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재회
원래 나는 꿈이나 목표 같은 것들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버거운 이에게 그런 것들은 사치였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해준 이후, 내 마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일자리가 필요하면 나를 찾아와.」
흘러 지나가듯 한 말이라도 좋았다. 당신의 곁에 함께 서고 싶었다. 조그만 약재상에만 머물러 있던 미래가 서서히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때부터는 그저 출석하는 데 의의를 두었던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질문도 많이 했고 대충했던 숙제도 꼼꼼히 확인했다.
그저 그런 약제사가 아닌, 당신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태어나서 처음 가져본 꿈이었다.
남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받은 푼돈을 모아 당신이 그려진 목걸이를 샀다. 내겐 그게 그 어떤 값비싼 보석보다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당신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 구휼 오는 날이면 꼭 광장에 나가 줄을 섰다. 하지만 얼굴은 언제나 모자로 가렸다. 당신한테는 꼭 성공해서 예전보다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언니는 당신에게 구휼 받는 걸 참 싫어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이유를 잘 알지만, 그때 난 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 같이 어려운 처지에 구휼 좀 받는 게 뭐 그리 흠이라고.’
언니가 핀잔을 줄 때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툴툴댔다.
이유 없이 남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닌데, 당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언니의 표정은 몹시 어두워졌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된 후로는 나도 언니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약제사 시험에 통과했다. 나를 찾아와 함께 일하자는 의사도 많았고, 약재상에 일자리를 주겠다고 와달라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를 전부 거절했다. 내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으니까.
황궁 약제사가 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자리이기 때문이다.
약제사 자격증을 따고 나서도 삼 년에 한 번 있는 황궁 약제사 시험을 치르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내 꿈은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만나며 좌절되고 말았다.
“아니, 글쎄. 황궁 약제사가 되려면 성씨가 있어야 한다니까.”
시험 접수인이 원서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너는 지금 서류에 이름밖에 없잖아. 관공서에 가서 신원 조사를 받은 다음에 아무 성이라도 임의로 받아와. 그래야 시험을 치를 수 있어.”
정말이지, 성이 없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했다. 이전에도 수차례 성을 만들러 가자고 했지만 언니는 나중에 하자며 번번이 조사를 미루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성 없이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 길로 수도 관공서로 가 신분 조사를 받았다.
성이 없는 사람들은 신원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지명 수배자나 반역자의 후손이 아닌지 철저하게 조사를 받았다. 나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도 없고 들은 바도 없어서 별로 증언할 것이 없었다.
나를 담당한 조사관도 서류에 별다른 정보를 기입하지 않았다. 다만 내 얼굴을 훑어보고는 ‘황금빛 눈동자’라는 짧은 메모를 남겼다.
“나 신원 조사받고 왔어.”
그 말 한 마디가 몰고 온 파장은 엄청났다. 태어나서 언니가 그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사색이 된 언니는 그 길로 바로 내가 낸 서류를 취소하러 갔다.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소리를 질러도 무조건 안 된다는 말로 일관했다. 집을 나갈 거라고 협박했더니 차라리 그러라고 했다.
그렇게 집을 나온 건 순전히 객기였다. 언니가 너무 미웠다. 태어나서 처음 가져본 꿈을 응원해주진 못할망정 망쳐 놓은 언니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싫었다.
결국 갈 곳이 없어 수도 근처에 약재상을 전전하며 다녔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가로 싼값에 일을 해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모은 돈으로 아무 평민 집안에 양녀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신원 조사를 받지 않고 성을 얻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나는 황궁에 들어갈 수 있을 거고, 늦게나마 언니와도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계획을 비웃듯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반년 만에 다시 만난 언니는 차가운 시신이 되어있었다.
‘왜……? 대체 왜……?’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왜 세상은 우리한테만 가혹한 거야? 우리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풀리지 않는 의문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나를 괴롭게 했다.
언니의 광대 친구들은 슬퍼하며 늦지 않게 장례를 치르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대신 나는 지금까지 모아둔 돈과 주변 사람들에게 빌린 돈으로 시신을 부검했다.
그렇게 나온 시신 부검 결과와 광대들의 증언. 모든 걸 종합해 본 결과 언니가 실란다 백작에게 살해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언니에게 더 신경 써주지 못했을까. 그깟 자존심 좀 버리고 한 번이라도 언니를 만나러 갔다면 이렇게까지 허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때늦은 후회가 밀려가고 난 자리엔 타는 복수심만이 남았다.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언니가 낳은 아이를 돌려받아야 했다.
하지만 당장 내게 그럴 힘은 없었다. 게다가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나까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마음만 앞서고 이렇다 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하는 언니가 죽었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가해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복하게 사는데, 왜 그들의 몫일 불행까지 내가 짊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후회와 무력감으로 잠식되는 나날을 보내다 우연히 언니가 숨겨둔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낡은 금빛 목걸이도.
거기 적혀있던 건 오랫동안 숨겨온 가족의 비밀이었다. 나 같은 하층민들도 들어본 리젠트라 공작가의 내전. 그 전쟁을 일으킨 욕심 많고 간악한 족속들의 피가 내게 흐른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핏줄을 저주했다. 왜 되지도 않는 욕심을 부려서 우리까지 이렇게 비참하게 살게 만들었냐고 원망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이야기였다. 내 안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 유리처럼 부서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당신은 나의 꿈이었다. 이루고 싶고 가까이 가고 싶은 단 하나의 꿈.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 날은, 언니가 죽은 날만큼이나 슬펐다. 이젠 그 꿈을 품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차피 부서진 꿈은 다시 이어붙일 수 없으니, 복수라도 제대로 이뤄내야 했다.
그래서 황궁으로 가기로 했다. 어떻게든 황제에게 접근해 힘을 빌려 복수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쉽게 될 줄 알았던 황궁 하녀는 지원자가 많아 내 차례까지 오려면 무려 삼 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삼 년은 무척 긴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실란다 백작이 그나마 남아있는 증거들을 전부 인멸할 수도 있고, 늙은 황제가 세상을 떠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언니가 죽은 후로도 꽤 시간이 흘렀다.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절대 일을 그르쳐선 안 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당신을 찾아가야 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닌, 복수를 위해서.
황궁으로 가기 전, 황금빛 장미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처음에는 분명 같은 목걸이였을 텐데, 당신의 것과 내 것은 너무나도 달랐다.
곳곳에 남은 세월의 흔적과 낡은 목걸이 줄. 지금 내 모습만큼이나 초라했다. 앞으로 이 목걸이가 나를 빛나게 해줄지, 아니면 내 목을 조여 올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황궁 문 앞으로 가 몇 날 며칠을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서 버텼다. 처음에는 돌아가라고 하던 병사들도 내 고집에 혀를 내두르고는 결국 당신을 데려와 주었다.
긴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사이 당신도 나만큼 많은 일을 겪었던 걸까. 내 기억 속의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딱딱한 표정과 차가운 눈빛, 그리고 경계하는 태도. 날 보는 얼굴에서 어린 시절의 따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당신을 다시 만나고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게.
“윈테라 공작 부인이시다. 예를 갖추어라!”
내가 멍하니 감상에 잠겨있자, 보다 못한 호위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후, 당신에게 인사했다.
“공작 부인께 인사드립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처음, 처음이라……. 그 말이 못내 아쉬웠다. 내게는 손꼽아 기다렸던 재회의 순간이, 당신에겐 낯선 첫 만남이라는 게.
‘나는 늘 당신을 잊지 않았는데, 당신은 날 까맣게 잊고 지냈구나.’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은 세상사람 모두가 우러러보는 예비 황태자비고, 나는 제힘으론 하녀 자리조차 못 얻는 하층민이니까.
“이거면 설명이 되겠습니까?”
입 안을 맴도는 씁쓸한 감정을 삼키며 품 안에 숨겨둔 목걸이를 내밀었다.
당신의 목에 걸린 것과 같은 황금빛 장미 목걸이. 그것을 확인하자 당신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래,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겠구나.’
우리의 운명이 이렇게 고약하게 꼬인 이상, 당신이 내게 그때와 같은 미소를 지어주는 일은 없겠지.
내가 목표에 다가가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당신은 나를 더욱 미워하게 될 것이다. 나를 황궁에 들인 이 순간의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할 만큼.
황궁에 오기 전에 각오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복수를 완성하겠다고. 그러기 위해선 내 안에 남은 당신에 대한 좋은 기억을 지워야했다.
당신을 이용하고 거짓말을 하고 가여운 척 동정심을 끌어내야 했다. 그래야 이 황궁에서 머물 수 있으니까.
복수를 완성하는 날이 반드시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은 그날이 느리게 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 하루하루를 천천히 보내다 보면. 그 가운데 어느 한 순간만큼은 당신이 나를 봐주는 날이 있진 않을까.
처음 만난 그 날처럼, 날 향해 미소 지어주는 순간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