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황제의 두 동생(1)
나는 당분간 황궁을 떠나있기로 결정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갑작스레 악화된 릴체 후작 부인의 병 간호였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황궁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카리나에 대해 생각하기 싫었고, 그녀를 걱정하는 폐하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휘어튼가를 둘러싼 일리드와의 감정소모에도 지쳤다. 그를 상대로 힘든 싸움을 지속하는 헬리온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한 마음도 컸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당분간 이 모든 것들에서 멀어지는 거였다. 나를 태운 마차가 황궁을 떠나 릴체 후작가 앞에 도착했다.
“어서 와, 이슈텔. 할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셔.”
마중나온 율리언이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광장 앞에서 뺨을 맞은 이후, 후작 부인을 처음 뵙는 날이었다.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 이리도 어색했던 적은 처음인 듯싶었다.
“들어가, 이슈텔.”
율리언이 후작 부인의 방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저 왔어요.”
인기척이 느껴지자 후작 부인이 밭은기침을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못 뵌 사이에 할머니는 많이 여위어 계셨다. 후작 부인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한 후,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조용히 의자에 가서 앉았다. 할머니의 얼굴을 보는 것이 어색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많이 편찮으세요?”
“사람이 늙으면 그 흔한 감기로도 죽을 수 있는 법이지. 아프긴 하지만 그리 놀랄 것도 없단다.”
후작 부인이 다시 기침을 했다. 나는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할머니께 건넸다.
“너는 어땠느냐? 많이 아팠지?”
후작 부인이 물을 마신 후 덧붙였다.
“그때, 내게 맞은 뺨 말이다.”
“아…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그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단두대 앞으로 끌려간 순간 느꼈던 공포와 긴장감이 다시금 나를 덮치는 기분이었다.
“미안하다.”
후작 부인의 입에서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 나왔다.
“미안하다, 이슈텔.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기에 그런 거다. 그날,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어야 했거든. 네가 수모를 당할수록, 파비엘의 손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 없는 악인으로 자리 잡힐 거니까.”
“할머니…….”
역시 후작 부인이 카리나를 단두대에 세운 건 감정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짐작은 했지만 소름이 돋았다. 대체 이분은 어디까지 알고 무엇까지 계획하신 걸까.
“어떻게 아셨어요? 카리나가…… 파비엘의 후손인 거…….”
“루드비 실란다. 너희한테는 빈틈없는 어른처럼 보일 수 있어도 나한텐 한낱 어린아이일 뿐이란다. 재판이 끝난 후 무섭게 다그치니 내게 울면서 모든 걸 털어놓더구나.”
역시 실란다 백작이었구나. 예상대로 비밀이 새어 나간 쪽은 나도, 그녀 쪽도 아니었다.
“하지만 에보니 블라딘이 알고 있던 건 의외의 일이었지.”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하도 덤덤하여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에보니 블라딘이 카리나가 파비엘의 후손인 걸 알고 있다고요?”
“그래. 나한테 와서 그 애를 처형시켜달라고 하더구나.”
“어떻게 그런……?”
카리나와 에보니는 한패였다. 무척이나 견고하여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 그들의 동맹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이슈텔, 카리나가 에보니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을 거라 생각하니?”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카리나가 굳이 자신의 신분을 에보니에게 밝힐 이유가 없잖아요. 아는 사람이 많아져봤자 위험만 커지는 건데…….”
“맞다. 에보니 블라딘도 카리나가 아닌, 다른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얻은 정보라고 하더구나. 그 말을 토대로 자신이 조사를 했다고.”
에보니에게 조력자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대체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서 새어 나간 걸까.
“이슈텔, 정보가 샌 쪽은 너다.”
“예?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저는 아무한테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단호하게 할머니의 말을 부정했다.
“직접적으로 하는 말이 전부가 아니다. 넌지시 건넨 말, 흘러가듯 꺼낸 질문을 놓치지 않는 눈치 빠른 사람들이 있지. 그런 사람들 중에서 잘 생각해보렴.”
나는 입술을 깨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떠오르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할머니, 죄송해요. 당장은 모르겠어요.”
“그래, 나도 바로 말하라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떠올려보렴. 네가 했던 사소한 말과 행동들. 거기에 우리가 찾는 사람이 있을 테니.”
“그럼……. 그 사람을 찾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조져야지. 그러려고 내가 면죄권도 얻어다 준 게 아니겠니.”
후작 부인이 턱 끝으로 방 중앙에 있는 책상을 가리켰다. 고풍스런 마로니에 책상 위에 황제가 내린 면죄권과 여러 통의 편지가 쌓여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카리나를 죽일 생각이 없으셨던 거죠?”
며칠간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을 꺼냈다. 후작 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애를 죽여서 뭘 하겠니. 내 분노는 이미 오래 전에 다 씻겨 내려갔어. 다만, 내 안의 분노가 건재함을 보여주어야 황가와 귀족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기에 그리했지.”
“제가 거기서 카리나를 죽였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네가 그러지 않을 거란 확신도 있었지. 이슈텔, 넌 쉽게 남을 해치는 성격이 못 돼. 그간 카리나는 실란다 백작 건으로 평민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지.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귀족이고 평민이고 할 거 없이 사람들의 마음은 다 너를 향하게 됐어.”
“그런 걸 바라고 한 선택은 아니었어요.”
카리나가 들었으면 가증스럽다고 생각할 말이지만 진심이었다. 정적의 후손을 살렸다는 걸 다른 이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그 행동으로 칭송받을 생각 또한 없었다.
“이슈텔.”
후작 부인이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네게 많은 걸 해주고 싶다. 네가 황가의 견제를 받고, 많은 정적을 가지게 된 건 전부 다 나와 내 오라버니 때문이니까. 그러니 그에 대한 해결책을 남겨주는 것도 내 몫이지.”
후작 부인이 마로니에 테이블을 가리키며 위에 놓인 서류를 전부 가져오라 하셨다. 나는 서찰과 편지, 서류 등을 전부 품에 안아 넓은 침대 위에 놓았다.
그중 후작 부인이 가장 먼저 집어든 건 오래된 편지 하나였다. 낡은 편지 뒤편에는 황가의 붉은 인장이 찍혀있었다.
“이슈텔, 우리의 가장 큰 정적이 누구지?”
“블라딘 백작가가 아닌가요?”
“아니, 블라딘을 이용하는 황가란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약한 형님을 꼬드겨 호시탐탐 황위를 노리는 황제의 동생이지.”
황제의 두 동생, 알렌시아와 볼테로. 내겐 그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볼테로 황자는 내가 어릴 적에 남부 대공령으로 떠났고, 알렌시아 황녀는 할아버지와 사사건건 부딪친 기억만이 남아있다.
나는 자연스레 알렌시아 황녀를 떠올리며 후작 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황제의 조카들에 대해선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에 대해선 잘 알지. 알렌시아 황녀와 볼테로 황자. 쌍둥이지만 성격이 참 달랐어. 한쪽은 불같았고, 다른 한쪽은 음침했지.”
후작 부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프리모스 황태자가 태어나기 전, 귀족들 사이에선 황제에게 자식이 없는 것을 염려해 황태제를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고 갔단다.”
그 무렵 알렌시아 황녀에게는 아이가 없었고, 볼테로 황자에겐 어린 아들이 있었다.
손이 귀한 황가에서 슬하에 자식이 있는 건 큰 권력이었다. 자연히 볼테로 황자가 황태제가 될 수 있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프리모스가 태어나면서 전부 없었던 일이 되었다.
“황좌를 바로 눈앞에 두고 놓친 볼테로는 호시탐탐 다음 기회를 노렸단다. 바로 황위 계승권 정리였지. 황태자에게 불미스런 일이 생겼을 시, 다음 황위 계승자가 제 아들이 될 수 있게 해두고 싶었던 거야. 제가 안 되면 제 핏줄로라도 황위를 잇게 하고 싶은 욕망이 컸던 거지.”
“…….”
“볼테로는 우리 가문에게 연통을 넣었어. 리젠트라의 힘을 빌려 아들의 계승권을 얻어내고자 했지. 하지만 때마침 알렌시아 황녀가 아이를 가지는 바람에 그마저도 쉽지 않게 되었지만.”
“우리 가문은 황녀와 사이가 좋지 않잖아요? 황녀보다는 황자의 핏줄이 계승권을 가져가는 게 나았을 텐데,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가 있나요?”
“그런 이유는 없었단다. 다만 네 할아버지가 탐욕스런 황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황태제로 볼테로가 거론 될 때도 이렇다할 입장을 내놓지도 않았지. 오히려 귀족들을 선동해 황제에게 태제 책봉을 촉구하는 볼테로를 못마땅해 했어.”
할아버지와 볼테로 황자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나는 후작 부인이 건넨 편지를 열어보았다. 황자가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다. 안에는 자신이 황태제가 되게끔 도와달라는 말과, 알렌시아가 태제가 되면 리젠트라가에 피바람이 불거라는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볼테로는 우리에게 끈질기게 부탁했지. 하지만 네 할아버지는 사실 알렌시아를 황태제 감으로 여기고 있었어.”
“황녀가 우리 가문에 그렇게 적대적이었는데도요?”
“권력은 강력한 정적과 부딪치며 긴장을 유지할 때 온전히 지속된단다. 그 당시 리젠트라에게는 정적이 없었어. 황가도 블라딘도 모두 발아래 두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게 얼마나 불안정한 힘인지 알고 있었다. 우리의 힘이 강화될수록 불만을 가진 자들이 나타날 테니까. 차라리 황가에게 적당히 권력을 양보하여 지나친 반대 세력을 방지하는 게 현명한 편이지.”
“할아버지가 그 상대로 알렌시아 황녀를 생각했단 말씀이신가요?”
“맞아. 볼테로 황자는 속을 알 수 없어. 겉으로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도 반대쪽 손으론 칼을 쥐고 있지. 반면 알렌시아 황녀는 겉과 속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기에는 불같아도 말과 행동이 무척 올곧은 사람이야.”
후작 부인이 다른 편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번에도 볼테로 황자의 편지였다. 태어나지도 않은 누이의 아이 때문에, 제 아들의 계승 서열이 불명확해진 것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볼테로는 황태제 건과 후계 서열 건으로 우리 집안에 두 번 씩이나 고개 숙여가며 부탁했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그 때문에 겉으론 아닌 척해도, 우리 가문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뼛속까지 깊이 박혀 있을게다.”
결국 우리가 척을 진 쪽은 북부가 아니었다. 더 신경 쓰고 주의 깊게 살펴야 했던 쪽도 헬리온이 아니었다.
“네가 가깝게 지낸 일리드가 바로 그런 황자의 아들이다. 그동안 넌 그에게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