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단 하나의 이유
“제기랄, 이 빌어먹을 늙은이가!”
도망치듯 말리파의 탑을 빠져나온 카리나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사람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고 들었으나, 잊고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 놓을 줄은 몰랐다.
애써 묻어두었던 기억. 이제는 서글픈 감정만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그 시절의 모습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이 날의 마음을 잊지 마. 지금 네가 떠올려야 할 가장 중요한 기억이니까.」
“무슨 마음? 내가 뭘 떠올려야 하는데!”
귓가에 맴도는 말리파의 말에 따지듯 소리쳤다. 황궁 복도에 그 미친 노파는 없지만 이렇게 소리라도 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았다.
‘대체 뭘 잊지 말라는 거야. 비참했던 과거? 돈밖에 모르던 메마른 시절? 그것도 아니면 언감생심 쳐다도 못 볼 정도로 차이 났던 나와 그 여자의 어린 시절?’
몸이 휘청하는 바람에 카리나가 돌기둥을 잡고 기댔다. 말리파가 끄집어낸 기억이 자꾸만 잔상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앞에서 놀란 하녀들이 다가오는 모습조차 흐려졌다.
황금빛 장미 목걸이를 들고 그녀를 찾아갔을 때,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녀와의 관계가 어린 시절 꿈꾸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할 거란 걸.
그래도 아주 조금은 기대했다. 언젠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을 보며 그때처럼 다시 한번 미소 지어주길.
하지만…….
“너무 멀리 돌아왔잖아! 이젠 돌아갈 수 없다고!”
애써 쌓아올린 탑이 기울어졌단 걸 알아채도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이만큼까지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모와 모욕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모든 걸 돌려놓으라고?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제 손으로 쌓은 공든 탑을 부술 수는 없었다. 그 시절과 같은 밑바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걸음을 멈춰선 카리나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악을 썼다. 맞은편에서 오던 하녀들이 놀라 몸을 움찔했다. 하녀 하나가 용기 내 다가가 괜찮으시냐고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꺼지라는 악다구니였다.
‘날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쿵쾅거리며 뛰던 심장도 천천히 평소대로 돌아왔다. 손을 들어 뿌옇게 흐려진 눈을 비볐다. 이제야 다시 시야가 또렷해졌다.
지나친 자기 합리화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어지러운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남들의 이해를 구할 생각 따윈 없었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카리나가 마로니에 의자에 털썩 앉았다. 책상 서랍을 열자 편지가 보였다. 남부 대공령에서 온 푸른 인장이 찍힌 편지였다. 며칠 간 정신이 없어 답장을 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미루지 않고 편지를 쓸 생각이었다.
[친애하는 볼테로 선대공께.]
깃펜에 검은 잉크를 묻혀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얼마 전부터 남들의 눈을 피해 볼테로 황자와 연락을 하고 있었다. 알렌시아 황녀의 편지가 황제에게 전해지는 것을 막아준 대가로 제 편이 되어 달라 할 셈이었다.
[황제 폐하의 병환이 날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깨어나신다고 해도, 이젠 정말로 폐하께서 승하하고 나신 다음의 일을 대비해야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능력있는 황태자?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선 일리드가 황태자가 되어야 했다.
헬리온, 그는 절대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그에게 잡혔던 턱과 목이 얼얼했다.
[이 일에 대해 아드님과 상의하고 싶지만 도무지 처소 밖으로 나오시질 않아 대신 선대공께 편지를 드립니다.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나면 일리드 대공께서 황태자가 되실 수 있게 미리 손을 써둘 테니, 부디 제게-]
손에 힘을 너무 세게 쥔 탓에 툭하는 소리와 함께 펜촉이 부러졌다. 그 바람에 글씨가 편지지 밖으로 삐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화낼 일이 아닌데, 그저 새 펜을 쓰면 되는 일인데 그게 너무 화가 나서 종이를 마구 찢어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새 종이를 꺼내 다시 편지를 써내려 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자님을 황제의 아버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 전에 부디 제가 황후가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번에는 펜촉이 부러지지 않았다. 대신 말리파의 탑에서 나올 때부터 참아왔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주르륵 흘렀다. 떨어진 눈물이 편지 위로 떨어져 잉크가 번졌다.
“괜찮아. 아직 기회는 있어. 내가 황후만 되면 모든 게 해결 돼.”
어렵게 쓴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으며 카리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말리파가 틀렸다. 자신이 생각해야하는 건 지나간 과거가 아닌 앞으로 만들어갈 미래였다.
* * *
「이슈텔.」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떠올렸다. 주변은 고요했다. 꼭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처럼 공허한 기분이었다.
언제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아, 그래. 욕조에 담긴 물에 들어가 머리끝까지 몸을 담그었을 때와 비슷했다.
물방울 소리와 함께 무거운 정적이 음악처럼 흘렀다. 마치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느낌이었다.
「이슈텔.」
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프리모스였다. 어린 시절, 함께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프리모스가 내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나는 얼른 그 애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프리모스를 따라간 곳엔 그리운 얼굴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한 명도 빠짐없이 있었다.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엄마와 아빠였다. 너무 오래돼서 이제 기억조차 안 나는 얼굴이었지만 느낌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엄마 아빠 품에 안겨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엔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두 분의 모습은 부모님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였다. 이번엔 할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잠시 후,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황후 폐하의 모습이 보였다. 내 기억에 남은 마지막 모습과 달리, 아프지 않고 건강한 모습이셨다.
황후 폐하께서 내 손을 잡고 기다란 식탁으로 가셨다. 그리고는 나를 프리모스의 옆에 앉히셨다. 황후 폐하와 가족들도 전부 식탁에 둘러앉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행복했다. 이 순간이 영원히 깨지 않기를 바랄 만큼 벅차오르게 기뻤다.
「이슈텔.」
프리모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때, 다시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프리모스는 입을 떼지 않았는데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이상했다. 나는 이렇게 컸는데, 프리모스는 아직 어렸다. 나는 이만큼 나이를 먹었는데, 엄마와 아빠는 너무도 젊었다.
그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그래, 이런 행복한 순간은 다신 돌아오지 않아.’
이 행복이 거짓이었다는 생각에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눈물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대신 방울져 위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의자와 식탁, 그 위의 음식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모든 것이 물에 잠긴 것처럼 넘실거리며 움직였다. 잠시 들리지 않았던 물방울 소리도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온몸을 감싸는 부유감을 느끼며,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 꿈을 꾼 게 처음이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매번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면 다시 이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 서서 망설이게 된다. 나는 결국 선택을 내리지 못했고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반복된다. 떠올랐던 몸은 깊은 물 아래로 가라앉고, 프리모스가 나를 데리러 올 것이다.
「이슈텔. 이슈텔.」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크게 들렸다. 비통함과 애절함이 느껴지는 흐느낌에 더 가까웠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꿈으로 눈앞에 펼쳐졌을 때, 유일하게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
헬리온. 헬리온만이 나타나지 않았다.
날 부르는 목소리도 헬리온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희미하게만 들려 알아채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망설여졌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행복해질 수 있을텐데. 그런 생각이 자꾸만 나를 유혹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뜬다면,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다시 슬픔만이 남은 그곳으로 돌아가야하는 걸까.
헬리온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떨려왔다. 황제 폐하와 일리드가 그를 괴롭히는 건 아닐까. 이제 내가 없으니 중간에서 막아줄 사람도 없었다. 이 기회에 그를 황궁에서 쫓아내려고 할지도 몰랐다.
‘헬리온한테는 내가 필요해.’
그리고 나 역시 헬리온이 필요했다. 이곳을 떠나야 하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언제까지고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꿈속에서 살 수만은 없었다. 외면하고 싶더라도 이제는 현실로 깨어날 시간이었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깊은 숨을 내쉬자 코와 입에서 기포처럼 방울이 올라왔다.
“헬리온.”
그의 이름을 부르며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수면 위로 끌어당겼다.
* * *
“이슈텔, 정신이 들어? 이슈텔!”
흐릿한 시야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헬리온이 내 손을 꽉 잡은 채, 다급하게 주변 사람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대신관과 궁의를 불러와라, 빨리!”
보조 신관들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문밖을 나섰다. 뒤이어 방 안 가득 말리파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깨어났네. 예정일보다 늦었다고, 공녀님.”
가볍게 타박을 하고선 말리파가 헬리온에게 귓속말을 했다. 헬리온이 천천히 내 윗몸을 일으켰다. 그가 말리파에게서 건네받은 약물을 내 입에 넣어주었다.
입 안에 있을 땐 미지근했던 약이 목을 타고 들어가면서부터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화한 느낌과 동시에 흐릿했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졌다. 감기에 걸린 것처럼 답답했던 목이 편해지면서 입술 끝에 맴돌던 말이 나왔다.
“헬… 리온…….”
힘없는 손을 들어 헬리온의 뺨을 어루만졌다. 행복한 꿈을 등지고 차가운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
헬리온이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서로를 품에 안은 채, 한참을 눈물만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