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결혼식(1)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흘러 어느 덧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우려하던 대로 의상실의 증인들은 아직 행방이 묘연했고 상황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결국 말리파를 찾아갔던 게 옳은 선택이었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힘없이 눈을 깜빡였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몹시 피곤했다.
“이슈텔,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너무 지쳐 보이는구나.”
내 머리 위에 티아라를 씌워주던 투렌 남작 부인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 나를 꾸며주는 걸 좋아하는 남작 부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표정도 무척이나 어두웠다.
“잠을 잘 못 자서요.”
“아픈 건 아니고?”
“네. 몰리, 그만 해.”
내가 몰리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몰리는 내가 입을 열 때마다 자꾸 음식을 먹이려고 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아무 것도 안 드셨잖아요!”
“먹긴 먹었어.”
“병아리 눈물만큼 드셔놓고선!”
속상한 마음에 몰리가 내게 화를 냈다. 투렌 남작 부인이 몰리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았다.
“자자, 몰리.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내키지 않으면 차라리 안 먹는 게 나아. 중요한 일 앞두고 괜히 체하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건 그렇지만…….”
“다른 날도 아니고 결혼식이잖아. 그러니까 이슈텔이 알아서 하게 놔두자. 자기 몸은 자기가 가장 잘 알 테니까.”
남작 부인의 부드러운 설득에 결국 몰리가 항복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접시를 치웠다.
“로제, 베일 좀 가져다줄래?”
“아, 네네.”
창가에 서 있던 로제가 허둥지둥 마네킹에서 베일을 떼어냈다. 황족의 결혼식에 쓰이는 베일은 팔을 위로 높게 뻗은 채로 옮겨도 발에 걸릴 정도로 길었다.
“이거 정말 엄청 기네요, 하마터면 걸려서 넘어질 뻔했어요. 슈리였으면 키가 크니까, 아이고.”
슈리 이야기에 아차싶은 표정을 지은 로제가 입꼬리를 아래로 쭉 내렸다. 투렌 남작 부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베일을 받았다.
슈리는 물론, 헬리온과 북부 가신들은 전부 오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슈리는 나를 만나러 오고 싶어 했지만, 오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얼굴을 보이지 못했다.
“이슈텔, 이제 일어나 보렴.”
남작 부인의 말에 따라 내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남작 부인과 애비게일, 그리고 다른 하녀들이 붙어서 결혼식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작위 수여식에서 카리나가 입었던 옷과 같은 드레스였다. 다만 나는 붉은 망토가 아닌, 내 키를 훨씬 넘는 긴 베일을 썼다.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주던 남작 부인이 나를 보고는 미소 지었다.
“세상에, 너무 예쁘구나, 이슈텔. 언니가 봤으면 무척 좋아했을 텐데.”
남작 부인의 초록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울지 않으려 눈가를 손으로 가렸으나 이미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울지 말아요, 이모.”
내가 다가가 다독여주자 남작 부인이 더 크게 흐느꼈다. 내 베일을 잡아주던 로제도 덩달이 눈이 새빨개져서는 코를 훌쩍였고, 몰리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 결혼에 내 뜻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설마하는 마음에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막상 결혼식 입장만을 앞두고 있으니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슈텔, 결혼식 입장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잖아. 어쩌면 이 순간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지금이라도 식을 파기해.”
투렌 남작 부인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꼭 진행해야만 해요.”
“난 대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이모도 헬리온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눈물을 꾹 참으며 이모를 품에 안아주었다. 조금 있으면 벌어질 일에 대한 사과이기도 했다. 나는 이모를 꼭 껴안은 채 마음 속으로 용서를 구했다.
“몰리, 로제.”
이모가 비켜선 자리에 몰리와 로제가 다가왔다. 두 사람은 나를 힘껏 껴안은 채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이슈텔, 이제 마무리하고 가야지.”
제일 먼저 감정을 추스린 투렌 남작 부인이 화장대 위에 있던 목걸이를 들었다. 황후 폐하의 목걸이, 황태자가 정해지면 그와 결혼할 때 착용하려고 아껴두었던 것이었다.
“아니요, 전 이거면 돼요.”
황금빛 장미 목걸이. 지금 내 목에 걸려있는 가문의 목걸이에 손을 올렸다.
일리드는 황태자가 아니고, 결혼식도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황후의 목걸이는 오늘 같은 날에 과분한 것이었다.
이제 결혼식 준비는 다 되었다. 하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었다.
“에시.”
내 부름에 문밖에 서있던 에시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공작 부인.”
“그래, 목이 말라서 그런데 물 한 잔만 가져다주겠니?”
“네, 알겠습니다.”
방을 나선 에시가 곧 은쟁반에 물 한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처소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 자리를 비켜주세요.”
투렌 남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몰리와 로제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넓은 처소 안에 혼자 남겨진 내가 책상 앞으로 갔다. 서랍 안쪽에 손을 넣자 깊이 숨겨둔 유리병이 잡혔다.
‘딱 한 방울이면 충분하다고 했지.’
유리병의 마개를 열자 말리파의 탑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유리잔에 물약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순간적으로 약이 떨어진 자리에 붉은 자국이 퍼지며 물 전체가 빨갛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유리잔 속의 물은 다시 무색으로 돌아왔다.
신을 믿지 않았지만 잔을 앞에 두고 짧게 기도했다. 부디 다시 깨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잔을 들어 망설임 없이 물을 삼켰다. 이상한 맛이 느껴질 거란 예상과 달리 아무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독치고는 무척이나 평범했다.
‘앞으로 한 시간.’
독이 퍼지는 데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깊게 심호흡을 한 후, 처소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신부 대기실 밖으로 보이는 결혼식장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꽃으로 장식된 황궁 정원은 평소보다 훨씬 생기가 가득했으며, 신전에서 공수해온 조각상과 대리석 단상들로 위엄있는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결혼식에 초대받은 귀족들이 전부 자리에 착석했다. 리젠트라 공작 부부의 참석이 금지된 탓에 하객석 중 가장 상석은 블라딘 공작, 에보니 블라딘에게 돌아갔다. 그 옆에는 릴체 후작, 율리언 릴체가, 뒤로는 실란다 백작가와 남부 가신들이 앉아 있었다.
식장 어디에서도 헬리온과 북부 가신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그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곧 록펠트 공작 부인 카리나 리젠트라가 황제 폐하를 모시고 식장 가장 높은 단상으로 올라갔다.
경사스런 국혼 자리임에도 황제의 표정은 영 밝지 않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황제의 옆 자리에 앉은 록펠트 공작 부인의 표정은 밝았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불행이 예정된 신부의 모습을 보는 것이 몹시도 기꺼운 기색이었다.
“식을 시작하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대신관의 선언과 함께 식이 진행되었다. 부드러우면서도 황가의 위엄이 느껴지는 음악과 함께 신부와 신랑 대기실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커다란 박수소리와 함께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일리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향해 다가가는 걸음걸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눈앞에 안개가 낀 것처럼 세상이 뿌옇고 흐릿하게 보였다.
‘슬슬 약 효과가 나타나는 건가.’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시야는 계속해서 초점을 잃은 것처럼 흔들렸다. 일리드의 앞에 다가가 섰지만, 붉은 망토와 황가의 검은 제복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나한테 화난 거야, 이슈텔?”
두통에 인상을 찌푸리자 일리드가 나를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식은 이미 시작됐어. 싫다 해도 이젠 되돌릴 수 없어.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굳어 있지 마.”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몸의 변화는 물론, 여전히 뻔뻔한 그의 태도에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나와 일리드는 황제가 앉은 상석의 아랫단으로 올라갔다. 붉은 천이 깔린 단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대신관이 들고 온 향로 아래서 축복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내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말리파의 약이 빠르게 번져가고 있었다. 몸에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어지럽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일리드 대공 전하, 윈테라 공작 부인. 이제 혼인 선서는 모두 마쳤습니다. 마지막으로 혼인서약서에 서명해주십시오.”
일리드가 무릎을 펴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옆에 있는 보조 신관들의 도움을 받으며 단상 앞에 섰다.
일리드는 눈앞에 혼인서약서가 놓이기 무섭게 바로 서명을 했다. 보조 신관들이 내게 기다란 서약서와 잉크를 머금은 깃펜을 건넸다.
서약서에 적힌 글자가 단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깃펜을 잡은 손도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슈텔.”
내가 깃펜만 쥔 채 서명하지 않자 일리드가 나를 재촉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마저도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귓가에서 웅웅댔다.
투둑- 투둑-
서약서 위로 잉크가 떨어져 내렸다. 깃펜에서 떨어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종이 위에 번진 색은 붉은 색이었다. 깃펜이 아닌, 내 입가에서 흐른 피였다.
“이슈텔!”
소스라치게 놀란 일리드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내 입에서 토해내듯 피가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피는 하얀 드레스 위로 떨어져 소름 끼치게 번져나갔다.
‘말리파가 말한 게 이거였군.’
극적인 시각 효과라는 게 뭔가 했더니 이런 것이었다. 하얀 옷 위에 번지는 붉은 피.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하객석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가장 앞줄에 앉아있던 에보니 블라딘과 율리언이 놀라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뒤로 귀부인들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연신 내 이름을 목 놓아 부르는 투렌 남작 부인과 로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버틸 힘이 없었다. 나는 망가진 인형처럼 힘없이 자리에 쓰러졌다.
“폐하!”
내가 쓰러지는 순간, 단상 가장 높은 곳에서 카리나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에도 뚜렷하게 보였다. 황제 폐하께서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