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청혼(1)
작위 수여식은 하루하루 빠르게 다가왔지만 카리나는 끝내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사교계의 관심은 온통 록펠트 공작 부인, 카리나 리젠트라에게 쏠렸고 그에 대한 내 반응을 살피느라 혈안이 되어있었다.
카리나 역시 밀려드는 관심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들었다. 린턴 자작일 때도 내 눈을 피해 그녀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는 록펠트 공작 부인이 되었으니 대놓고 그녀와 친분을 쌓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던 중, 헬리온과 약속한 날이 되어 한숨 돌리는 기분이었다.
풍등 축제 날답게 키비르 강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밤하늘은 각양각색의 폭죽들로 예쁘게 물들어 있었고, 사람들은 풍등에 저마다의 소원을 적고 있었다.
한껏 들뜬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헬리온을 기다렸다. 이곳은 귀족들도 많이 오는 곳이었다. 나는 망토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쓴 다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작은 상자가 잡히자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떨지 말자. 여기 오기 전까지 연습 많이 했잖아.’
심호흡을 하며 준비한 말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읊어보았다. 대사는 막힘없이 나왔으나 실전에서도 그럴지 의문이었다.
“이슈텔.”
그때,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처럼 망토를 깊게 눌러쓴 헬리온이었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아냐, 내가 운이 좋게 황궁에서 빨리 빠져나온 거지. 별로 안 기다렸어.”
“역시 풍등 축제는 멋지네. 작년에 본 건데도 느낌이 새로워.”
헬리온이 사람들의 손에 들린 각양각색의 풍등을 보며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곧 우리는 조각배를 강가에 띄웠다. 헬리온이 노를 저어 돌다리 아래에 배를 기댔다. 긴 다리가 시야를 가리는 탓에 사람들이 비교적 적은 곳이었다.
“여기면 괜찮겠지?”
노에서 손을 뗀 헬리온이 괜히 배 주변을 만지작거리며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사방이 어두운 데다 모자에 가려진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긴장하고 있단 것이 느껴졌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만나자고 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나도 잔뜩 긴장을 한 탓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괜히 주변에 있던 다른 배들을 살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부모님과 함께 배를 탄 오누이가 보였다.
“누나, 책 읽어줘.”
남동생이 누나에게 건네는 동화책이 보였다.
나와 헬리온의 시선이 동시에 아이들이 든 책에 닿았다. 꼬마의 누나는 귀찮아하면서도 동생의 부탁대로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아이는 특이하게도 책 맨 앞의 추천사부터 읽었다.
“저 추천사 내가 쓴 거야.”
내가 헬리온에게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테브론 제국의 어린이들이 소중한 인연을 알아보는 현명한 사람으로 자라기 바란다.’ 어때, 꽤 괜찮은 문구지?”
“더할 나위 없지. 근데 저만한 애들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커서 책을 다시 펼쳤을 때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넣었어.”
“그런 의도면 아주 좋지.”
헬리온이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책을 읽는 아이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도 서점에서 네 책이 없어서 못 판대. 벌써 7쇄나 찍었다네.”
“그렇게 잘 팔리는데 어떻게 원작자한테는 금화 한 닢 들어오지 않을 수 있지?”
“설마 제국에서 가장 큰 금광을 갖고 계신 분이 돈이 아쉬워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수도에 있는 고아원에 네 이름으로 기부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못 믿겠으면 기부 증서라도 보여줄게.”
놀리는 듯한 내 목소리에 헬리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다만 네가 왜 저 이야기를 출판했는지가 궁금해서.”
“그야 왕자님이 만든 이야기를 나 혼자 보기엔 아까워서 그랬지. 황족이 동화책을 쓴 건 처음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이름이라도 바꿔서 내주지 그랬어. 텔리아 남매가 날 볼 때마다 놀린단 말이야.”
“왜? 뭐라고 놀리는데?”
“솔직히 동화책이 나랑 어울리지는 않잖아. 라비랑 슈리가 볼 때마다 ‘작가님, 작가님. 책도 잘 팔리는데 한 턱 쏘시죠.’하면서 헤어질 때까지 따라다니면서 놀린다니까.”
“대공 전하보다 덜 딱딱하고 듣기 좋은데요, 헬리온 작가님. 나중에 제 방에 오셔서 초판본에 사인 좀 해주세요.”
“아, 그만해.”
헬리온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몸서리를 쳤다.
“난 재밌는데. 아, 텔리아 남매가 이 맛에 널 놀리는구나.”
내 웃음소리가 커지자 헬리온이 부끄러운 듯 괜히 딴청을 피웠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음, 그래서 오늘 여기서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아이가 낭독을 마치자 그제야 한결 안색이 편해진 헬리온이 물었다.
“황궁에서는 못 하는 이야기야?”
“그건 아니지만, 그보다 분위기 있는 곳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라서.”
“무슨 말이길래……?”
내 말에 헬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두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망토 주머니 아래로 손을 넣자 작은 상자가 잡혔다. 자꾸만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헬리온 앞에 반지함을 내밀었다. 저녁 하늘 아래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금빛 반지였다.
“이건, 그러니까…….”
며칠 전부터 거울을 보고 수도 없이 연습했던 말인데 막상 실전에선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나와 반지를 번갈아보는 헬리온의 얼굴을 마주 보자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름다운 저녁 강가, 밤하늘을 밝게 수놓는 폭죽, 잔잔한 수면 위에 뜬 조각배. 연인에게 청혼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헬리온의 푸른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재촉하지 않고 내 말을 기다리는 그 모습이 평소보다 성숙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거 네 거야. 손가락에 맞나 한 번 껴볼래?”
결국 준비했던 첫 마디부터 꼬여 다른 말을 하고 말았다. 헬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가운데 손가락에 끼었다.
‘왜 저 손가락에 끼지?’
의문이 드는 와중에 헬리온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짝이는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썩 괜찮네. 역시 금화 한 닢보다는 반지가 낫지. 고마워, 이슈텔. 기념으로 잘 간직할게. 나머지 인세도 네가 알아서 필요한 곳에 기부해줘.”
그렇게 말한 후, 헬리온은 손에서 반지를 빼서 다시 반지함에 넣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한 내가 다급히 다시 상자에서 반지를 꺼냈다. 헬리온은 영문을 모르겠단 듯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내가 준비한 상황이 어떤 분위기인지 감조차 잡지 못한 듯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겨우 붙들고 헬리온의 왼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 금빛 반지를 끼워주었다.
“나, 지금 너한테 청혼하는 거야.”
청혼이라는 말에 헬리온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커졌다. 그는 제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청혼……?”
“나와 우리 가문은 널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전부를 걸기로 했어. 그 각오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너와 결혼하는 거야.”
‘이슈텔 리젠트라’를 차지하는 사람이 황태자가 된다. 그 간단한 명제는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는 승자의 전리품일 뿐, 승자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역할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예비 황태자비라는 자리를 내려놓고 내 손으로 남편감을 고를 것이다.
“우리 집안을 따르는 가문들이 모두 네게 충성을 맹세할 거야. 내가 선택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넌 제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고. 내가 황태자비 자리를 내려놓음으로써 넌 황태자 자리에 더 가까워질 거야.”
뜻밖의 이야기에 헬리온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갑작스런 이야기니 그의 머릿속도 복잡할 것이다.
“넌 걱정할 거 아무것도 없어.”
내가 헬리온의 곁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며 속삭였다.
“황실과의 혼약을 깨지 않는 일이니까 폐하께서도 끝까지 반대하실 순 없을 거야. 물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잡음은 있겠지만, 내가 너와 혼인하겠다는 말 자체만으로도 분명 정치적인 효과가-”
“이슈텔.”
말을 자른 헬리온이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난 그런 거 하나도 안 궁금해.”
“어……?”
헬리온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그 사이,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풍등이 하늘로 떠오르고 사람들의 환성 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헬리온은 주위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나 아닌 다른 것들은 모두 지워낸 듯, 그의 시선은 오직 나만을 향해 있었다.
“내가 궁금한 건 이슈텔 네 마음이야. 그러니까 복잡한 정치 이야기 말고, 더 중요한 걸 이야기해줘.”
헬리온이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었다. 분명 주변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운데 내 귀에 들리는 건 차분한 그의 목소리와 미친 듯이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헬리온 뺨과 목을 감쌌다. 나를 맞잡아 안을 거란 예상과 달리, 헬리온은 내가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일 년 전 모습과 정확히 반대였다. 다행인건 나와 달리, 그는 내게서 몸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헬리온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부디 이 입맞춤이 그에게 충분한 대답이 되어주길 바랐다.
잠시 후, 천천히 입술을 떼자 헬리온도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날 향한 그의 푸른 두 눈이 전보다 더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너무 멀리 돌아와서 미안해, 헬리온. 익숙한 사이라는 생각 때문에 네게 점점 스며드는 감정의 이름을 잘 몰랐던 것 같아.”
준비했던 말은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하나씩 솔직하게 읊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