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기 싸움
말리파의 도움으로 나는 하루하루 빠르게 몸을 회복해갔다. 가장 보고 싶은 오빠와 새언니는 아직 감금령이 풀리지 않아 만나지 못했지만 투렌 남작 부인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았다.
새언니의 편지 곳곳엔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실비아는 자기 때문에 내가 독을 마신 거라며 자책했다. 아무리 괜찮다고 답장해도 실비아는 늘 사과와 미안함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가족들만큼이나 내 걱정을 많이 했던 몰리와 친구들도 만났다. 로제와 슈리는 문 앞에서부터 통곡을 하면서 들어왔다. 둘이서 얼마나 울던지 헤어질 때쯤엔 환자인 나보다 얼굴이 더 퉁퉁 부어올랐다.
몰리는 내가 의식을 회복한 후로 늘 옆에 있어서 이제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눈 뜨고 잠들 때까지 늘 내 걱정을 하느라 넋이 나가 있었다.
‘이제는 나보단 폐하의 건강이 더 걱정인데…….’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나와 달리, 폐하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여전히 의식이 불안정했으며 마비 증상 때문에 말이 어눌하셨다.
때문에 헬리온의 업무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황제 대리로 정무를 돌보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일리드가 처소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었다. 일리드가 자신이 맡았던 업무를 가져간 덕분에 헬리온이 조금이나마 손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에도 그는 나를 보러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문 앞까지 와놓고선 끝내 들어오지 못했다고 했다. 에시가 어서 들어가 보시라 재촉했지만, 일리드는 힘없이 고개를 젓고는 발걸음을 돌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는 무슨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겠지.’
오히려 뻔뻔히 내 얼굴을 볼 수 있는 게 이상한 걸지도 몰랐다. 문득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입은 흰 드레스에 피가 번지던 순간, 그의 눈빛이 무너졌던 것이 생각났다.
‘많이 놀랐겠지. 내가 시에라 휘어튼과 같은 모습이었을 테니.’
하지만 마음을 아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사정을 이해해주고 싶진 않았다. 그 사람이 받은 충격과 상실감은 스스로 견뎌내야 할 무게였다. 내가 어떻게 해줄 수도, 해줘서도 안 될 일이었다.
당분간은 내 건강을 회복하는 데 더 신경을 쏟을 예정이었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은 탓에 기침과 가벼운 몸살 증상이 있었다.
미음을 먹고 낮잠을 청하려고 할 때였다. 애비게일이 몹시 난감한 얼굴로 나를 찾았다.
“공작 부인, 록펠트 공작 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카리나가? 이제 와서 갑자기?
카리나는 내가 의식을 회복하고 나서도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의식이 없었을 때는 약을 들고 왔다던데, 깨어나고 나서는 본 적이 없었다.
반가운 손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계속 밖에 세워 둘 수만은 없었다. 애비게일에게 그녀를 안으로 들이라고 말했다.
곧 요란한 구두 소리와 함께 카리나가 처소 안으로 들어왔다. 못 본 사이에 그녀의 차림은 더욱 화려해졌다. 새로 맞춘 건지 처음 보는 보랏빛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와 몸에 달린 보석들도 전부 새것이었다.
‘내가 황궁의 살림에서 손을 뗐다고 저렇게 사치를 하다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원래 저렇게까지 치장하진 않았는데, 무슨 바람이 들어서 날 보러오는데도 저렇게 화려한지 이해가 안 갔다.
카리나가 의자를 끌고 와 침대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무슨 말을 할까 싶어 조용히 바라보자 카리나가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윈테라 공작 부인은 참 무례하시군요. 깨어났으면 황제 폐하 다음으로 나를 찾아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지? 당혹스러우면서 동시에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잠자코 노려보자 카리나가 더욱 신랄한 목소리로 따졌다.
“황족 다음으로 이 황궁에서 높은 사람이 나 아닙니까? 의식을 회복했으면 마땅히 내게 와서 얼굴을 비추는 게 예의일 텐데요?”
찾아와서 한다는 게 이런 쓸데없는 기 싸움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지금 너랑 말씨름할 기운도 없으니 그딴 말을 계속할 거면 나가라.”
“왜요? 제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예비 황태자비보단 예비 황후가 더 높은 사람인 건 당연한 거잖아요.”
“너도 참 징하구나. 이쯤 되면 지칠 법도 한데. 이제 나한테 괜한 시비를 거는 건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원래도 내게 날이 서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녀는 더욱 악랄했다. 마치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하고 온 사람처럼 눈에 독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정당한 책임을 물으러 온 겁니다. 이거나 좀 보시지요.”
카리나가 명하자 밖에 있던 하녀들이 품 안 가득 서류를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나와 카리나 사이에 놓인 협탁 위에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내일모레까지 전부 끝내주시죠.”
카리나가 팔짱을 낀 채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위에 놓인 서류 몇 장을 살펴보았다. 카리나가 내게서 뺏어간 황실의 업무였다. 지난달부터 밀린 장부와 결재 서류가 가득했다.
“이게 다 뭐지?”
“보면 모르시나요. 당신 때문에 밀린 황궁 업무들이잖아요.”
“그건 아는데 이 일을 왜 나한테 떠넘기냐는 말이다.”
좋다고 가져갈 때는 언제고 이제 다시 일을 돌려준다고? 그것도 하필 내가 아파서 누워있는 데를 굳이 찾아와서? 나를 골탕 먹이려는 심사가 눈에 뻔히 보였다.
“일을 밀린 건 넌데, 왜 나보고 책임지라는 거지?”
“하, 당신 참 뻔뻔하네요. 당신이 자작극을 벌이는 바람에 황제 폐하께서 쓰려지셔서 지금 이 사달이 난 거잖아요! 폐하의 병간호만으로도 하루가 금방 다 가는데 내가 지금 이런 서류 쪼가리나 들여다보고 있게 생겼어요?”
카리나가 버럭 짜증을 내며 내 쪽으로 서류를 밀었다.
“당신이 찾아오면 주려고 한 일이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서 내가 들고 왔네요. 아무튼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까 당신이 다 처리해요.”
그녀가 부채 끝으로 가장 앞에 있는 서류를 쿡 찍었다.
“황후전 개조 건부터 처리해줘요. 앞으로 내가 황후전에서 지낼 거니까. 원하는 물품들은 적어두었으니 대금 치르고 잔금 처리까지 빠짐없이 확인하고요.”
그녀가 가리킨 종이에는 대대적인 공사 비용과 값비싼 품목의 장식물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대로라면 안 그래도 주인 없는 황후전이 필요 이상으로 화려해질 것이다.
“황후전은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그대로 사용하면 될 텐데 왜 쓸데없이 예산을 낭비하는 거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제 곧 제가 새 황후가 될 텐데, 그에 맞게 제 처소가 될 곳을 꾸미는 거죠.”
“카리나!”
“록펠트 공작 부인이라고 해야죠, 이슈텔 리젠트라!”
카리나가 눈을 부릅뜨며 제 작위를 힘주어 말했다.
“자꾸 나를 자기보다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이제는 그러면 안 되지. 나는 당신 시어머니 격이고 당신은 며느리 격 작위인데.”
“넌 절대 황후가 될 수 없어. 폐하께서 널 황후로 만들어 주신대?”
잠시 카리나가 머뭇거리는 사이, 내가 그녀를 노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승하하고 나신 뒤에, 왜 폐하께서 새 황후를 들이시지 않은 줄 알아? 후계 구도 때문이야. 새 황후가 생기면 아들이나 조카에게 물려줘야 할 권력을 황후의 집안과 양분해야 하니까.”
“…….”
“거기다 새 황후에게서 자식이라도 생기면 후계 구도가 완전히 어그러지게 되지. 그럼 리젠트라 가문과의 혼담은? 물론 나와 우리 가문의 눈치를 보느라 황후를 세우겠다는 집안도 없었지. 내가 그만큼 이 황궁에서 중요한 사람이야. 감히 너 따위가 이렇게 무례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듣자 카리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가 반박하려 입을 여는 순간, 내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폐하께 네 쓰임새는 딱 여기까지야. 네가 오를 수 있는 자리도 여기가 끝이고. 그나마 제대로 쓰이지도 못했으니, 이제 곧 그 자리에서 내려올지도 모르겠구나.”
“웃기지 마, 내가 왜 여기서 내려가? 난 죽어서도 내 자리를 지킬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당신 자리 지킬 걱정이나 해요.”
흥분한 카리나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결혼식이 파투났다고 모든 게 다 끝난 줄 아나 본데 아니에요. 결혼식을 망친 거지 혼인이 무효가 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네가 뭘 어쩔 건데? 끝까지 날 일리드와 혼인시키겠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게 당신이 가장 불행해지는 길이니까!”
“아니, 그럴 일 없어. 그러니 헛된 망상 그만하고 나가. 너 같은 거하고 말 섞고 있는 것조차 불쾌하니까.”
나는 그녀에게서 몸을 홱 돌린 채, 다시 침대에 누웠다.
등 뒤로 한참을 씩씩거리는 분에 찬 숨소리가 들렸다. 카리나는 나 들으라는 듯 시끄럽게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누운 나를 내려다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난 폐하를 살펴보러 가야 하니까 이 서류들이나 마무리 지어놔요. 내가 이런 시시콜콜한 일까지 하다가 폐하께 소홀해지면 안 되겠죠?”
반 협박조의 말을 남긴 채, 카리나가 내 처소를 나섰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을 때, 내가 이불을 걷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걸 어떻게 모레까지 다 하라고!”
침대에서 내려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서류들을 주웠다. 급한 순부터 차례로 정리해보니 밀린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냥 하지 말까?’
마음 같아서는 모르는 척하고 싶었지만, 밀린 일들이 워낙 큰일들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내가 손대지 않으면 사치가 더 심해질 거야.’
우선 황후전 개조 건부터 처리해야 할 듯싶었다. 카리나가 제멋대로 집어넣은 예산대로 했다간, 올해 황궁 예산안의 반 이상이 사용될 수순이었다.
‘게다가 폐하의 상태가 그렇게 된 건 내 잘못도 있으니…….’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카리나가 나를 자극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알지만, 마음 깊이 자리한 죄책감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자꾸 말려들면 안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손은 서류의 다음 장을 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