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각자의 자리(2)
“못 할 것도 없지.”
헬리온이 일리드의 날선 말을 여유롭게 받아 넘기며 덧붙였다.
“이번 기회에 나도 한 번 별궁 구경이나 해 볼까? 먼저 갔다와봤잖아. 어때, 지낼 만했어?”
“이 자식이!”
헬리온의 도발에 넘어간 일리드가 소리를 치며 헬리온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이번엔 헬리온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헬리온이 제게 뻗은 일리드의 손을 떼어내며 그의 팔을 압박하듯 세게 잡았다.
“하…….”
일리드가 자신을 저지하는 헬리온을 보며 뱉듯이 말했다.
“이슈텔이 네 편을 들어준다고 아주 기세등등하구나.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지켜보지. 너도, 네가 부리는 그 쥐새끼 같은 기사도 절대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니.”
그 말에 헬리온이 이를 부득 갈았다. 다시 주먹다짐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일촉즉발의 순간, 열린 복도 문에서 테셀라 경이 다급히 들어왔다.
“대공 전하, 멈추십시오. 곧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셔야 하는데, 또 소란을 일으키시면 안 됩니다.”
충직한 시종의 만류에 일리드가 그제야 눈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그는 헬리온의 어깨를 세게 밀치고는 황제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리드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참아왔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당장 침대에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그럴 수가 없어 근처에 있는 돌기둥에 몸을 기댔다.
“괜찮아, 이슈텔?”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걱정 가득한 헬리온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드가 떠났지만 그가 남기고 간 냉랭한 분위기는 쉽게 걷히지 않았다. 나와 헬리온은 복도를 나와 황궁 안뜰로 향했다. 함께 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던 말이 떠올랐다.
“참, 안 그래도 너한테 말할 게 있었는데.”
“무슨 말인데?”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며칠 후면 풍등 축제잖아. 올해도 같이 가자고 말하려고.”
“그게 벌써 일 년이나 지난거야?”
“응. 시간이 참 빠르지.”
“그러게 말이야. 아무튼 축제에 가려면 오늘부터 밤을 새가면서 일을 전부 끝내 놔야겠는걸.”
일리드와 마주한 이후 내내 굳어있던 헬리온의 얼굴에 이제야 미소가 번졌다.
“이번에도 몰래 가는 거야?”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당연하지.”
헬리온의 목소리는 어느새 기대감으로 잔뜩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나야 좋긴 한데 꼭 거기를 가야하는 이유가 있나 궁금해서.”
“응. 거기서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하고 싶은 말?”
헬리온의 푸른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데? 그냥 지금 말해주면 안 돼?”
“안 돼. 이제 며칠 안 남았잖아.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봐.”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헬리온이 안달이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말하니까 자꾸 기대되잖아.”
“기대해도 좋아.”
헬리온에게는 기대할 만한 일이었지만, 내겐 신중하게 준비해야할 일이기도 했다.
내게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듯했지만, 헬리온은 자신을 기다리는 수많은 정무를 돌보러 처소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저 하늘이 어두워지고, 수많은 풍등으로 물드는 날 밤. 일 년 전 그날과는 정반대가 되어야할 날을 준비해야 했다.
* * *
리젠트라 공작 부인 실비아는 무거운 몸을 끌고 의상실을 찾았다. 얼마 후, 황궁에서 열릴 작위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산달이 가까운 부인들은 경조사에 불참하는 일이 흔했지만 이번 행사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황궁에선 자르 리젠트라 공작뿐만 아니라, 실비아 리젠트라 공작 부인에게도 따로 초대장을 보내왔다. 부부가 함께 참석하라는 의미였다.
첫 아이와 둘째를 가졌을 때, 실비아는 공식 석상에 나서지 않았기에 임신한 몸에 맞는 외출용 드레스가 없었다. 오늘은 새로 주문 제작한 옷을 시착하기 위해 일부러 발걸음 한 것이다.
“어서오십시오, 리젠트라 공작 부인.”
의상실 직원들이 실비아를 반겼다. 직원들이 드레스를 준비하는 동안 실비아는 가게 한 쪽에 있는 여아용 드레스를 구경했다.
“어머나, 귀여워라.”
실비아는 배 속의 아이가 딸이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태아의 움직임이 앞서 두 남자아이 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루비아 선물을 살 때보다 예쁜 옷이 많이 늘었네.”
실비아는 진열대에 걸린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집었다. 그때, 그녀의 옆에 있던 탈의실 커튼이 확 열리며 그 안에서 누군가 나왔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젠트라 공작 부인.”
“아휴,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실비아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에보니 블라딘에게 짧게 목례했다.
“옷을 맞추러 오셨나봅니다, 블라딘 백작님.”
“예, 여기가 요새 귀부인들 사이에서 가장 소문난 가게 아닙니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순 없죠. 저도 새 옷 한 벌 맞추러 왔습니다.”
에보니가 실비아 앞에서 포즈를 취하듯 어깨를 활짝 폈다. 질 좋은 원단으로 만든 셔츠 프릴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찰랑찰랑 파도처럼 움직였다.
“그건 그렇고 리젠트라 집안은 참 대단합니다. 무려 공작 부인이 셋이나 있는 집안 아닙니까.”
에보니가 손가락 세 개를 내보이며 하나하나 접어갔다.
“리젠트라 공작 부인, 실비아 리젠트라. 윈테라 공작 부인, 이슈텔 리젠트라. 그리고 이제 곧 록펠트 공작 부인이 될 카리나 리젠트라까지. 이야, 이런 영광은 제국 역사상 전무후무합니다.”
에보니의 마지막 손가락이 접힐 때, 실비아는 목구멍까지 욕이 차오르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아이가 배를 뻥뻥 차는 것처럼, 저 능구렁이 같은 여자의 엉덩이를 한 대 걷어 차주고 싶었다. 카리나가 자신과 이슈텔과 같은 리젠트라로 묶이는 것도 화가 날 판에, 이제는 작위마저 같아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같은 공작 부인 작위라도, 공식석상에서 황제의 정부는 공작의 정부인보다 윗사람으로 분류됐다. 정부가 공작 부인 작위를 받은 것도 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은 남작, 자작, 백작 부인에서 그치거늘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서 위계질서가 꼬이게 된 걸까. 평생을 최고위 귀족으로 살아온 실비아에게 이번 일은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공작 부인, 이 드레스입니다. 시착해보시지요.”
마침 할 말도 없는데 잘되었다 싶었다. 실비아는 에보니를 뒤로하고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탈의실을 나온 실비아가 옷이 잘 나왔다며 만족해했다. 그녀는 대금을 치른 후 마차를 타고 의상실을 떠났다.
“백작님은 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의상실 직원이 소파에 늘어져 있는 에보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에보니가 망사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아까 시착한 옷으로 마무리만 해서 블라딘 저택으로 보내줘.”
“네, 알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에보니가 큰소리로 손가락을 튕기며 덧붙였다.
“아까 리젠트라 공작 부인이 주문한 드레스를 좀 볼 수 있을까? 우리 막내 언니가 애기를 가져서. 언니한테 임산부용 드레스를 하나 선물해줄까 하는데.”
“물론이지요. 마침 아직 드레스를 포장하지 않았으니까 이쪽 탈의실로 들어가셔서 구경해보세요.”
새로운 드레스를 주문받을 생각에 신이 난 점원이 빈 탈의실을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 실비아가 있었던 곳이었다.
“고마워. 그럼 구경하고 와서 주문할게.”
에보니가 점원에게 찡긋 윙크를 하고는 두꺼운 커튼을 젖혀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이 집이 옷을 잘한다니까. 옷감부터 디자인까지 아주 마음에 쏙 들어. 이 정도면 언니도 무척이나 좋아하겠어.”
커튼 밖으로 넘어오는 여유로운 목소리와 달리, 에보니의 손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제 코트 안에서 작은 천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초록빛 약초 가루가 담겨 있었다.
‘간만의 바느질이라 그런지 눈이 침침하네.’
에보니가 은빛 바늘을 꺼내 주머니에 꿰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실비아의 드레스가 걸린 마네킹의 치마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추잡스러울 데가 있나. 명색이 제국에서 제일가는 명문가인데, 하는 짓이라곤 대여섯 먹은 애들도 안 할 짓을…….’
드레스 가장 안쪽, 손도 잘 닿지 않는 애매한 부분에 주머니를 바느질해 달았다. 워낙 레이스가 겹겹이 쌓인 드레스라 몇 바늘 덧댄 것은 티도 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이복형제들의 옷을 바느질해주었던 일이 아주 헛짓거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레이스 사이로 바늘을 빼내며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 에보니가 송곳니로 실을 자르고 나서는 치마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막상 일을 마무리 짓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죄책감이 든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기꺼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런, 나도 초심을 잃은 건가. 형제들만 짓밟아 줄 수 있다면 더 우습고 치졸한 짓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늙은 아버지가 가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띄운 승부수가 에보니 자신이었다. 이렇게 직접 정적의 치마 아래 들어가 음모를 꾸미는 것도, 어릴 적부터 온갖 모욕을 다 겪으며 살아온 자신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보니 역시 자신의 그런 점이 무기가 되어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일이 썩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 못내 낯설게 느껴졌다.
‘어서 빨리 공작 위나 다시 돌려받아서 거지 같은 형제들 안 보고 살고 싶네.’
에보니가 실과 바늘을 코트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으며 탈의실을 나왔다. 그녀는 점원을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좋은 옷이네. 저거랑 비슷한 옷으로 한 벌 주문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