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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100화 (100/160)

100화 : 결혼식(2)

“궁의를 불러와라! 지금 당장!”

일리드가 황궁 사용인들에게 다급히 명령했다. 하녀들이 우왕좌왕하며 재빨리 본궁으로 사람을 보내려 했다. 그러자 단상 위에 선 카리나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황제 폐하를 먼저 모셔라!”

카리나가 폐하의 맥을 짚어 보더니 단상 근처에 있던 기사에게 명령했다.

“폐하를 모시고 궁의한테로 가라, 지금 당장!”

궁의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지 카리나가 결단을 내렸다. 하녀들이 그녀를 도와 폐하를 기사의 등에 업혔다. 기사는 재빨리 아수라장이 된 식장을 떠나 본궁으로 달려갔다.

“아…….”

카리나가 외마디 탄식을 내뱉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의 몸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난…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

유난히도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밝은 햇살에 그녀의 목걸이가 반짝하고 빛났다.

장미 문양이 새겨진 황금빛 목걸이. 고귀한 리젠트라 가문을 상징하는 증표. 지금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것과 같은 목걸이.

그녀의 목걸이가 피에 젖어 있었다. 힘없이 쓰러진 몸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하얀 드레스는 칼에 찔린 사람처럼 계속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맥을 짚어 봐야해. 무슨 독을 먹었는지 알아야!’

그녀를 향해 다가가던 카리나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와 그녀를 에워쌌다.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언제 왔는지 헬리온까지 달려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이 카리나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그녀를 가렸다.

‘그래……. 누가 누구를…….’

카리나는 그녀를 향해 뻗던 손을 내려놓았다. 문득 광장 앞 처형대에 세워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저 여자를 위해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울어주는구나.’

자신이 단두대 위에 올라갔을 때, 곁엔 아무도 없었다.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지만 들어주는 이 하나 없었다.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같은 공작 부인이 되었는데도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

마음이 이상했다. 죽어가고 있는 건 저 여자인데, 꼭 자신이 갈기갈기 찢겨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카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지금 자신이 신경 써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닌 황제였다. 황제가 살아야 자신도 살 수 있었다.

마음 속에 얽혀드는 오래된 기억과 감정들을 외면한 채, 카리나는 황제를 향해 달려갔다.

뒤를 돌아서는 순간 생각했다.

그녀를 다시 만난 날, 만일 자신이 그 시절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지금쯤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 * *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입 안 가득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을 했고, 몸에는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온몸의 감각 하나하나가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걸.

“하아…….”

독약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혼인서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모든 걸 끝낼 수 있어서.

“이슈텔…….”

일리드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내 이름을 읊조렸다.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원망마저 섞인 푸른색 눈동자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그는 피 묻은 드레스 자락을 보고는 입술을 깨물며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일리드의 약혼녀. 나와 무척이나 닮은 그녀의 마지막 모습도 지금의 나와 비슷했을지 모른다. 그가 나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이 순간까지도 나와 그녀를 겹쳐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슈텔, 정신 차려! 이슈텔!”

일리드를 밀치고 달려온 율리언이 쓰러진 내 몸을 안아 올렸다. 옆에서 투렌 남작 부인과 로제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꾸만 멀어지는 의식을 잡으며 힘겹게 율리언에게 말했다.

“신전… 으로…….”

“신전? 알았어. 신관들을 부를게. 그러니까 의식 잃지 마, 이슈텔!”

“헬… 리온…… 불러…… 줘…….”

“이미 불렀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니까 곧 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말리파한테 약을 받아올 때만 해도, 나는 고모할머니가 그랬듯이 나도 반드시 깨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기에 물에 약을 타서 마실 때도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독이 몸에 퍼지는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영원히 잠든다는 절반의 확률에 내가 걸릴 수도 있다는 걸.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헬리온을 보고 싶었다. 내가 보는 마지막 세상에 그를 담고 싶었다.

헬리온을 기다리는 사이에도 독은 빠르게 퍼져갔다. 내 안의 감각들이 전부 멀어지듯,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날 붙드는 손길들도 전부 생경하게 느껴졌다.

“이슈텔!”

하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헬리온이 나를 품에 안아 일으켰다.

아수라장이 된 결혼식장. 죽어가는 신부. 눈앞에 펼쳐진 혼란스런 상황에 헬리온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상황은 이해가지 않아도 이 순간 느껴지는 절망은 무척이나 클 것이다. 헬리온의 푸른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내 뺨 위로 흘러내렸다.

“정신 차려 봐, 이슈텔. 제발…….”

“미안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데. 정작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의식이 흐려지는 탓에 말 한 마디 하는 것조차 너무도 버거웠다.

부서지는 햇살조차도 아프게 느껴질 만큼 온몸에 독이 퍼졌다. 누가 세상의 모든 불을 꺼버린 것처럼 눈앞이 어두워졌다.

헬리온의 품에 안긴 채, 오래전 떠올리지 못한 소원을 생각해 보았다.

다시 깨어나 헬리온과 함께 그 밤의 하늘을 보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야 떠올린 나의 소원이었다.

헬리온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다음 순간, 나는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이슈텔 리젠트라가 의식을 잃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한 채, 죽은 사람처럼 깊이 잠들어 있었다.

결혼식장에서의 충격 때문에 쓰러진 황제는 다행히도 짧게나마 의식이 돌아오곤 했다. 깨어날 때마다 황제는 이슈텔의 상태를 물었지만, 좋은 소식을 전해 듣지는 못했다. 그러면 황제는 흐느끼다 지쳐 쓰러지고 다시 의식을 잃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슈텔은 신전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었다. 체내에서 발견된 독이 없었기에 정신을 건드리는 주술이 사용되었을 거란 진단이 내려졌다. 그러나 신력이 뛰어난 신관들은 물론 대신관조차도 이슈텔을 깨우지 못했다.

결국 신관들은 자존심을 접어두고 자신들이 무시하는 말리파에게 도움을 구했다. 정신적인 영역에서 그녀보다 뛰어난 신관은 없었기 때문이다. 말리파는 무척 기꺼워하며 이슈텔을 담당하게 되었다.

황궁의 일상은 전부 마비되었다. 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황제와 윈테라 공작 부인이 쓰러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 황제의 허가를 맡아야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황족인 헬리온과 일리드가 황제 대리로 업무를 처리해야했지만 그마저도 녹록치 않았다. 결혼식 이후, 일리드가 자신에 처소에 처박혀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헬리온은 황제와 이슈텔을 보살피며 자신의 담당 업무를 처리했다. 하지만 일리드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에 손을 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들은 어서 재가를 해 달라 아우성을 쳤고, 결국 헬리온은 일리드의 처소로 갔다.

“대공 전하, 아무도 들이시지 말라는 명이.”

“비켜서라.”

헬리온은 자신을 막아서는 문지기를 거칠게 밀치고 처소 문을 열었다. 쾅하고 세게 열린 문 소리에도 안에 있는 일리드는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빈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위협적인 걸음으로 일리드 앞에 다가간 헬리온이 술잔을 빼앗아 벽에 던졌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유리잔이 산산조각 나 깨졌다.

“나와. 방에 처 박혀 있지만 말고 기어 나오란 말이야! 나와서 뭐라도 해!”

헬리온이 양손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잉크병이 쓰러져 책상 위가 전부 까맣게 어질러졌지만 일리드는 미동조차 없었다.

“미친놈. 일은 일대로 벌여놓고 누구더러 수습하라고 혼자 청승을 떨고 있어, 어?!”

쏟아지는 헬리온의 비난에도 일리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헬리온을 보았다. 그의 눈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퀭했다.

“이슈텔은…… 지금 어때?”

“뻔뻔하기도 하지. 네가 그런 걸 물을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아니, 없지. 나한테 그런 거.”

일리드가 미친 사람처럼 킬킬거리며 웃었다. 웃음은 곧 울음으로 바뀌었다. 눈가를 가린 그의 손 틈 사이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죽을 거야. 그렇게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는데 살 수 있을 리가 없어.”

일리드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일어나 헬리온에게 다가갔다.

“시에라도 그렇게 죽었어. 내 앞에서 똑같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피를 토했어. 옷이 전부 빨갛게 변하고, 몸이 뒤틀리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입 닥쳐, 이슈텔은 안 죽어.”

“그러면 이렇게까지 오래 잠들어 있지 않겠지. 일주일이 지나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잖아!”

일리드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꿈에서도 계속 생각 나. 날 보는 이슈텔의 눈빛이. 날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었어. 내가 따라 죽어도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미친놈, 입바른 소리 하지 마. 뒈질 거면 너나 뒈지라고!”

헬리온이 일리드의 멱살을 움켜쥔 채 그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일리드는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진 채 실성한 듯이 비참한 웃음소리를 냈다.

헬리온은 사촌 형을 내려다보며 참을 수 없는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일리드를 좋아했다. 유일한 사촌이라서 좋았고 영리하고 온화한 그의 성품이 좋았다.

“그땐 이런 한심한 자식인지도 모르고…….”

그랬던 것이 후회가 될 정도였다. 실망스러웠다.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상대도 하지 말았을 것을.

“이슈텔은 안 죽어. 설령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넌 내 손에 죽어. 너도 에보니 블라딘도, 그리고 카리나 리젠트라도 전부 다.”

헬리온은 살벌한 말을 남긴 채, 일리드의 처소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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