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혼인 무효 소송
이른 오후, 이슈텔의 처소를 찾은 헬리온이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들고 온 이야기가 워낙 무거운지라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전하?”
이슈텔이 아끼는 하녀 에시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헬리온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들어서 좋은 일이 없긴 하지.”
“그래도 평소보다 너무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에시가 걱정스레 말했다.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려고 해도 헬리온의 얼굴에 드리운 먹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이슈텔은 요새 어때? 간밤에 아팠거나 그러진 않았지?”
“네. 이제 기력을 거의 회복하신 것 같긴 한데, 요 며칠 계속 늦게 주무시더라고요.”
“왜?”
“그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신 것 같던데…….”
헬리온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슈텔이 몸조리말고 해야할 일이 뭐가 있지?
황궁 살림은 그녀의 못돼먹은 친척이 가져간 지 오래였고, 이슈텔이 맡은 정치적 업무는 자신과 율리언 릴체가 나눠서 처리하는 중이었다.
“가서 물어보면 되겠지. 문을 열어라.”
그의 명에 에시와 다른 하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헬리온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햇살이 가득 드리운 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책상이 비어있는 것을 본 헬리온이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슈텔이 침대에 몸을 기댄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헬리온이 발소리를 죽인 채 이슈텔의 곁으로 다가갔다. 창문 틈으로 넘어오는 밝은 햇빛도 그녀의 단잠을 깨우지는 못했다.
“예쁘네.”
심각한 이야기를 들고 왔지만, 잠든 이슈텔의 모습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살짝 웃음이 걸렸다. 불안감으로 가득한 마음이 잠시나마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헬리온이 침대 주변에 가득 놓인 서류를 발견했다.
“뭐지, 이게? 황후전 개조 예산안……?”
숫자와 글씨가 빽빽하게 적힌 서류에는 1차 예산안과 2차 예산안이 나뉘어 있었다. 1차 예산안에는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사치품들이 적혀 있었다. 그나마 2차 예산안에는 사치품들을 전부 다른 대용품으로 바꿔놔 예산을 절반 이상 줄여 놨다.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헬리온은 종이를 구기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안 그래도 어제부터 시작된 황후전 공사 때문에 카리나를 찾아가 무슨 일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폐하께서 의식이 돌아왔을 때 허가받았다며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는 자기는 폐하를 간호하러 갈 테니 대공은 공작 부인이나 잘 살피시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래 놓고서 어려운 일은 죄다 이슈텔한테 시키고 있어?!’
황제 폐하라도 제대로 살피면서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최근 들어 카리나는 황제의 병간호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궁의가 약초차를 달여 달라고 부탁해도 몹시 귀찮은 얼굴로 재료와 조합법만 알려준 채 알아서 하라고 했다. 소피 하녀장의 말로는 폐하의 처소에 오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했다.
‘그 시간에 뭘 했는지 뻔하지.’
폐하께서 판단력이 흐려진 사이, 남부와 연락하며 상황을 이 지경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헬리온이 짜증스럽게 인상을 찡그렸다.
보기와 달리 이슈텔은 무른 구석이 있었다. 조금밖에 섞이지 않아도 핏줄은 핏줄이라 그런 건가, 특히 그 여자에게는 이렇게 자꾸만 져주는 게 눈에 보였다.
‘하긴, 나도 일리드한테는 모질지 못하니…….’
주먹다짐을 하며 싸웠어도 끝내 외면할 수는 없는 게 핏줄이었다. 매일 술로 밤을 보낸다는 말을 듣고 한심하다고 욕해도 그다음엔 슬그머니 걱정이 밀려오곤 했다.
이슈텔도 그런 마음인 걸까. 화가 나고 분하지만, 그 후엔 꼭 그만큼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걸까.
“이슈텔, 우리 정말 어떡하면 좋을까.”
헬리온이 침대 끝에 이마를 기댄 채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 * *
인기척이 느껴져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잠깐만 쉬려고 했는데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카리나가 벌인 일을 처리하려면 아직도 반나절이나 걸리는데.’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 놓인 종이를 찾았다. 그때, 불쑥 귓가에 헬리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찾는 거야?”
흠칫 놀랄 새도 없이 시선이 그의 손으로 향했다. 헬리온의 손엔 카리나가 두고 간 서류가 들려있었다.
“아, 헬리온. 언제 왔어, 말도 없이.”
당황한 내가 손을 뻗자 헬리온이 내 손이 닿지 않게 종이를 위로 들었다. 그는 종이의 마지막 줄까지 다 확인한 후에야 서류를 돌려주었다.
“이슈텔, 이런 건 안 한다고 해. 지금 네 몸 하나 회복하기에도 벅찬데, 왜 이런 일까지 하고 있어.”
헬리온이 눈썹을 찡그리며 답답한 듯 말했다. 그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았지만, 나 역시 그가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너도 그러면서…….”
“응? 내가 뭘?”
“너도 일리드가 하지 않는 일까지 죄다 맡아서 하고 있잖아.”
“아…….”
헬리온의 얼굴이 금세 새빨개졌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작게 한숨이 나왔다.
“너나 나나 사서 고생을 하는 사람들인가 봐.”
침대 위에 어질러진 서류를 정리하며 헬리온에게 물었다.
“아, 그래서 갑자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오늘 같이 저녁 먹기로 했잖아. 그 전에 시간이 남은 거야?”
“그건 아니고, 급하게 해야 할 이야기가 생겨서.”
“급하게?”
내 물음에 헬리온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법관에게서 편지가 왔어. 혼인 무효 소송 건에 대해 말이야.”
의식을 회복한 후, 나는 곧바로 법원에 혼인 무효 소송 신청을 했다. 일리드와의 혼인을 아예 없었던 일로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한 번 읽어봐야 할 거 같아.”
헬리온이 심각한 얼굴로 법원에서 온 편지를 건넸다. 나는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편지를 읽었다.
“이게 무슨…….”
혼인 무효 건으로 진행되어야 할 소송이 이혼 소송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놀란 내가 헬리온에게 따지듯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이혼이라니? 왜 갑자기 이혼 소송으로 바뀐 거야?”
“아무래도 남부 측에서 손을 쓴 모양이야. 잠자코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런 짓을 꾸미고 있을 줄이야.”
혼인 무효 소송은 말 그대로 혼인 자체를 없던 일로 하는 거지만, 이혼 소송은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이혼 소송은 나와 일리드의 혼인 관계가 성립했다는 걸 전제로 진행하는 일이었다. 소송에서 이겨도 나와 일리드의 혼인 관계가 죽을 때까지 서류에 남을 것이고, 지면 정말로 혼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게다가 이혼 소송으로 가면 재판에서 이길 확률이 거의 없었다. 일리드에게는 이렇다 할 유책 사유가 없었다. 오히려 소송 자체가 기각될 확률이 더 높았다.
편지를 쥔 손이 쉼 없이 떨려왔다. 등줄기에 한기가 맴돌면서 식은땀이 났다. 목숨을 걸고 말리파의 약을 마신 것이 전부 수포로 돌아갈 위기였다.
“이슈텔.”
헬리온이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하지만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그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내가 대법관을 만나러 가봐야겠어.”
* * *
“윈테라 공작 부인!”
만류하는 헬리온을 뒤로하고 곧장 법원으로 왔다. 내가 법원에 들어서자 사무관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들을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대법관은 어디 있지?”
“아, 공작 부인. 그, 그게.”
수석 사무관에게 묻자 그가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변명거리를 생각하지 못하게 크게 다그치자 사무관이 안쪽 깊이 있는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 방 안에 대법관이 있나?”
“그, 그렇습니다.”
“문을 열라.”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안에 다른 손님이 계셔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들이 밖으로 나왔다. 카리나, 그리고 일리드였다.
처음 두 사람을 보았을 땐 역시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의 조합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에보니 블라딘 없이 카리나가 일리드와 있는 모습이 어색했다. 에보니가 정신없는 사이, 둘이서 함께하기로 한 건가. 나를 궁지에 몰아넣겠다고 합심한 모습을 보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어서 오세요, 윈테라 공작 부인. 늦으셨네요, 저보다 일찍 오실 줄 알았는데.”
카리나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는 눈동자만 움직여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몹시도 즐거운 얼굴이었다.
“헬리온은 폐하의 업무를 대행하느라 본궁 밖에는 거의 나오지도 못하는데 당신은 시간이 남아도나 보군.”
고개를 돌려 카리나의 뒤에 있는 일리드를 보았다. 언제부턴가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보니 블라딘도 모자라 이젠 카리나와 손을 잡다니. 이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갈 심산일까.
“브론 대법관. 소송장을 받았는데 왜 혼인 무효 소송이 아닌 이혼 소송으로 처리돼 있죠?”
냉랭한 목소리로 묻자 대법관이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소송을 낸 건 난데, 왜 법원에서 마음대로 소송 건을 바꾸었냔 말입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공작 부인과 대공 전하께서 혼인하시기로 한 건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가 된 사안인데, 그걸 무르려면 이혼 소송이지 왜 혼인 무효 소송인가요?”
대답을 한 쪽은 대법관도 일리드도 아닌 카리나였다.
“식장에서 불의의 사고가 나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황제 폐하와 대신관 앞에서 혼인을 맹세했으니 두 분은 법적 부부이십니다.”
“너한테 물은 거 아니니까 끼어들지 마!”
카리나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몸이 좋지 않아서일까, 평소보다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아니, 어쩌면 이 상황에서 화를 참아내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몰랐다.
이러려고 모두를 걱정시켜가며 독약을 마셨던 게 아니다. 그런데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기어코 나를 물어뜯으려 드는 걸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너한테 이따위 간악한 짓이나 하려고 살려준 줄 알아? 넌 가서 황제 폐하 곁을 지켜. 네 하찮은 목숨은 거기다 쓰라고 여태껏 살려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