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모조품
하루 종일 우중충했던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금방이라도 빗물이 떨어질 것 같았건만 용케 비는 내리지 않았다.
라비가 나를 데리고 온 곳은 북부 가신들의 저택이었다. 휘어튼 부인이 이곳에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았으나, 마차가 멈춘 곳은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별채였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시지요.”
라비가 내 머리 위로 검은 망토를 씌워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검은 망토를 입은 후 나를 안내했다.
좁은 길목을 굽이굽이 걷자 낡은 오두막 하나가 나타났다. 라비가 품에서 열쇠를 꺼내 오두막 문을 열었다.
망토를 벗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눅눅한 나무 냄새가 나는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며칠 전까지 휘어튼 부인께서 머무셨던 곳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북부 대공령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뒤따라온 라비가 벽에 붙은 등에 불을 붙였다. 어두웠던 방 안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불빛 아래로 나무 탁자 위에 놓인 목걸이와 낙서들이 보였다.
“휘어튼 부인이 모으던 것들입니다. 전부 공작 부인이 그려진 물건들이었습니다.”
나는 라비가 건넨 촛불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길이 닿는 곳곳마다 내 초상화가 담긴 작은 액자들이 걸려있었다. 로켓 목걸이에도, 종이에 그려진 낙서에도 모두 내가 있었다.
기이하다 못해 섬뜩할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온몸이 바싹 긴장되었다.
“텔리아 경.”
“예, 공작 부인.”
“휘어튼가에 대한 조사를 다 끝내놓고 왜 내게 알리지 않은 거죠?”
라비가 말없이 내 시선을 피했다. 그를 질책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가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헬리온 대공께서 완벽한 물증이 나올 때까지 공작 부인께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헬리온이요?”
“예.”
“그럼 그의 명을 어기고 내게 이렇게 알려줘도 되는 건가요?”
내 물음에 라비가 초록빛 눈을 깜빡이며 싱긋 웃었다.
“저는 공작 부인의 기사니까요.”
그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남부 가신들의 저택에 갔던 날, 제가 북부인이기 앞서 공작 부인의 기사라고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죠.”
“그에 대한 보은입니다. 나중에 알려지면 벌 좀 받죠. 큰 문제는 없습니다. 어차피 공작 부인께서도 아시게 될 이야기니까요.”
“……고마워요. 텔리아 경.”
라비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책상 옆으로 데려갔다. 의자에 앉아 로켓을 보고 있을 때, 라비가 뒤에 놓인 상자에서 기다란 서류를 꺼내왔다.
“휘어튼 부인과의 대화 내용을 담은 일지입니다. 저와 제 형 아론이 함께 작성했습니다.”
나는 라비가 건넨 종이를 받아들었다. 보름간의 날짜가 적힌 일지였다.
“천천히 전부 읽어 보시지요. 많은 이야기가 담긴 글입니다.”
라비가 내 시선이 닿지 않는 벽으로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일지의 첫 장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습격당할 뻔한 휘어튼 부인을 구해왔다. 발견 장소는 부인의 보호자의 집. 습격자들의 신원은 밝혀진 바 없지만, 남부 대공령에서 보낸 자들로 추측된다.
지난 몇 주간, 부인에게 감시가 여럿 붙었다. 부인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 큰 문제는 없었지만, 무슨 명령이 떨어졌는지 오늘 오후 열 시경 그 집을 급습했다.
습격자들을 전부 기절시켜 보는 눈은 없었다. 부인을 우리 쪽 사저로 모셔왔으나 충격이 컸는지 아직까지 의식이 없다.
-라비 텔리아 기록]
[휘어튼 부인의 의식은 돌아왔으나 계속해서 발작이 이어졌다. 믿을 만한 하녀들을 시켜 간호해보아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보호자의 집을 지켜보았다. 보호자는 부인이 사라지자 오히려 홀가분한 듯 부인의 물건을 전부 밖에다 버렸다. 새벽을 틈타 그것들을 모두 주워왔다. 윈테라 공작 부인의 초상화가 담긴 로켓이 대부분이었다.
부인이 머무르는 방에 그 물건들을 가져다주자 그제야 안정을 되찾았다. 부인은 그림 속 공작 부인을 딸이라고 불렀다. 이분은 당신의 딸이 아니라고 했다가 부인이 욕을 하는 바람에 재빨리 사과했다. 당분간은 부인의 망상에 맞춰주는 편이 나을 것으로 보인다.
-아론 텔리아 기록]
[휘어튼 부인은 완전히 미친 사람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리 분별이 명확해지고, 눈빛도 온순해졌다. 부인을 살펴본 하녀가 말하길, 몸 여기저기서 학대의 흔적이 보인다고 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방치하여 광증이 더 심해진 듯했다.
오늘은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질 정도로 차도가 있었다. 내가 누구냐고 묻기에 헬리온 대공을 따라온 북부 가신이며, 부인이 습격자들에게 피살당할 뻔하여 이리로 모시고 왔다고 대답했다.
본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냐고 물어보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부인은 모든 것이 떠올랐는지 심히 흐느껴 울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했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했다.
-아론 텔리아 기록]
[이른 오전, 휘어튼 부인이 하녀를 통해 내게 만남을 요구했다. 부인은 나를 보더니 정신이 온전할 때 모든 진실을 말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부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시에라 휘어튼은 독살당했다. 그리고 그녀를 살해한 사람은 볼테로 선대공이었다.
황태자가 승하한 이후, 남부 대공가와 휘어튼가는 약혼을 파기했다. 볼테로 선대공은 시에라 양을 위로하고자 값비싼 차를 선물로 보냈다.
시에라 양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 게 바로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눈치 빠른 하녀 하나가 의사에게 차를 가지고 갔더니 무척 구하기 어려운 독이 섞여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걸 알아냈을 때, 시에라 양의 병은 이미 깊어진 뒤였다. 휘어튼 경이 볼테로 선대공을 찾아갔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내 아들이 황좌는 필요 없고 그대의 딸과 결혼해 살겠다는데 어쩌겠나? 어느 한쪽이 죽어야 끝나는 관계면 그게 내 아들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일이 남부 내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달은 휘어튼 경은 수도와 북부 대공령에 볼테로 선대공의 만행을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무렵,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시에라 양이 마지막으로 일리드 대공을 만난 후 사망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볼테로 선대공은 그 일을 시해 미수 사건으로 조작했다. 시에라 양이 일리드 대공을 죽이려 했고 그 배후에 휘어튼 부부가 있다는 것이었다.
볼테로 선대공은 휘어튼 경이 수도와 북부에 연통을 넣은 것을 눈치챘다. 사건의 진실이 전 제국에 알려지면, 아들이 황태자가 되는데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볼테로 선대공은 휘어튼 경에게 누명을 씌운 채 적합한 절차도 밟지 않고 바로 처형을 진행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휘어튼 경이 끝내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건, 남은 부인이라도 살리기 위함이었다.
-아론 텔리아 기록]
[수도에는 아직 남부에서 보낸 자객들이 많았다. 그들은 사라진 휘어튼 부인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부인의 거처를 북부 대공령으로 옮기기로 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후, 휘어튼 부인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북부로 모실 거라고 하니, 무척이나 안도하며 알렌시아 선대공을 뵈어 모든 진실을 이야기해드리고 싶다고 했다.
부인을 모신 마차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수도에만 있는 특산품을 북부로 실어 보내는 마차라고 했으니 다른 이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수도에서 있었던 휘어튼 부인에 대한 기록을 마무리한다.
-아론 텔리아 기록]
* * *
떨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키며 마지막 줄까지 읽었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만큼 극심한 충격과 피로감이 몰려왔다.
테이블 위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마지막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기록이 남은 건가?’ 아론의 필체가 적힌 종이를 뒤로 넘겼다. 마지막 장에는 라비의 필체로 적힌 글이 있었다.
[오늘 오후, 슈리와 길을 걷다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어느 귀부인이 젊은 여자한테 얻다 대고 이런 모조품을 파냐고 마구 욕을 했다. 귀부인을 따라온 하인이 여자에게 커다란 액자를 돌려주었다.
자세히 보니 그 여자는 휘어튼 부인의 보호자였다. 그녀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빈민가 근처에 가서 액자를 버렸다.
슈리가 버려진 그림을 들고 왔다. 이번에도 역시 윈테라 공작 부인의 초상화였다. 아무래도 휘어튼 부인이 가지고 있던 물건인 듯했다. 값어치가 있어 보이기에 보호자도 일부러 버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녀의 말로는 휘어튼 부인이 찾던 그림이 이거 같다고 했다. 이곳을 떠나기 전, 부인은 자신이 모으던 물건을 전부 버려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초상화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모조품이라고 버려진 그림치고는 몹시 정교했다. 슈리가 리세리 영애에게 물어 진위 여부를 판단한 후, 그림의 처분을 결정하기로 했다.
-라비 텔리아 작성]
“공작 부인, 잠시 이것 좀 봐주시겠습니까.”
서류를 내려놓자 라비가 나를 불렀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있는 안쪽 벽으로 갔다.
라비가 벽에 손을 뻗어 검은 커튼을 걷었다. 등불을 들어 올리자 커다란 초상화가 보였다.
굽이치는 금발을 가진 여인이 나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열아홉 정도의 내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런 옷과 장신구를 착용하고 화가 앞에 선 적이 없다. 아무래도 모조품인 듯싶었다.
“이게 휘어튼 부인이 잃어버린 내 초상화인가요?”
라비는 대답 대신 무겁게 침묵했다. 그가 초상화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그림 오른쪽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라비가 가리킨 곳에 등불을 가져갔다. 그곳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시에라 라일리 휘어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와 닮은 그녀를 보았다. 내가 봐도 착각할 만큼 나와 무척이나 닮은 그녀.
모조품은 나였다.
그에게 나는, 그녀의 모조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