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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107화 (107/160)

107화 : 비빌 언덕

의식이 돌아온 후 바로 본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거절당했다. 말리파는 하루 정도 더 신전에 머물며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고, 헬리온도 동의했다.

잠들어 있던 시간은 스무 날이었다. 전에 예상했던 보름보다 다섯 밤이나 더 지난 후에 깨어난 것이다. 다행히 내가 잠든 사이 행방이 묘연했던 증인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헬리온은 내 곁에 함께 있고 싶어 했지만 해야할 일이 많아 황궁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몸에 다른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고 다음 날 바로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이슈텔?”

“응, 몸에 힘이 좀 없는 것 빼곤 괜찮아.”

나는 헬리온의 부축을 받으며 신전에서 본궁으로 향했다.

나 대신 헬리온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밥도 잘 먹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오빠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우는 걸 멈췄다고 했다. 많이 힘들어하던 새언니도 연락을 받고 안도했다고 들었다.

오빠 부부가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그동안 가문의 일은 율리언이 맡아서 처리했다. 그 이야기를 전하며 헬리온은 에보니 블라딘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에보니 블라딘이 탄 마차가 폭발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그녀가 큰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그쯤되면 범인을 색출할 만도 한데 에보니 쪽에서 범인 수사를 거부했다.

“블라딘 백작 부인이 영지에서 수도로 돌아왔대. 아무래도 어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형제들을 수사하지 않는 건가 싶어.”

헬리온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단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니 에보니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블라딘 백작이 사망한 후, 백작 부인은 에보니에게 가문을 넘기고 영지로 돌아갔다.

백작 부인은 욕심이 많지만 그만큼 노련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식들의 능력으론 공작 위를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으니 그간 에보니를 가주 자리에 두었지만, 이제 때가 됐으니 그녀를 내치려는 심산일 것이다.

‘게다가 백작 부인이 에보니에게 친자 검사라도 요구하는 날엔.’

그러면 에보니의 추락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이 친자 검사를 요구할 확률은 드물었다. 제 친자식보다 하녀의 자식이 뛰어나단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 웬만하면 조용히 처리하는 쪽으로 계속 움직일 것이다.

에보니에게 공작 위를 돌려줄 때 가문의 불화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폭력적인 방법까지 써가면서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내 예상보다 에보니의 고생이 심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슈텔, 아직 몸도 안 좋은데 폐하께는 내일 인사드리지 그래.”

헬리온이 걱정스레 물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께서 혼절하시는 모습을 본 기억 때문에 어젯밤에도 내내 그분 생각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지금은 기력을 많이 회복하셨다고 들었으나 여전히 걱정되는 마음이었다.

“넌 폐하가 밉지도 않아?”

헬리온이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심각하게 말했다.

“난 폐하가 미워. 네가 그런 약을 먹은 것도, 리젠트라 공작 부인에게 그런 누명을 씌운 것도 결국 다 폐하께서 묵인해서 생긴 일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나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나도 폐하가 미웠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런 감정이 있어서 무뎌진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그분이 걱정되었다.

“같이 들어가 줘.”

황제전의 문 앞에 서서 헬리온의 손을 꼭 잡았다. 혼자 들어가기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잠시 후, 하녀장 소피가 나와 헬리온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리나가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을 줄 알았는데 폐하의 곁엔 그녀가 없었다. 대신 다른 하녀들이 폐하를 모시고 있었다.

“폐하, 윈테라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소피의 말에 폐하께서 하녀에게 몸을 일으키라 명하셨다. 천천히 자리에 앉으시고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올리셨다.

“폐하.”

조카들과 닮은 푸른색 눈동자가 많이 탁해지셨다. 아직 몸에 마비 증상이 남아있는 탓에 표정과 몸짓도 평소보다 많이 부자연스러우셨다.

폐하께서 부은 눈으로 나와 헬리온을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헬리온은 어색한 듯 그분의 시선을 피했다. 폐하의 다시 시선이 내게로 고정되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듯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폐하.”

삼촌의 표정을 읽은 헬리온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헬리온이 떠난 후, 폐하께서 손을 들어 내게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조심히 침대 가까이 다가가자 폐하의 수척해진 얼굴이 보였다.

안면 근육이 마비된 탓에 떨리는 입에선 말조차 어눌하게 나왔다. 내 이름을 부르고 싶어하셨지만 어긋난 입술 사이로 발음이 자꾸만 샜다.

절대 울지 않기로 해놓고, 폐하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헬리온의 말대로 나도 폐하가 미웠다. 원망스러운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이런 모습을 마주 보니 눈물이 고일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내가 한 선택을 후회하진 않지만, 나의 최선이 폐하를 이렇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자 폐하께서 힘없이 고개를 저으셨다.

“이슈… 텔…….”

“예, 폐하.”

“미안… 하다…….”

“예……?”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폐하께서 마비 기운이 남아있는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셨다.

“전부… 다…….”

그 한 마디에 내 마음 속에 응어리진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몸에 힘이 풀려 침대 끝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닦아냈다.

폐하께서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사과하듯, 위로하듯. 어색하고 투박하지만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진심이 담긴 손길이었다.

어릴 때는 잘한 일이 있어도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손길이었는데. 이렇게 크고 나서야 이 손길을 받는 것이 가슴 시리도록 서글펐다.

* * *

문 뒤에서 황제와 이슈텔을 지켜보던 카리나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은쟁반 위에 든 유리잔 속 약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소리 없이 황제전을 빠져나온 카리나가 복도에 있던 화분에 약을 부었다. 귀한 약초 물이 초록빛 식물 아래 흙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 유일한 비빌 언덕도 결국 당신의 든든한 뒷산이었나보네.”

황제와 이슈텔 사이에는 깊은 애증이 있다. 서로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고, 미워했던 만큼 사랑했다. 오랜 시간 서로 함께 지내며 쌓아온 그 관계는, 끝내 서로를 외면하지 못할 만큼 강한 유대감이었다.

황제가 오래 살길 바랐다. 그것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최후의 순간이 오면 황제는 자신이 아닌 그 여자의 손을 들어줄 테니까.

처소로 돌아가자 때마침 푸른 인장이 찍힌 편지가 보였다. 카리나는 은쟁반 대신 편지를 들고 다시 황제전으로 향했다.

* * *

“폐하, 이제 윈테라 공작 부인이 의식을 회복했으니 못다 한 일을 마저 해야지요.”

황제의 침대맡에 의자를 끌고온 카리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리드 대공과의 혼사를 마무리 지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남부 대공령에서도 그걸 원하는 것 같던데.”

황제는 멍하니 침대 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반응이 없었다. 애가 탔지만 카리나는 애써 밝은 척 꾸며낸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침착했잖아. 나도 그래야해.’

마음을 가다듬은 카리나가 다시 황제에게 말했다.

“윈테라 공작 부인이 다른 수를 쓰기 전에 어서 빨리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그리고 황후 자리를 제게 주셔야합니다. 그래야 제가 황태후가 되고 일리드 대공의 뒷배가 되어드리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도 황제는 카리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황제가 꿈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편…지……. 편지를… 다오…….”

그 말에 카리나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책상으로 갔다. 볼테로 황자가 보낸 편지를 찾아내 다시 침대맡으로 돌아갔다.

“볼테로 황자께서 보낸 편지입니다. 폐하의 아우님께서 형님의 건강을 심려하는 문장으로 이렇게 편지 한 장을 꽉 채우셨습니다. 다음 장에는 아드님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카리나가 요란하게 부스럭 소리를 내며 편지지 다음 장을 넘겼다.

“비록 블라딘 가문이 다시 공작 위를 회복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리젠트라를 상대하기 어려울 거라고 보신답니다. 게다가 지금 블라딘 공작가는 형제간의 다툼으로 집안 사정이 어지럽지 않습니까? 일리드 대공께 힘이 되어줄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간곡한 목소리로 애원하며, 카리나가 황제의 주름진 손을 꼭 붙잡았다.

“폐하, 이건 저 혼자만의 욕심이 아닙니다. 저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볼테로 황자께서도 제가 황후가 되는 데 찬성하지 않으십니까. 차기 황태자와 미래의 황제를 위한 일이니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그거… 말고…….”

황제가 힘없이 머리를 저었다.

“알렌… 시아……. 내 누이의… 편지…….”

카리나의 입가에서 꾸며낸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부드럽게 휘어있던 눈매는 싸늘해졌고, 생기 넘치던 눈동자의 빛도 흐려졌다.

“누이의… 편지를… 다오…….”

황제가 다시 힘겹게 명했다. 카리나가 황제의 손을 놓았다. 황제의 메마른 손이 침대 위로 툭하고 떨어졌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북부의… 편지를…….”

“마비 탓에 발음이 어눌하셔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카… 리… 나…….”

“밖에 하녀장 있는가. 안으로 들어오라.”

카리나가 황제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하녀장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공작 부인?”

“폐하의 마비 증상이 아직 심하여 대화를 이어 나가기가 힘들다. 나중에 다시 올 터이니 그동안 폐하를 잘 모시고 있으라.”

카리나가 황제에게서 몸을 홱 돌리며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황제전을 나섰다.

이제 단 한 발자국이면 됐다. 공작 부인에서 황후. 손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인데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가질 수가 없었다.

목이 타고 속이 들끓었다. 바로 눈앞에 둔 먹잇감을 놓칠 것만 같아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미칠 것 같았다.

‘역시 당신은 그냥 잠들어 있는 편이 나았어.’

그 여자가 의식을 회복한 탓에 황제의 상태도 이전보다 호전되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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