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잠든 사이(3)
귓가를 파고드는 서늘한 음성에 카리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무슨 편지인지는 모르겠으나 전 그런 적 없습니다.”
“거짓말. 남부에서 손쓸까 봐 일부러 폐하께 직접 전하기로 한 서찰이야. 그런데 그게 중간에서 없어져? 넌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황제전 출입이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잖아. 네가 손쓴 게 뻔하지.”
“…….”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이 목을 비틀고 싶지만, 황제 폐하께서 사랑하시니 그렇게까진 하지 않겠습니다, 공작 부인.”
헬리온이 카리나의 목을 잡은 손에 천천히 힘을 풀었다.
“록펠트 공작 부인. 그래, 아주 좋은 자리지. 하지만 내가 가진 자리와 앞으로 가질 자리엔 견주지 못해. 그러니 부디 그 목 간수 잘하세요.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모르니.”
헬리온은 카리나를 스쳐지나 신전을 빠져나갔다. 카리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자, 겨우 다잡고 있던 손이 떨리며 은쟁반 위의 컵도 흔들렸다.
‘빌어먹을 자식. 재수 없게.’
헬리온에게 잡혔던 턱과 목 뒤가 얼얼했다. 목소리에 담긴 살기 때문에 더 긴장했던 것 같다.
헬리온이 그랬듯, 카리나 역시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가 더 싫어졌다.
‘왜 저 자식은 그 여자를 도구로 보지 않는 거야?’
자신의 언니는 연인에게 속아 철저히 이용당한 후 버려졌다. 자신 또한 황제의 권력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사랑이란 감정이 있다 한들 결론은 역시 같았다. 일리드 대공도 결국 이슈텔 리젠트라를 황태자 자리에 필요한 도구로 여겼으니까.
하지만 헬리온은 달랐다. 그에게 그녀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사랑을 잘 모르는 자신이 보기에도 쉽게 변치 않을 마음 같았다.
‘불공평하네. 이 세상 무엇 하나 그 여자 것이 아닌 게 없어.’
카리나는 다시 말리파의 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카리나가 이슈텔의 약을 만들게 된 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순전히 말리파의 요구 때문이었다.
이슈텔 리젠트라를 전담하는 말리파에게, 황제 대리인 헬리온은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말리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리나에게 기력 회복에 좋은 약물 제조를 부탁했다.
이러다 이슈텔 리젠트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이 책임을 물게 될 터였다. 하지만 요청을 거부할 명분이 없기에 카리나는 매일 억지로 정성스레 약을 달였다.
말리파의 방으로 들어서자 천둥처럼 요란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이슈텔 리젠트라는 커다란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소음은 흔들의자에서 잠든 말리파에게서 나고 있었다.
“내가 뭔 짓을 할 줄 알고 이렇게 태평한지.”
카리나가 말리파 옆에 있는 테이블에 은쟁반을 내려놓았다. 말리파는 여전히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의자를 끌고 온 카리나가 이슈텔 옆에 앉았다. 그녀를 꽤 오래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잠든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평온한 표정이었다. 늘 자신을 경계하고 곁을 내주지 않는 그녀였기에, 이런 얼굴을 보는 게 조금은 낯설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동경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녀를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느린 호흡 하나조차도 자신의 일그러진 마음을 반사시키는 거울 같았다. 그래서 계속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지만. 당신이 이렇게 된 거, 썩 나쁘지만은 않아.”
카리나는 이슈텔이 잠든 지난 십여 일간을 떠올려보았다.
이슈텔 리젠트라는 결혼식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리젠트라 공작 부인은 혐의를 다 벗지 못해 자택 감금 중이었고, 에보니 블라딘은 집안싸움으로 정신이 없었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세 여인이 힘을 쓰지 못하는 가운데, 권력은 자연스레 카리나에게 돌아갔다.
결혼식에 참석했던 귀부인들이 가장 먼저 카리나에게 치근댔다. 그들은 모두 이슈텔 리젠트라가 깨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일련의 우연들이 겹친 결과, 카리나는 권력의 단맛을 보게 되었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신전으로 옮겨지고 황궁에서 가장 높은 여인은 카리나가 되었다. 귀부인들은 물론, 평소 카리나를 묘하게 무시하던 하녀들도 모두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도 그녀를 욕하지 못했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살아날 가망이 없어보이자 모두들 재빨리 다음 권력을 향해 눈을 돌린 것이다.
“당신만 없으면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반역자의 핏줄이라고 무시하지도 못할 거고.”
잠든 이슈텔을 보며 카리나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란 존재 자체가 나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어. 늘 나를 살게 하면서 동시에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만들잖아.”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주는 달콤함을 놓치긴 싫었다.
황제 대리에 불과한 헬리온은 절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 악연이 겹친 리젠트라 공작부부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에보니 블라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행복한 이는 자신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지금껏 이 황궁에서 불행했던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으니까.
“차라리 이대로 당신이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이 모습 그대로.”
그러면 그나마 공평해질 것 같았다. 유복한 집안, 사랑 넘치는 가족, 재미있는 친구들, 그리고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연인까지.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왔으니 이 정도 불행은 감당해야하는 거 아닌가. 심지어 그녀가 이렇게 된 건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이 상황에 자신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것이었다.
‘아니, 정말 없는 걸까?’
입술을 깨물던 카리나의 눈에서 투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무리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고, 선택을 합리화해도 넘지 못하는 산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나를 살려주었다.’
‘나는 그녀가 깨어나지 않길 바란다.’
이 모순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카리나는 겉잡을 수 없는 감정의 늪에 빠지는 심정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는 것도 견딜 수 없이 아팠다. 하지만 자기 안의 마음이 스스로를 좀먹는 것은 더 아팠다.
“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데 울고 있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카리나가 재빨리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고 보니 어느 틈엔가 코 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카리나는 말리파의 시선을 피했다.
“약은 테이블에다 뒀어. 그만 가볼게.”
“아니아니, 그냥가면 심심하지. 잠깐 앉았다가 가.”
말리파가 옷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카리나는 도로 의자에 앉았다. 사실 황궁에 돌아가도 크게 즐거운 일은 없었다. 의식이 왔다갔다하는 황제를 돌보는 일도 슬슬 지쳐가는 중이었다. 차라리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 왜 내 환자한테 깨어나지 말라고 악담했어?”
말리파가 팔짱을 낀 채 안경 너머로 카리나를 응시했다. 카리나가 바닥에 있던 시선을 들어 말리파를 보았다. 싸우자며 따지는 얼굴은 아니었고 정말 궁금해서 묻는 듯했다.
“당신, 남의 기억을 볼 수 있다는 게 사실이야?”
“음, 내 질문은 그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맞긴 맞아. 그건 왜?”
“그럼 직접 확인해 보던가.”
카리나가 말리파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리파가 잔주름 잡힌 입술을 말아 올리며 씩 웃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직접 자신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오랜만이라 말리파의 표정이 즐거워졌다.
카리나의 손을 잡은 말리파가 눈을 감았다. 손이 닿은 내내 노파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렇게 십여 분쯤 흘렀을 때, 말리파가 카리나의 손을 내려놓았다.
“보통 사람들은 나한테 손 안 내밀어. 소름 끼친다 그러면서 피하거든. 그런데 아주 가끔 너같이 먼저 손을 내미는 자들이 있어. 어떤 사람들인 줄 알아?”
그런 걸 알 리 없는 카리나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힘들어서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 그런데 그 사람들도 계속 보다 보니까 두 부류로 나누어지더라. 대부분은 정말 누가 봐도 딱하고 힘든 사람들이라 마음이 안 좋은데, 가끔가다 ‘불쌍한 나’에 취한 사람들이 있어. 지금 너처럼.”
순간 카리나의 눈이 차갑게 돌변했다. 기분이 확 상했다. 말리파의 말대로 마음이 힘들어서 위로받고 싶었는데 난데없이 뺨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너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불쌍하고 가엾겠지. 그걸 무기로 그 자리까지 올라갔으니까. 근데 양심이 있다면 이제는 그러면 안 되지. 공작 부인 작위까지 받아놓고선.”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넌 공녀님이랑 같은 위치에 올라도 하나도 행복하지 않잖아. 그래서 이젠 더 올라갈 곳도 없으니 작전을 바꾸는 거 아냐? 공녀님을 아래로 끌어내리려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카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녀님은 네 입장에서 생각하지만, 너는 한 번도 공녀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 없지?”
“내가 왜 높은 사람 생각을 해줘야 해? 쥐가 고양이를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 고양이 또한 쥐를 이해해줄 이유가 없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말이지. 그리고 이제 너 쥐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네.”
말리파가 카리나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자꾸 그렇게 과거에 얽매여 살지 마. 너한테 좋을 거 하나 없어. 할머니가 해주는 조언이다 생각하고 들어. 잔소리라고 하면 어쩔 수 없다만.”
카리나는 언짢다 못해 심한 불쾌감까지 느꼈다. 기억을 읽는다고 하기에 뭔가 편이 되어줄 줄 알았건만 기분만 이상해졌다.
짜증이 밀려온 카리나가 어깨 위의 숄을 고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는 나 부르지 마. 약도 당신이 알아서 챙겨 먹여.”
의자에서 일어난 카리나가 말리파를 쏘아보았다. 문을 향해 나서려는 순간, 말리파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카리나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이 날의 마음을 잊지 마. 지금 네가 떠올려야 할 가장 중요한 기억이니까.”
노파의 손끝이 이마를 건드리는 순간, 카리나는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통증이었다.
의자에 주저앉듯 쓰러진 채, 카리나는 밀려오는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