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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83화 (83/160)

83화 : 장례식

릴체 후작 부인은 유독 감이 좋은 분이셨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미리 주변을 정리해 두신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평온하게 잠들 듯이 돌아가셨다. 감기 몸살이었지만, 연세가 많으셨으니 노환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할머니는 장례식에서 울지 말라는 말을 남기셨다. 먼저 떠난 남편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기쁜 마음으로 보내달라고 하셨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 말만큼은 들어주지 못했다.

가장 슬퍼한 이는 자르였다. 할머니는 오빠를 많이 구박했지만, 그만큼 아픈 손가락으로 여기셨다. 그 마음을 잘 아는 오빠는 할머니에게 늘 살갑게 굴곤 했다.

할머니를 뉘인 관이 저택을 나가 근처 예배당으로 향하자 오빠가 통곡을 하며 관을 따라갔다. 이제 배가 제법 많이 부른 새언니도 할머니 생각에 눈물을 훔쳤다. 바깥출입이 잦지 않았던 실란다 백작 부인도 오늘만큼은 루비아를 데리고 후작 저로 왔다.

귀족들의 조문 행렬도 이어졌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간 릴체 후작 부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각 집안의 가주들이 모두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했다.

하지만 죽어서도 시끄러운 건 싫다고 했던 후작 부인은 친분이 있는 몇몇 가문을 제외하고는 화환이나 편지로 참석을 대신하라고 했다. 덕분에 후작 저 문 앞까지 왔다가 돌아간 귀족들이 태반이었다.

그래도 무슨 마음이셨는지 블라딘 가문의 조문은 받아주셨다. 가문의 대표로 에보니 블라딘이 왔다. 평소의 능글능글한 표정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제법 엄숙했다.

‘이복형제들에게 등 떠밀려서 온 건가.’

검은색 케이프를 두른 에보니를 보자 할머니가 보여주었던 편지가 생각났다. 에보니의 치부가 담겨있던 블라딘가의 편지. 할머니가 남긴 그 편지와 차용증을 어떻게 쓸지 앞으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했다.

황가에서도 조문객을 보냈다. 조문객이라고 해도 황족은 아닌, 황명을 받고 온 대신관과 사제들이었다.

황족은 친인척이 아니면 사가에 조문을 오지 않는다. 내가 정식 황태자비였으면 남편인 황태자가 왔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헬리온도, 일리드도 오지 않는 법이었다.

장례식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신관들이 예배를 준비했고 무거운 장송곡이 흘렀다. 가족들은 유리관 안에 뉘인 할머니 주변에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대신관의 기도가 이어질수록 오빠의 울먹임이 심해졌다. 평소엔 지루하고 단조롭기만 했던 기도문이, 장례식장에서 들으니 왜 이리도 서글프게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애써 슬픔을 억누르던 율리언도 기도가 끝날 무렵에는 눈이 붉어져 있었다.

“곧 있으면 아이도 태어나는데 뭐가 급해서 그렇게 빨리 가셨어요.”

자르가 유리관에서 손을 떼지 못하며 훌쩍였다.

아직 죽음이 뭔지 모르는 로시엔과 엔리케는 관에 든 할머니를 보며 의아해했다. 제 엄마에게 할머니가 왜 모두가 보고 있는 데서 잠든 거냐고 물었다. 아이들의 해맑은 질문에 실비아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 중 가장 어린 루비아가 사촌 오빠들을 따라 까치발을 들었다. 하지만 관이 높은 탓에 아이의 시야가 닿지 않았다.

“루비아, 물러나렴.”

실란다 백작 부인이 관에 손을 댄 딸에게 주의를 주었다. 자르가 아들들을 안아서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시킨 것과 달리, 백작 부인은 할머니에게 루비아를 보여주지 않았다.

‘루비아의 눈 때문인가.’

백작 부인은 할머니가 죽어서까지도 노란눈이들을 보기 싫어 할 거라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살아생전 루비아를 많이 예뻐하셨다. 설령 아이에게 평생을 미워했던 자의 피가 섞였다 하더라도, 그건 그 애의 잘못이 아니었다. 루비아도 할머니와 작별 인사를 할 자격이 있었다.

“루비아.”

“고모!”

루비아가 날 보고 방긋 웃었다. 아이는 제 사촌오빠들처럼 나를 고모라고 불렀다.

“잠깐 이리 와 볼래?”

내가 부르자 아이가 다가와 내 품에 안겼다. 나는 아이를 안아 올려 할머니의 관 가까이로 다가갔다. 루비아가 편히 잠든 할머니의 얼굴을 보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모, 엄마가 그랬는데 이제 할머니는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만날 수 있대요. 나 그래서 다음에 할머니를 만나면 고맙다고 말해줄 거예요.”

“뭐가 고마운데?”

“내 눈 예쁘다고 해줘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아이가 부끄러워하며 내 목에 팔을 감았다.

‘할머니가 루비아한테 그런 말을 해주셨구나.’

사람들은 전장을 뛰어다니던 젊은 시절의 벨로나 리젠트라만을 기억할 것이다. 노년의 모습도 젊은 시절과 다를 바 없이 무자비하고 잔혹할 거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카리나를 단두대 앞에 세웠던 것도, 결국 그녀를 죽이기 위함이 아닌 나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니까.

내 품에 안긴 루비아를 보았다. 카리나와 똑같은 황금빛 눈동자. 할머니가 그토록 증오했던 파비엘과 그 모친의 눈.

그러나 할머니는 루비아를 통해 그들과의 오랜 악연을 전부 씻어낸 듯했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루비아의 눈과 똑같은 카리나의 눈을 볼 때, 내 안에 어떠한 미움과 슬픔도 없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루비아를 내려놓은 후, 유리관 앞에 섰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잠든 할머니에게 입을 맞추듯 속삭였다.

“잘 가요, 벨로나 리젠트라.”

* * *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은 공교롭게도 내 생일 사흘 전이었다. 원래도 조용히 생일을 지내는 편이라 올해도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입관식과 날이 겹치게 되어 그마저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차라리 잘 됐어. 이런 슬픈 날에 모여 봤자 서로 마음만 무겁지.’

예배당을 나와 창밖을 보니 둥근 달이 떠있었다. 하루가 정신없이 가는 바람에 이렇게 밤이 깊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할머니는 왜 내게 그런 말을 남기신 걸까.’

몇 시간 전, 율리언이 공개한 할머니의 유언장이 떠올랐다. 충고와 잔소리로 가득한 장문의 편지를 받은 오빠와 달리, 내게 남긴 편지에는 단 한 줄만이 적혀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신전으로 가서 말리파를 찾거라.]

말리파는 릴체 후작 부인의 오랜 지인이자 신전의 신관이었다. 나도 어린 시절 몇 번 본 적 있었지만, 썩 유쾌한 사람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왜 그런 말을 남기셨나 궁금하면서도, 내심 말리파를 찾게 되는 일이 없길 바랐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방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옹다옹 다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웃음소리 같기도 했다.

‘누구지, 이 시간에?’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로시엔과 엔리케가 보였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 다투고 있었다.

“얘들아,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방문을 벌컥 열자 놀란 엔리케가 몸을 앞으로 돌렸다. 그 바람에 로시엔과 엔리케 사이에 있던 것이 두 동강 나 찢어졌다. 아이들의 손에 들린 건 찢어진 책이었다.

“아, 안 돼!”

벽난로 쪽에서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루비아의 목소리가 아닌, 남자의 목소리였다.

놀란 내가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 즉시 커다란 손이 튀어나와 내 입을 확 막았다.

“이슈텔, 나야.”

놀라 움츠린 몸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올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헬리온?”

헬리온이 내게서 천천히 손을 뗐다. 그는 황망한 얼굴로 로시엔과 엔리케를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아이들이 찢은 책을.

“그러니까 왕자님이 사이좋게 같이 보라고 했잖아.”

침대 끝에 걸터앉은 루비아가 팔짱을 낀 채 사촌 오빠들을 혼냈다. 잔뜩 풀죽은 로시엔과 엔리케가 헬리온에게 다가가 찢어진 책을 건넸다.

“죄송해요, 왕자님.”

“잘못했어요.”

책을 받아든 헬리온이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거대한 석상처럼 우뚝 선 그의 모습에 겁먹은 조카들이 내 뒤로 쪼르르 달려와 몸을 숨겼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헬리온, 너는 왜 여깄는 거고?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이렇게 왔대?”

열린 창문을 보니 또 몰래 벽을 타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계속 어찌된 영문인지 추궁했지만, 헬리온은 책이 찢어진 충격에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고모, 우리가 고모랑 놀고 싶어서 방에 왔는데 왕자님이 먼저 와 있었어요.”

야무진 루비아가 차근차근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그래서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자기는 고모한테 몰래 선물을 주러온 요정이라고 했어요.”

“요정……?”

“네, 그랬더니 로시엔 오빠가 이렇게 큰 요정이 어딨냐고 놀렸어요. 그랬더니 사실 자기는 왕자님이래요.”

요정에 왕자님이라니. 몰래 내 방에 들어온 헬리온이 아이들의 입막음을 하느라 아무 말이나 늘어놓은 모양이었다.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요정은 아니어도 왕자님인 건 사실이니까.’

난데없이 벌어진 상황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로시엔과 엔리케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희 둘, 왕자님 물건은 왜 찢은 거야?”

두 조카에게 묻자 로시엔이 씩씩거리며 동생을 가리켰다.

“고모, 내가 왕자님한테 선물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엔리케가 상자를 가지고 도망갔어!”

“아니야, 형이 혼자만 보려고 했잖아! 왕자님이 같이 보라고 했는데!”

엔리케도 지지 않고 형한테 화를 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갔다. 이대로 놔두었다간 누구 하나가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깨울지도 몰랐다. 그러면 헬리온이 여기 있다는 걸 들키게 될 것이다.

“너희들 그만 싸우고 먼저 왕자님한테 사과드려.”

내가 헬리온 앞으로 아이들을 떠밀었다. 형인 로시엔이 먼저 헬리온에게 다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앞으로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않을게요.”

“저도요.”

아직 말주변이 없는 엔리케가 형의 말에 수저만 올렸다.

헬리온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꾸할 힘도 없는 표정이었다.

“자, 너희들은 이제 방으로 돌아가서 자자. 헬리온,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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