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 블라딘의 요구
“아이고,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반가운 손님도 아닐텐데 에보니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대문 앞에서부터 나를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이리로 오시지요, 공작 부인.”
기다리고 있었다니. 이 사달을 만들어 놓은 장본인은 뻔뻔하게도 나를 향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름만 백작 저일뿐, 과거 공작 저의 위용으로 지어진 저택은 다른 귀족들의 저택과는 비교되지 않을만큼 크고 웅장했다. 하지만 가문의 몰락 이후 관리가 소홀했는지 여기저기 낡은 구석이 보였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백작 집무실은 음산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실밥이 곳곳에 터져있는 두꺼운 벨벳 커튼에, 보수조차 하지 않은 창문. 차가운 회색 돌벽과 방 안 곳곳에 걸린 블라딘 가문 사람들의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가 쓰시던 방을 손 하나 대지 않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매일 밤 이를 갈며 잠에 드셨을 늙은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에서지요.”
에보니가 삐거덕거리는 의자로 나를 안내하며 킬킬거렸다. 나는 의자에 앉기도 전에 말을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원하는 걸 말해 봐요.”
“당신은 참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잘 생각했어요. 괜히 버텨봤자 마음고생만 길어질 뿐이니까.”
다리를 꼬아 앉은 에보니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눈웃음을 지었다.
“제가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이죠. 굳이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는데요.”
“공작 위 회복 아닌가요.”
“바로 맞히셨네요.”
에보니가 박수치듯 손바닥을 가볍게 부딪쳤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나오시다니. 조금 의외네요, 공작 부인. 면죄권을 사용하시면 굳이 저희에게 공작 위를 돌려주지 않으셔도 될텐데.”
“리젠트라 공작 부부는 무죄예요. 그러니 면죄권이 필요 없죠.”
“와, 그것 참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이미 증거까지 다 나온 마당에. 하긴, 면죄권을 사용하시든 말든 저야 제 목표만 달성하면 되니까 상관없겠군요.”
그녀는 공작 위를 돌려받을 때까지 몇 번이고 이런 더러운 짓을 벌일 사람이었다. 그러라고 키워지고 내보내진 사람이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회복시켜줘야 할 작위였다. 돌아가신 릴체 후작 부인께서도 예상하고 계셨던 일이기도 했고.
“하여튼 그거면 만족해요?”
“음, 글쎄요. 아마도?”
아마도라니. 가족의 안위가 걸린 이런 상황에서 모호한 대답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에보니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며 중얼거렸다.
“블라딘은 만족할 것 같은데, 에보니가 만족할지는 잘 모르겠어서요.”
“무슨 대답이 그래요? 장난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진짠데요. 난 당신 가문과 싸우라고 내 아버지가 길러낸 투견이에요. 그러니 블라딘 가문에 공작 위만 물어다주면 내 할 몫을 다하는 거죠. 아, 그렇다고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한 건 아니었어요. 당신과 싸우는 동안 스릴 넘치고 재미있었거든요.”
그간의 추억을 회상하는 에보니는 진심으로 즐거운 얼굴이었다.
“당신 가문에서 공작 위를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블라딘가 사람들 중에서 여기, 이 에보니밖에 없어요. 나는 아버지한테 백작 위를 물려받은 자가 아닌, 블라딘을 다시 공작으로 만든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래야 내가 죽어도 내 형제들이 감히 내 이름에 먹칠을 하지 못할 테니까.”
“질문은 짧았는데 대답이 쓸데없이 기네요. 요지만 간단히 말해요.”
“막상 공작 위를 돌려받게 된다니까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자못 따분한 표정을 지은 에보니가 의자 뒤로 깊숙이 몸을 뉘였다.
“그 이후의 삶은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난 당신 미래 같은 거 관심 없어요.”
“맞다, 그러시겠죠. 제가 요새 늘 이 생각뿐이라 상대를 잘못 보고 지껄였네요.”
잠시 몽롱하던 에보니의 눈빛이 다시 평소같이 돌아왔다.
에보니 블라딘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다. 가문의 명예와 가족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리와 달랐다.
그녀에게 공작 위를 돌려주는 것은 내게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 패였다.
에보니의 이복형제들은 공작으로 회복된 가문을 빼앗기 위해 그녀를 더 끈질기게 물어뜯을 것이다. 그녀에게 공작 위는 반드시 돌려받아야하지만 동시에 달갑지 않은 부작용이 딸려오는 물건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에보니는 현실적이고 적극적이면서도, 묘하게 삶에 지쳐 보이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공작 위만 돌려받는다면, 앞으로 나와의 위험한 정치적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곧 그녀가 카리나, 일리드와 더 이상 함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겐 무척이나 다행스런 일이 될 것이다.
“아무튼 블라딘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 몇 명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지는 대충 알고 계시겠죠? 그분들이 모두 만족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일리드 대공을 말하는 건가요?”
“예, 뭐 그분도 그분이고 황제 폐하도 계시니까요.”
에보니가 조금은 지친 목소리에 일부러 힘을 주어 말했다.
“삼촌과 조카의 목적이 같으니 한 분만 찾아가셔도 될 겁니다. 이 일만 잘 성사되면 우리도 더 이상 이렇게 마주 앉을 일이 없겠군요. 난 그런 날이 정말 기다려져요.”
* * *
“고하여 주게.”
“황제 폐하, 윈테라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하녀장 소피의 목소리에도 황제전에선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없어 불안한 마음만 더 커져갔다.
잠시 후, 폐하의 잠긴 목소리와 함께 들어와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폐하께서 계신 방 안쪽으로 가는 길. 대리석 바닥에 울리는 규칙적으로 발소리가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처럼 느껴졌다.
“폐하.”
금색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고 계시는 폐하의 옆얼굴이 보였다. 이전보다 많이 늙고 수척해지신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문득 폐하의 얼굴에서 프리모스의 모습이 보였다. 더없이 안 좋은 상황에서 그가 떠오르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블라딘 백작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백작과의 대화는 잘 마무리 짓고 왔습니다.”
폐하께서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시길 기다렸으나 그분의 시선은 고요히 창밖만 향하고 있었다. 내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면서 감정을 소모할 수 없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블라딘 백작은 자신이 원하는 걸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이번에는 폐하께서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제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그런 거냐고 먼저 물어야지.”
긴 침묵을 깨고 들린 폐하의 첫마디는 뜻밖의 말이었다.
“내게 먼저 화를 내야하는 게 아니냐, 이슈텔.”
“폐하께서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아는데 굳이 여쭈어 무엇하겠습니까.”
“내가 왜 그런 것인지 안다고?”
“예.”
내 짧은 대답에 폐하께서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셨다.
“그것 참 궁금하구나. 어디 한 번 말해보아라. 내가 왜 그런 건지.”
“폐하께선 저를 미워하시고 제 가문을 경계하시니까요.”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심장은 긴장감으로 터질 것처럼 쿵쿵댔다.
“그러니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폐하.”
폐하께서 무어라 하실지 짐작가는 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비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하실까.’
황제께선 리젠트라 가문에서 황태자비가 배출되는 걸 몹시 꺼려하셨다. 카리나가 입궁하기전, 나와 그분의 사이가 원만했을 때도 내 배경만큼은 늘 탐탁찮아 하셨으니까.
그러니 이번 기회에 나를, 리젠트라 가문을 황태자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일리드와 혼인하거라.”
최악의 상황을 산정하고 계셨다.
“네가 정한 일이라고 발표한 후에 식을 올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일리드를 황태자로 발표할 거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면서 귀까지 멀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닌가 싶어 한동안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폐하…….”
폐하의 완강한 표정이 조금 전의 말과 뜻에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 떨린 나머지 다음 말을 이어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폐하. 폐하께서 정말 바라시는 것이 일리드가 황태자가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리젠트라가 권력에서 한발 물러나는 것입니까?”
이번엔 폐하께선 대답이 없으셨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선 저희 가문에서 황태자비를 들이기 싫어하셨죠. 하지만 리젠트라 가문은 이제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얼마 전에 릴체 후작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셨죠.”
“…….”
“제 오빠에겐 할아버지와 같은 능력이 없습니다. 가문을 이끌어 가기에 부족한 사람인 건 폐하께서도 이미 눈치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빠의 처가인 실란다 백작가도 가주를 잃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
“릴체 가문의 율리언은, 폐하께서도 가까이서 보셨다시피 노련한 정치가보다는 고지식한 기사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리젠트라는 물론이고 저희를 뒷받침하고 있던 릴체와 실란다도 이전 같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권력은 자연스레 황가에게 반환될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잠자코 내말을 듣고 계시던 폐하께서 머리가 아픈 듯 천천히 눈을 감으셨다. 어깨에 두른 붉은 망토가 그분의 숨을 따라 들렸다 내렸다했다. 나는 다시 숨을 고른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블라딘 가문을 공작가로 격상시키실 거면 군말없이 동의하겠습니다. 폐하의 모후 가문을 그동안 저희 집안에서 너무 괴롭혔죠. 이제 저희 대에서 그 갈등도 끝내고 싶습니다.”
긴장감에 차가워진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러니 부디 이번 사태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지어주시길 바랍니다, 폐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윽고 폐하께서 감은 눈을 떠올리며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일리드는 좋은 아이다. 제국에는 훌륭한 황제가 될 거고, 네게는 좋은 남편이 될 거야.”
“폐하…….”
가슴 속에 울컥 차오르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말을 폐하께 해 본 적이 없어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내지지가 않았다.
가슴 속에서 올라온 감정이 목을 타고 번져와 눈까지 뜨거워졌다. 아주 오래 전, 폐하께서 내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두 대공이 황궁에 오기 전. 폐하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마음에 품게 된 조카분이 생기면 알려달라고 하셨지요. 그 조카를 황태자로 삼아줄 수도 있다고 하시면서요.”
그리고 다음 말을 하는 순간, 뺨을 타고 참아온 눈물이 흘렀다.
“폐하, 제가 헬리온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