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잠든 사이(2)
헬리온은 이슈텔이 의식을 잃기 전,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안하다는 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남길 말은 아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이슈텔이 계획한 일이었다는 것을.
“미안해. 너한테 잔인하다고 했던 말.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아무리 화가 나고 답답해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슈텔에게 했던 말이 도리어 제 가슴을 찌르는 가시가 되어 돌아왔다.
멍청하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모든 순간에 가장 힘들고 아팠을 사람은 당사자인 이슈텔일 텐데.
그녀를 끝까지 믿어줬어야 했다. 하지만 도리어 자신은 그녀를 슬프게 하는 말들만 내뱉었다.
“내가 좀 더 냉정했어야 했어. 널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땐 내가 어떻게 됐었나 봐. 너무 어렵게 얻은 네 마음이라, 조금이라도 놓칠 거 같으면 미칠 것같이 불안해져서.”
“…….”
“그런데 지금은 그때 느낀 불안과 슬픔이 전부 부질없이 느껴져. 그냥 너만 다시 깨어나면 더는 바랄 게 없을 거 같아.”
헬리온이 잠든 이슈텔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지친 눈을 감았다. 가슴께 내려앉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걸어 쓸어내렸다.
이렇게 어린 시절처럼 그녀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황태자보다 나를 더 좋아해 달라고, 항상 나를 일등으로 챙겨달라고 떼를 썼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러면 이슈텔은 처음에는 귀찮아하다가도 못 이기는 척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등을 토닥이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던 따뜻한 손길이 그리웠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은 따뜻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차가운 손끝과 냉기만 겨우 가신 몸. 품 안 가득 안아도 여윈 몸이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끌어안는 듯 허무한 기분이었다.
그 느낌이 미치도록 싫었다. 깊은 잠에 든 그녀는 품에 안고 있어도 함께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헬리온이 침대 위로 올라가 이슈텔 옆에 누웠다. 바로 누운 그녀의 옆얼굴을 보며 품 안 가득 그녀를 끌어안았다.
고요한 적막과 짙은 향초 연기 아래서 헬리온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슈텔 옆에서 잠들면 지금 그녀가 꾸는 꿈을 함께 꿀 수 있을지 궁금했다.
지난 십여 일간 헬리온도 몹시 지친 상태였다. 곧 그도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이제 그만 일어나실까요, 왕자님?”
누군가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바람에 헬리온이 천천히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이 방의 주인이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리파? 언제부터 와있었지?”
“아까 전하께서 공녀님한테 미안하다고 고해성사하시는 것도 다 들었는데요.”
“다 보고 있었으면서 왜 아무 말 안 했어?”
“원래 자는 사람 깨우는 거 아니잖아요.”
말리파가 안경을 고쳐 쓰며 꺼진 향초에 불을 붙였다. 비몽사몽 하던 헬리온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머리가 아픈 듯 의자에 앉아서도 이마를 짚었다.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왜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세요?”
“정말로 악몽을 꿨으니까.”
“오, 무슨 꿈인지 들어나 볼까요?”
말리파가 흔들의자에 앉으며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헬리온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이슈텔이랑 같이 풍등 축제를 보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로 돌아간 꿈을 꿨어.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둘 다 차가운 강물에 빠졌지. 내가 먼저 올라와서 배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이슈텔을 물 위로 끌어 올리려고 했는데…….”
“했는데?”
“이슈텔이 올라오질 못해. 어두운 강물 아래로 빨려 들어가버렸어. 내가 손을 뻗어도 잡질 못하고 계속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어. 아무리 울면서 이름을 불러도 돌아오질 않아.”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손을 놓았어요?”
“아니, 나도 같이 물속에 빨려 들어갔어. 그러다가 깨버렸어.”
“음, 확실히 좋은 꿈은 아니네요.”
말리파가 의자를 앞뒤로 흔들며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헬리온이 이슈텔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물었다.
“이슈텔도 그런 악몽을 꾸고 있을까?”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게 무서운 꿈은 아닐 거예요. 예전에 그 약을 먹어본 사람이 말하길 달콤한 악몽이라고 하더라고요.”
“달콤한 악몽? 그런 게 어딨어.”
헬리온이 눈살을 찌푸리자 말리파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진짜예요. 꿈속에서 그리운 얼굴들을 봤다고 했어요. 꿈을 꿀 때는 행복했지만, 깨어나서 보니 빠져나오기 힘든 악몽이라고 했지요. 아마 공녀님도 그런 거 비슷한 꿈을 꾸지 않을까 싶은데…….”
이슈텔이 몇 날 며칠째 그런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걸까. 깨어나지도 못한 채? 그 생각을 하니 헬리온의 마음이 찌르르 아파왔다.
“이슈텔은 언제 깨어날까?”
“글쎄요,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으니 깨어나셔도 될 텐데. 저는 열심히 깨우고 있는데 공녀님이 묵묵부답이네요.”
“그게 무슨 말이야? 꼭 이슈텔이 깨어날 수 있는데 안 그런다는 것처럼 말하네.”
“바로 맞히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말리파가 흔들의자에서 내려와 이슈텔 곁으로 갔다. 그녀는 주름진 손을 뻗어 이슈텔의 희고 고운 손을 잡고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근래 들어 공녀님한테 행복한 기억이 거의 없어요. 오랫동안 곁에서 보필한 황제 폐하와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고, 반역자의 후손은 살려줬더니 은혜를 모르고 자기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말리파가 이슈텔의 손을 꼭 잡으며 끌끌 혀를 찼다. 헬리온은 그 말에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그럼 나는 이슈텔에게 살아갈 이유가 되지 않는 거야? 나 하나만 보고는 세상을 살아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거잖아.”
상실감과 함께 슬픔과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자신은 그녀 하나만을 보고 북부에서 수도로 내려왔다. 삼촌인 황제에게 차갑게 외면받고, 동경했던 사촌 형과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돼도 그녀만 있다면 전부 견딜 수 있었다.
“나도 이슈텔의 이유가 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아쉬움도 크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이유가 되고 싶었다. 전부가 되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그러하듯이. 이슈텔이 깨어날 수만 있다면 다른 건 바라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면서 자꾸 더 많은 것이 욕심났다.
“지금 이 정도인 것도 다 대공 전하 덕분이에요. 그러니까 자주 오세요, 공녀님이 보고 싶어 하실 겁니다. 강해 보여도 마음에 상처가 가득한 사람이더군요. 그나마 전하께서 있어서 이 정도 버티시는 것 같아요.”
말리파가 이슈텔의 손을 몸 위에 포개 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리파에게 부탁했다.
“잘 돌봐줘. 시간 내서 자주 올 테니까.”
헬리온은 허리를 숙여 이슈텔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말리파의 방을 나왔다.
* * *
말리파의 탑을 나와 신전 본관으로 향하던 헬리온이 걸음을 멈추었다. 멀리서부터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보아도 반갑지 않은 얼굴, 카리나 리젠트라였다. 그녀는 손에 은쟁반을 든 채 말리파의 탑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공 전하.”
카리나가 고개를 숙이며 헬리온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표정 역시 밝지만은 않았다. 헬리온의 시선이 은쟁반으로 향했다. 그 위에는 진녹색 약이 든 잔이 놓여있었다.
“어디로 가는 중이지?”
“말리파 신관의 탑으로 가는 길입니다.”
“아직 폐하께서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셨으니 이런 명을 내리셨을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네가 자발적으로 약을 갖다 바칠 리는 없고.”
“말리파 신관의 부탁입니다.”
“뭘 믿고 너한테 그런 부탁을 해?”
헬리온이 카리나의 뒤를 따르던 신관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카리나가 제조한 약에 독성분이 없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여자와 할 말이 있으니 잠시 물러나 있어라.”
헬리온의 명령에 신관들이 재빨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카리나는 제 앞에선 헬리온의 시선을 피한 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자세는 꼿꼿했으며 쟁반을 쥔 양손에 작은 떨림조차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헬리온은 그녀가 참으로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반성은커녕 죄책감 하나 없는 무감정한 얼굴이 헬리온의 분노를 자극했다.
“나는 처음부터 네가 마음에 안 들었어. 언제고 한번 문제를 일으킬 줄 알았지. 이렇게 큰일을 벌일 줄은 미처 몰랐지만.”
헬리온이 카리나의 턱 끝을 잡아 올렸다. 이 뻔뻔한 여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여 카리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살폈다.
악명 높은 황금빛 눈동자. 허리까지 오는 은빛 머리카락. 화려한 이목구비와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모습은 신전의 엄숙함과 몹시 대조됐다.
이슈텔과 피가 섞인 사이라 해서 자세히 보았지만, 보면 볼수록 그녀와 닮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널 처음 봤던 날, 그냥 총으로 널 쐈어야 했어. 이슈텔이 말리지 않았으면 정말 그러고도 남았을 텐데. 그럼 오늘 같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무엄합니다, 이 손 놓으시지요. 저는 폐하께서 아끼시는 사람입니다.”
딴 곳을 보던 카리나가 눈을 부릅뜨며 헬리온을 노려보았다. 헬리온이 헛웃음을 지으며 보란 듯이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무엄? 작위에 비해 예법이 턱없이 부족하군. 그런 말은 감히 그쪽이 나한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황후 정도는 되셔야 입에 올릴 수 있는 언행입니다, 록펠트 공작 부인.”
가소롭단 듯 입꼬리를 휘어 올린 헬리온이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무엄한 건 너지. 살려주고 거둬준 은혜도 모르고 주인의 등에 칼을 꽂는 하녀. 바로 너같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한테 하는 말이야.”
헬리온이 카리나의 턱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은빛 머리카락 뒤로 손을 넣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았다. 가녀린 목이 그의 한 손에 전부 잡혔다.
놀란 카리나가 몸을 움찔하자 헬리온이 그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내 어머니의 편지를 가로챈 것도 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