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당신의 불행
록펠트 공작 부인 작위 수여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카리나는 ‘린턴’으로 기재되어있던 자신의 성을 ‘리젠트라’로 바꾸었다. 우리 가문의 정식 일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성만 같아질 뿐이지만 귀족들은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듯했다.
특히 귀족들은 카리나가 돌아가신 황후 폐하의 작위를 받는 것에 큰 관심을 보였다. 입이 가벼운 귀족들은 점잖은 귀족들을 비웃었다. 그러게 자신들이 뭐라고 했느냐고. 황제와 그 하녀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냐고.
입이 가벼운 귀족들은 한껏 의기양양해진 채, 다음 먹잇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다른 한 가지는 나와 카리나 사이의 서열이었다.
작위상 나와 그녀는 같은 공작 부인이었다. 황태자비는 황제의 정부보다 높은 자리였지만, 지금은 내가 정식 황태자비가 아니니 그 또한 애매해진 상태였다.
‘왜 하필 그 작위를 내리셔서 이런 사달을 만드신 건지…….’
황제 폐하의 의중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록펠트 공작 부인 작위만 아니었어도 나와 다른 귀족들이 이렇게까지 반응하지는 않았을 텐데.
“공작 부인, 이리로 드시지요.”
준비가 한창인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중요 귀족들이 전부 참석하는 자리인지라 하녀들은 내가 오는지도 모른 채 자기들이 맡은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카리나가 돌아가신 황후 폐하의 작위에 먹칠이나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연회날 최대한 황후 폐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해야지.’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귀족들은 카리나가 황후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그만큼 록펠트 공작 부인 작위는 특별한 자리였다.
나는 근처에 놓인 식기와 장식물들을 보았다. 다행히 카리나의 화려한 취향은 황후 폐하의 소박한 성정과 무척이나 상반되었다.
실내 장식을 모두 둘러본 후에는 드레스룸으로 갔다. 작위 수여식에 입을 드레스가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하녀들이 내게 카리나가 입을 드레스를 보여주었다. 금실이 수놓아진 화려한 붉은색 망토와 아이보리색 드레스. 황가에 새로운 여인이 들어올 때 입는 특별한 드레스였다.
본디 내가 먼저 입었어야 할 옷. 정비가 아닌 이가 입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드레스 장식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자 한껏 신경질적인 표정의 카리나가 보였다.
“내가 이 행사 준비의 최종 결정권자이니 와 본 건데 무슨 문제라도?”
“말 그대로 최종 결정권자이신거지 이렇게 중간부터 와서 감시하실 건 없지 않습니까.”
그녀가 내 손에 들린 망토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건성으로 마네킹에 걸린 드레스를 정리했다.
명분상 작위 수여식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결혼식이나 마찬가지인 행사였다. 그런 중요한 행사를 앞둔 사람치고 카리나의 표정은 썩 밝아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데 안색이 좋지 않구나. 남들이 뭐라고 하든 결혼식에 준하는 행사를 치르는 일이니 계속 침울해있지 말아라.”
“결혼식이 아니라 작위 수여식입니다. 제가 윈테라 공작 부인과 같은 위치인 공작 부인이 된다는 거죠. 아주 기쁜 일입니다.”
카리나의 말투에는 잔뜩 가시가 돋혀 있었다. 기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기뻐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는 공작 부인께서는 제 일에 왜 이렇게 세세하게 신경을 쓰시는 겁니까? 행사를 망치면 망칠수록 공작 부인께는 더 좋은 일 아닌가요?”
나는 말없이 카리나의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같은 여자가 보아도 참 묘한 아름다움을 가진 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의 모습이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보고 있자니 문득 오래전에 폐하께서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한창 좋을 나이에 친구들도 사귀고 좋은 사람도 만나 결혼도 해야 할 텐데……. 얼굴에 흙을 잔뜩 묻히고 고된 일을 하는 게 가여웠다.”
내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카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마구간 하녀였던 시절, 폐하께서 내게 하셨던 말씀이다. 내가 널 본궁에 들인 것도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려서였지.”
마네킹의 머리 위에 씌워진 티아라 장식을 보았다. 보석으로 장식된 티아라에는 부드러운 면사포가 이어져 있었다.
어쩌면 그날 황제 폐하께서 하셨던 말씀을 나 또한 바랐던 것 같다. 그녀가 나에게 적의가 없단 걸 확인한 후에 적당한 혼처를 찾아 결혼시켜주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 일을 하며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었고, 가끔 안부를 묻는 편지를 주고받으면 좋을 거라 생각했었다.
“이제는 모두 요원한 일이 되었지만…….”
그녀가 내 시어머니 격인 작위를 받아 계속해 황궁에서 지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건 아마 세상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제가 평범한 사람과 결혼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공작 부인 작위까지 받는 게 거슬린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저 이루어지지 못한 폐하와 나의 바람이 안타까워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카리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가 당신처럼 왕자님과 결혼하지 않아요. 약혼자였던 황태자가 죽었다고 다른 왕자님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삶을 살지 않는다고요.”
내 말의 어떤 부분이 카리나를 극도로 자극했던 모양이었다.
“제 언니는 자기가 낳은 아이의 아비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그걸 옆에서 지켜본 제가 퍽이나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가정을 이루며 살겠습니다. 남들에겐 평범한 삶이, 저 같은 사람한텐 너무나 먼 딴 세상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녀는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소리쳤다.
“공작 부인처럼 귀하게만 자란 분은 모르시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배를 곯지 않으려고 목숨이 간당간당한 늙은이의 재취 자리라도 기꺼이 간답니다. 그러니 폐하의 정부가 되는 건 남들은 못 돼서 안달이고 부러워하는 일입니다. 쓸데없는 동정하지 마세요.”
“너 스스로도 이게 옳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구나.”
무어라 더 소리치려던 카리나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문이 막힌 사이,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악을 쓰고 발버둥을 치고 있나본데 그만해라, 보기 안 좋으니.”
말 그대로 그녀의 모습은 보기에 썩 좋지 않았다. 공작 부인 작위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내가 옆에서 뭐라고 떠들던 간에 제 행복감에 취해 다른 건 신경도 쓰지 않아야 했다.
작위 수여식을 계기로 나를 골탕먹일 작당을 하고 있다면 에보니 블라딘과 만나느라 정신이 없을 시간이었다.
그래야할 그녀가 괜히 나를 붙잡고 시비를 걸고 있단 건, 분명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카리나 리젠트라.”
그녀의 이름에 나와 같은 성을 붙여 불렀다. 입 안의 가시 같은 그 이름을 내뱉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원하는 것을 말해봐라.”
“……원하는 거요?”
“그래,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거.”
조금 전까지 분노로 가득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금세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인 듯, 그녀가 멍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망설임과 혼란함이 한데 뒤섞인 얼굴이었다.
“네가 정말 폐하를 존경하고 그분을 위한다면, 지금 네가 하려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달아야해.”
황족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후처나 정부를 들이는 일은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황제의 곁에 머물렀다.
“폐하께서 너로 인해 세간과 역사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으실까 염려된다. 그리고 너 역시 장기 말처럼 쓰다 버려질 게 불 보듯 뻔해.”
정부들의 말로는 대부분 비참했다. 정치적 후견인의 입맛에 맞게 사용되다 쓸모가 없어지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가차 없이 버려졌다. 카리나라고 한들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내가 널 멈춰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부와 명예를 원하는 것이면 다른 작위를 내려주겠다. 에보니 블라딘에게 발목을 잡혀서 이러는 거라면 백작이 널 괴롭히지 못하게 막아줄 거고.”
“…….”
“네겐 불충분한 처벌이겠지만, 실란다 백작은 귀족 사회에서 전례없이 무거운 벌을 받았어. 너도 황궁에서 생활한지 꽤 됐으니 그 정도는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그 일 때문에 이러는 거는 아니겠지.”
카리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그 침묵은 내 말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로 읽혔다.
“그러니 정말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아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줄 테니. 그렇게 해서 네가 이 어리석은 짓을 멈춘다면 얼마든지 기꺼운 마음으로 들어주겠다.”
카리나가 내게서 비스듬히 시선을 돌렸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가 바라는 것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녀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으니 말씀드릴 필요가 없어요.”
자조적이면서도 어딘가 슬픈 목소리였다.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오히려 조카와 살 수 있게 해달라는 둥, 원하는 것이 무척 많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끝내 대답을 피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대답할 마음이 들면 날 찾아와라. 작위 수여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하, 공작 부인께선 참 다정도 하십니다. 저 같은 사람은 남의 마음 따위 돌봐줄 여유 같은 건 없는데…….”
카리나가 헛웃음 소리를 내며 길게 흘러내린 은빛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난 그저 당신이 나만큼 불행해졌으면 좋겠어요.”
이윽고 카리나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입에선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가족을 잃고 반역자의 후손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벼랑 끝까지 몰렸을 때도, 이렇게 침착하고 자비로울 수 있을지. 나만큼 불행해졌을 때, 당신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요.”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 어떤 생각보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허망함이었다.
“하…….”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카리나의 얼굴을 정확히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은 차분하고도 고요했다. 한 순간에 실수로 나온 말이 아닌,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게 너의 대답이구나. 네가 불행하지 않길 바랐던 내 불행을 바라는 게.”
허망함이 밀려나가고 난 자리엔 쓰디쓴 회의감이 몰려왔다.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한 건, 폐하의 평판을 위해서 한 제안이었지만, 동시에 그녀를 위해서 한 말이기도 했다. 이제는 나와 같은 성으로 불리게 될 그녀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다. 내가 그녀였어도, 자신과 반대의 삶을 살아온 내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했던 모든 선택을 ‘그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눈감아 주려고 했다.
하지만 나의 불행을 바란다는 말. 그 말까지는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