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91화 (91/160)

91화 : 청혼(2)

“난 태어난 순간부터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살아왔어. 황태자는 바뀌더라도 그 옆자리는 절대 변하지 않을 내 자리였어. 하지만 이제는 아냐. 설령 네가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하더라도 상관없어. 내가 대공비가 되어 너와 함께 북부로 갈 거니까.”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정말 그럴 각오가 되어있었다.

“이런 말은 너무 멋이 없나……?”

막상 말을 마치고 나니 청혼사로 듣기엔 너무 딱딱한 말만 내뱉은 것 같아 민망해졌다. 그러자 헬리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라는 거 알아. 오히려 감동적인데, 날 따라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북부에 다 오겠다고 하고.”

말을 잇던 헬리온이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는 걸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여전히 조금 긴장한 채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럼, 청혼 받아주는 거지?”

“음, 그건 좀 더 생각해봐야겠는데. 아직 중요한 말을 못 들어서.”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꾼 헬리온이 팔짱을 꼈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한 내가 다급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인데? 알려주면 바로 할게.”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그 말과 동시에 헬리온이 내 몸을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순간 조각배가 흔들리면서 깜짝 놀란 내가 반사적으로 헬리온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는 내 허리를 잡아 제 몸에 더욱 가까이 밀착시켰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말해주지 않으면 나도 놔주지 않을 거야.”

위험한 장난을 치듯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나는 그의 깊은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사랑해, 헬리온. 너무 늦게 말한 만큼, 앞으로 더 자주 해줄게.”

사랑을 말하는 내 입술은 그대로 헬리온의 것에 포개지고 말았다. 아까 전 내가 했던 입맞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깊게 얽혀드는 키스였다. 밤하늘에서 터지는 폭죽이 마치 내 머릿속에서도 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해, 이슈텔. 사랑해, 사랑해.”

헬리온은 오랜 갈증에 시달렸던 사람처럼 나를 잡고 계속해 사랑을 속삭였다. 이곳이 강 한가운데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으면 지금 겨우 붙잡고 있는 헬리온의 이성 한 가닥이 완전히 끊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헬리온의 키스가 격렬해질수록 내 머리를 가리고 있던 망토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망토 자락을 붙잡고 싶었지만 헬리온에게 너무 꽉 붙잡혀 있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마침 강가로 불어오는 센 바람에 나와 헬리온의 망토가 동시에 벗겨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우리에게로 쏠리고 말았다.

동화책을 사이에 두고 앉은 남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 옆 배에 타고 있던 아가씨 둘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부러운 듯 작게 재잘거렸다.

그녀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헬리온을 쳐다보더니 내년에는 저렇게 멋진 남자와 함께 오자며 귀여운 다짐을 했다.

“쯧쯧, 하여간 젊은 것들이란.”

보다 못한 남매의 아버지가 혀를 차며 우리에게서 아이들의 몸을 돌려 앉혔다.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에도 헬리온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내려간 망토 자락을 잡아 다시 내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기다란 망토 아래서 우리는 축제가 계속되도록 서로 사랑을 속삭였다.

* * *

록펠트 공작 부인의 작위 수여식 당일.

에보니는 의상실에서 새로 맞춘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황궁 복도를 걸었다. 짙푸른 재킷에 검은 털망토를 두른 그녀는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씩 웃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일리드 대공. 준비는 다 하셨나요?”

일리드의 처소 안으로 들어간 에보니가 하녀에게서 넥타이를 받아들고는 사용인들을 전부 물렸다. 거울 앞에 멍하니 서 있던 일리드가 눈동자만 돌려 거울에 비친 에보니를 보았다.

“록펠트 공작 부인은 황제 폐하께서 데리러 가시고, 윈테라 공작 부인은 헬리온 대공께서 에스코트하러 가신다던데. 일리드 대공께서 혼자 외로우실까봐 제가 왔습니다.”

에보니가 멋진 자세로 허리를 숙이며 흰 장갑 낀 손을 일리드에게 내밀었다. 일리드는 상대할 힘도 없는 얼굴로 에보니의 손에 들린 넥타이를 낚아챘다.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또 이런 걸 아주 잘하거든요.”

에보니가 일리드의 셔츠 단추를 잠근 후, 그의 목에 타이를 둘렀다. 일리드가 에보니의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물었다.

“준비는 제대로 했겠지?”

“저야 늘 완벽하죠. 대공께서 주문하신대로 아주 우스꽝스럽고 볼썽사나운 꼴로 준비해두었습니다.”

에보니가 타이를 감아 매듭을 조였다.

“그러다보니 이번 계획은 자극적인 막장극이나 다름없습니다. 개연성이라곤 하나 없이 허술하다, 이 말이죠. 조금만 조사해 봐도 제가 리젠트라 공작 부인에게 손을 써둔 걸 들킬 테니까요.”

“시간 끌지 않고 단번에 밀어붙일 거야. 그때까지만 들키지 않으면 돼.”

일리드가 한껏 예민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계획은 속전속결로 끝내야해. 이슈텔이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도록 순식간에 벼랑 끝까지 몰아붙여야 한다고.”

“네, 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잔소리는 그만하시고 이제 그만 연회장으로 가실까요? 오늘도 무척 잘생기셨네요.”

타이 끝을 베스트 안으로 넣어 정리한 후, 에보니가 일리드를 재촉했다.

처소를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복도를 걸어 연회장으로 향했다. 높은 돌기둥을 두고 모퉁이를 돌던 일리드가 돌연 굳은 얼굴로 걸음을 멈춰 섰다.

“이슈텔…….”

같이 걸음을 멈춘 에보니가 일리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짙은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이슈텔 리젠트라, 그리고 그 옆엔 일리드와 같은 제복을 입은 헬리온이 보였다.

앞서가는 두 사람은 이쪽의 인기척은 느끼지 못한 채 서로만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은데 손을 잡고 다니네요.”

에보니의 말에 일리드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으로 내려갔다. 일리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에보니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요즘 들어 부쩍 가까워진 것 같은데……. 아, 저 두 사람 어린 시절에 황궁에서 같이 자랐다면서요? 소꿉친구란 건 참 좋은 거지요. 떨어져 지낸 기간이 길어도 금세 저렇게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고.”

에보니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에 걸며 꽤나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아깝네요. 대공께서도 어릴 때부터 이슈텔 리젠트라와 친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기회가 없었나 봐요?”

“……있었어.”

“오, 정말요?”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에보니가 관심을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일리드의 눈빛이 어딘가 모르게 서글퍼보였다.

“대공, 아직 갈 길이 먼데 그 이야기나 좀 들려주시죠?”

그러나 일리드는 연회장에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 * *

“이슈텔, 많이 떨려?”

“응. 너무 떨려서 입술이 자꾸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아. 이마에 식은땀도 나고.”

헬리온이 괜찮다고 말하며 내 손을 꼭 움켜잡았다.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다면 벌써 몇 번이고 혀로 입술을 축였을지도 몰랐다. 추운 날이 아닌데도 괜히 오한이 드는 기분이었다.

“너한테 청혼했을 때보다 더 떨려.”

“원래 어른들한테 결혼 허락 받으러 갈 때가 제일 떨린다고 하더라고.”

“누가 그래?”

“우리 아버지가.”

정치적 이익을 위해 명문가와 정략결혼한 볼테로 황자와 달리, 알렌시아 황녀는 비교적 낮은 가문의 부군과 연애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문득 헬리온 부모님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몇 번이고 해줄 텐데.”

헬리온이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한숨지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건 내가 해야 하니까.”

카리나의 작위 수여식에는 수도의 귀족들과 대공령의 가신들도 모두 초대 받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헬리온과 혼인하겠다 발표할 계획이었다.

“폐하께선 안 된다고 하실 거야. 그래도 우선 토 달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발언한 것만으로도 오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거니까.”

“나는 잘 참을 수 있는데, 일리드 형이 가만히 안 있으면 어떡하지? 이번엔 주먹으로 끝날 것 같지 않은데. 오늘 수여식이 무기 반입 금지라 다행인 건가.”

헬리온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잠겼다. 나 역시 그 점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착하게 맞아주고 있지 마. 상대가 때리면 피하고 네가 다시 때려. 이제 얼굴에 상처 나는 일은 더 없어야 해.”

“알았어. 그럼 허락도 받았겠다, 준비하고 있어야겠네.”

헬리온이 장난스럽게 목을 푸는 시늉을 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흔들렸다. 나는 그의 검은 제복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슈텔!”

붉은 카펫이 깔려있는 연회장에 들어서자 나를 반기는 목소리가 들렸다. 먼저 도착해있던 오빠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를 맞이했다.

“이슈텔, 보고 싶었어.”

자르는 옆에 선 헬리온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나를 데리고 의자에 앉아있는 실비아에게로 갔다.

“언니, 몸도 무거운데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했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황제 폐하의 초대장만 없었어도 안 오는 건데, 왜 하필 이번 수여식이 부부 동반인지 이해가 안 가네요.”

짧게 투덜거린 실비아가 헬리온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려 했다. 그러자 헬리온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그냥 앉아 계셔도 됩니다, 부인.”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전하께 앉아서 인사를 드리다니.”

실비아가 헬리온을 향해 연신 사과하다가 갑자기 딴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대공 전하. 얼마 전에 저희 아이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던데. 릴체 후작 저에서 키 크고 잘생긴 빨간 머리 왕자님을 봤다고 하면서요. 아이들의 묘사가 전하와 너무 닮아서 저도 모르게 애들 말에 흠뻑 빠져 들었지 뭡니까.”

실비아가 깔깔거리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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