황제의 상징이자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그 물건.
‘어차피 황제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어. 그러니 내가 옥새만 찾아낸다면……!’
그러면 황제의 유언장을 조작해 황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헬리온을 제치고 일리드를 황태자로 만드는 일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처소를 뒤져보아도 옥새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게 맞기는 한 건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젠장, 옥새가 황제전에 없으면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카리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방 안 깊숙한 곳,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샅샅이 뒤져보았다. 벌써 며칠째지만 오늘도 허탕이었다.
“하, 짜증 나.”
황제의 의자에 털썩 앉은 카리나가 등받이 뒤로 몸을 젖히며 낮게 중얼거렸다. 구두 뒤축으로 하얀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비록 옥새는 찾지 못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은 날이었다.
“빨리 재판날이 오면 좋겠는데…….”
이혼 소송은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곧바로 판결도 나지 않을뿐더러 그 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소모가 엄청나다.
“당신이 빨리 본색을 드러냈으면 좋겠어. 지금까진 잘도 좋은 사람인 척했지만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면 그 가식적인 가면이 벗겨지게 될걸.”
이슈텔이 아니어도 희소식은 연일 들려왔다.
에보니 블라딘. 그 미친 여자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 전, 그 여자의 늙은 어머니가 영지에서 수도로 올라왔다. 에보니 블라딘은 공작이 되면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칭호를 회복시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에보니는 블라딘 공작이 되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여전히 블라딘 백작과 백작 부인으로 남게 되었다.
‘단지 그것 때문에 막냇자식한테 화가 난 걸까?’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다 싶었다. 장자를 가주로 세우자고 막내를 그렇게 쥐 잡듯이 몰아세우다니.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나 본데.’
카리나가 팔짱을 낀 채 구두 끝을 까딱거렸다. 조만간 그쪽 장자와 만나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에보니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멍청한 놈을 앉혀두면 내 맘대로 휘두르기 편하겠지.’
황제는 모후의 집안인 블라딘 가문에 한없이 무른 사람이었다. 그 집안을 제 손에 쥐고 좌지우지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뒷배는 없을 것이다.
기분 좋은 미래를 꿈꾸며 카리나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콧노래를 부르며 그녀는 잠든 황제의 머리맡으로 갔다.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황제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존경하는 황제 폐하. 조금만 더 이렇게 잠들어 계세요. 때가 되면 제가 늦지 않게 깨워드리겠습니다.”
카리나가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처소 문을 나설 때 황제가 천천히 눈을 떴다는 걸, 그녀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 * *
“공작 부인, 안으로 드시지요. 마침 폐하께서 조금 전에 깨어나셨습니다.”
하녀장 소피가 평소보다 밝은 얼굴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소피와 대조적으로 굳은 얼굴 한 채, 황제전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폐하께선 침대 프레임에 몸을 기댄 채 무거운 눈을 끔뻑이고 계셨다. 처음엔 내가 누군지 못알아보시는 듯하더니, 목소리를 듣고는 가까이 오라 손짓하셨다.
“옥체는 나아지셨습니까?”
질문이 무색하리만큼 폐하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안면 마비도 여전히 이렇다 할 차도가 없었고 몸은 예전보다 더 야위셨다.
“내… 탓이니…… 걱정하지…… 마라…….”
폐하께서 힘없이 고개를 저으셨다. 그 모습을 보니 파혼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폐하, 제가 오늘 뵙고자 청한 이유는…….”
겨우 운을 떼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들고 온 이야기가 입술 끝을 맴돌 뿐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괜… 찮다……. 말해… 보아라…….”
기력 없는 폐하의 목소리에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음속에 폐하를 향한 원망만 가득했는데, 막상 이렇게 마지막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오니 후회스런 일들만 떠올랐다.
“황가와의 혼담을 파기하고 싶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폐하의 짧은 한숨이 들렸다. 왜냐고 묻는 듯한 그분의 눈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리드와의 이혼 소송을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려면 파혼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파혼에 대한 저희 가문의 책임은 면죄권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께서 다시금 한숨을 내쉬셨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폐하의 대답을 기다렸다.
‘화를 내시겠지. 절대 안 된다고 하실지도 몰라.’
머릿속에 온갖 나쁜 생각들이 가득 떠올랐다. 잠시 후, 폐하께선 역정 대신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헬… 리온은…….”
“예……?”
“그 애와는… 어떻게…… 하려고…….”
황가와의 혼담을 깨면 다른 황족과도 혼인할 수 없음을 상기시키는 말씀이셨다. 헬리온의 이름을 듣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헬리온도 동의했습니다.”
“…….”
“일리드와 남부 대공령은 앞으로 몇 번이고 이런 식으로 저를 옥죄려 들 것입니다. 제가 황태자비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싸움은 끝나지 않겠죠. 그러니 헬리온에게 더 큰 상처가 남기 전에 제가 모든 걸 내려놓겠습니다.”
말을 마치는 순간 겨우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고개를 숙여 눈물을 가렸지만 떨리는 어깨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홀로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데 폐하의 여윈 손이 내 어깨 위로 닿았다. 다독여 주고 싶어하셨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서툴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어렵… 구나……. 너와… 가족이… 된다는 게…….”
태어난 순간부터 가족이 되기로 정해졌지만 그 끝은 결국 이거였다. 평생을 황태자비로 살아온 나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고, 시아버지가 될 폐하와의 인연도 여기서 끝나는 것이다.
비록 서로 미워하고 오해한 시간이 길었지만, 이런 결말을 예상한 적은 없었다. 가는 실타래처럼 엉켜있을지라도, 이런 식으로 끊어질 거라 믿지 않았다. 이제 와선 아무 의미 없는 믿음이지만.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
사실 아직까지 실감이 잘 나지는 않았다. 내가 황궁을 떠나야 한다는 게. 그리고 헬리온의 옆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설 수도 있다는 게.
혼담이 깨지면 귀족들은 제 집안에서 황태자비를 배출하려 앞다투어 나설 것이다. 앞으로 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도 상관없지만, 유력한 황태자 후보인 헬리온은 나와는 상황이 달랐다.
“후회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지금으로선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니까요.”
어쩌면 헬리온이 황제가 되더라도 나는 그의 정비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법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어질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으로선 정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미래의 우리가 방법을 찾을 수 있길 바라는 수밖에.
“그래……. 그것이… 너희의… 선택이라면…… 그렇게… 해라…….”
폐하께서 침대 위에 있는 줄을 당겨 하녀장 소피를 부르셨다.
“찾아계셨습니까, 폐하?”
“신전에서… 대신관을…… 불러와라…….”
“예, 폐하.”
그렇게 이십여 분이 흐른 후, 소피가 신전에서 대신관을 데려왔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대신관은 한숨짓는 폐하와 눈물 흘리는 나를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인일로 이리 급히 찾으셨나이까?”
대신관의 물음에 폐하께서 내게 책상 아래 있는 약혼서약서를 가져오라 명하셨다.
폐하의 책상 서랍을 열자 중요 서류가 담긴 함이 보였다. 그 서류들 중 가장 위쪽에 두 장의 서약서가 있었다. 하나는 나와 프리모스, 다른 하나는 내 이름만 적히고 옆 칸은 빈 종이였다.
“대신관……, 리젠트라… 공작가와의…… 혼담을…… 파기하라…….”
“예? 폐하, 지금 무슨 말씀을?!”
놀란 대신관은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 대답 역시 마찬가지였다.
“폐하와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황가와 리젠트라 가문의 혼담을 파기해주세요.”
“하지만, 어떻게…….”
대신관이 자신의 손에 들린 서약서를 들고 황망한 듯 중얼거렸다. 그는 몇 번이고 나와 폐하에게 혼담을 정말 파기해도 되는 거냐고 되물었다. 폐하와 나는 서로의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파기한 혼담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신전에서 파혼을 공표하기 전까진 시간이 있으니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라도 찾아오십시오.”
대신관이 여지를 남기듯 말했으나 대답을 한 사람은 없었다. 대신관이 자리를 떠난 후, 나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도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대신관이 파혼을 발표하는 대로 궁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께 인사를 드린 후,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폐하께선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지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