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균열
카리나의 발작은 단두대에서 내려온 이후 몇 날 며칠 동안이나 계속됐다.
처음에는 극심한 고열을 동반한 몸살을 앓더니, 열이 내리고부터는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기절했다 발작하기를 반복했다.
음식을 먹기는커녕 물이나 간신히 마시면 다행이었다. 그마저도 물에 독을 타서 자기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냐며 하녀들에게 죄다 기미를 시킨 후에 마셨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환각이 보였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환청이 들렸다. 단두대 앞에 섰을 때, 저를 보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동자. 이슈텔 리젠트라를 모욕했다는 말에 쏟아지던 야유.
‘아니야. 내가 더 힘들었고 내가 더 아팠어. 그런데 왜 날 욕하는 거야? 고작 그 여자한테 그 정도의 모욕을 줬다고? 그게 그렇게 비난받아야 할 일이야?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죽어야 할 만큼?’
극심한 공포감이 지나간 자리엔 이해 가지 않는 의문들만 남았다.
왜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걸까? 나를 평민들의 희망이라고 불렀다던 사람들이 왜 그리도 차갑게 돌아선 걸까?
원망과 절망만이 남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카리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큰 소리로 절규했다.
“리, 린턴 자작님. 브, 블라딘 백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덜덜 떨며 보고하는 하녀의 말에 카리나가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확 걷어냈다.
“당장 들어오라고 해!”
카리나의 호통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간 하녀가 재빨리 에보니 블라딘을 데리고 왔다.
에보니는 카리나를 보고는 들으라는 듯이 혀를 찼다. 산발이 된 은빛 머리카락과 붉게 핏발이 선 두 눈. 아무렇게나 걸친 옷과 여윈 몸이 딱 보아도 며칠 동안 미친 사람처럼 지낸 티가 역력했다.
“가엾게도 미쳐버렸군. 그래, 그런 일을 겪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침대에서 내려온 카리나가 발을 끌며 저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에보니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있던 물 잔을 집어 들었다.
촤악-
눈 깜짝할 사이에 에보니의 얼굴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공들여 넘겨 놓은 에보니의 멋진 머리카락이 그대로 축 가라앉아 버렸다.
“하…….”
그대로 굳어버린 에보니의 입에서 어이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물이 그대로 얼굴에 뚝뚝 흘러내렸다. 늘 여유로운 기색이 감돌던 보랏빛 눈이 일순 살벌하게 빛났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이 미친년이!”
카리나가 날카롭게 소리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에보니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에보니가 손을 뻗어 카리나의 손을 막았다. 가느다란 손목은 에보니의 억센 손에 잡혀 허공에서 멈추었다.
“넌 진짜 제대로 미친년이야! 그러지 않고서야 거기서 날 보면서 처웃고 있어?”
카리나는 그날 자신을 보며 웃고 있던 에보니의 얼굴을 기억했다. 악몽 속에서도 보인 그녀의 섬뜩한 표정.
단두대에 올라 광장 사람들에게 야유를 받던 때, 저 멀리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자신을 보고 있던 에보니 블라딘이었다.
‘백작, 당신이 왜 거기 있어? 나를 도와줘야지, 뭘 보고만 있는 거야!’
재갈 물린 입으로 열심히 뻐끔거렸다.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눈빛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에보니는 그런 자신을 보며 웃었다.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네가 말했지? 릴체 후작 부인한테 가서 날 죽이라고! 대체 어떻게 알고! 이 빌어먹을…….”
자신에게 숙청당한 집안 출신이냐고 말을 꺼냈을 때 알아챘어야 했다.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어디서 어떻게 들은 말인지 알아낸 다음에 무언가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이거 좀 억울한데? 왜 무조건 나라고 단정 짓는 거지? 애초에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건 내가 아니라 이슈텔 리젠트라잖아?”
“그 여자가 그랬을 리 없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내가 봤어. 내가 황궁에서 끌려 나갈 때, 날 보던 그 여자 표정을. 그 여자가 한 게 아니야.”
카리나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에보니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대단한 독심술사 나셨네. 표정만으로 안다고? 참나, 어이가 없어서 정말.”
“네가 아니라면 내가 목이 잘리기 일보 직전인데 거기서 보고만 있었겠어? 신났다고 처웃고 섰냐고!”
또다시 카리나의 분에 찬 비명이 이어지자 에보니가 재빨리 두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그래, 맞아. 내가 그랬어. 그러니까 입 닥치고 조용히 해, 머리 아프니까!”
전에 없이 크게 언성을 높인 에보니가 카리나의 어깨를 잡아끌어다 옆에 있는 의자에 던지듯 밀어 앉혔다. 카리나가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이자 에보니가 그녀의 팔을 잡아 의자 깊숙이 밀어붙였다.
“그러게 내가 시키는 대로 했어야지! 내가 말한 대로 폐하께 달려가서 울고불고 죽는다고 협박을 해서라도 황후로 만들어 달라고 했어야지! 네가 우물쭈물대는 바람에 애먼 면죄권이란 변수만 생겼잖아!”
처음 보는 에보니의 격한 반응에 카리나가 크게 놀랐다.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며 눈썹을 치켜떴다.
“릴체 후작 부인, 벨로나 리젠트라 그 망할 늙은이가 애초에 면죄권을 얻고자 그런 쇼를 벌인 거였어, 제기랄! 너까지 안 나대도 지금 충분히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제발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어!”
에보니가 화를 삭이려 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너도 봤지? 네 목숨이 얼마나 하찮은지. 뭐, 평민들의 자랑? 희망? 웃기지 말라 그래. 네가 아무리 기를 쓰고 꿈틀거려도, 이슈텔 리젠트라를 건드린 이상 뭣도 아니게 됐잖아.”
“뭐라고?”
“모두들 네가 파비엘 리젠트라의 후손이라 처형대에 올라갔을 땐 불쌍하다고 했어도, 이슈텔 리젠트라를 모욕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돌아섰잖아. 넌 딱 그 정도의 사람인 거야, 알겠어?”
에보니는 섣불리 릴체 후작 부인을 자극한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황제가 카리나를 버리지 않으리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었다. 단두대 위에 한 번 서보면 그제야 제 무력함을 느낀 카리나가 황후가 되기 위해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제 손으로 리젠트라가에 면죄권을 갖다 바친 꼴이 됐다. 제국민들 앞에서 반역자의 후손을 거두어준 이슈텔의 자비로움을 널리 알려준 꼴이었다.
“우리가 이슈텔 리젠트라를 몰라도 너무 몰랐어. 거기서 널 또 살리다니.”
에보니는 그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이슈텔에게 보낸 환호와 함성을 기억했다.
차기 황태자비가 될 공작가의 유일한 적녀.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약혼자마저 잃은 후 황가를 돌보는 젊은 여인.
그녀는 제국의 권력을 양분하는 황가와 리젠트라 공작가를 이어주는 교두보였다. 그녀의 존재가 황가와 공작가에 평화를 가져다주고, 전쟁을 막는 거라 생각하는 백성들의 믿음은 무척이나 견고했다.
에보니 역시 내심 놀랐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그 정도로 사랑받는 존재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만큼 허망했다.
“진짜 웃기지 않아? 애초에 넌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그냥 태어나 보니까 반역자의 후손이었던 것뿐이잖아. 그런 불쌍한 애 하나 살려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 여자는 그렇게 환호받고, 너는 천하의 못된 년이 돼서 욕을 먹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던 에보니가 맞은편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왼쪽 눈가에 길게 그어진 흉터가 보였다.
카리나에게 했던 말이 꼭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나도…….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데…….’
짧은 순간 감상에 빠진 에보니가 고개를 저으며 감정의 수렁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재빨리 평소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확실히 교훈은 됐지? 이슈텔 리젠트라보다 높은 곳에 있지 않는 한, 넌 언제라도 다시 그 처형대 위에 올라갈 수 있어. 사람들의 야유 속에서, 그 흔한 동정 한 자락 없이 목이 잘리는 거라고.”
에보니가 손가락을 들어 제 목에 대고 긋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카리나를 가두고 있던 양팔을 의자에서 뗐다. 그리고는 아직 물기가 남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늘 이 무례함은 봐줄게. 내가 생각해도 한 대 맞을 만한 짓이긴 했지. 하지만 두 번은 없어. 그러니까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록펠트 공작 부인 작위나 받아올 생각해, 카리나 리젠트라.”
제 본명을 부르는 에보니의 나긋한 목소리에 카리나가 큰 소리로 비웃었다.
“정말 괜찮겠어? 내가 황후가 돼도?”
의자에서 일어난 카리나가 에보니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내가 황후가 되고 황태후가 되면 당신부터 죽일 건데?”
“오, 그래?”
카리나의 도발에도 에보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리며 카리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황태후가 될 때까지 살아있으면 내가 생각보다 장수할 팔자인가 보네. 마음대로 해. 광장에 세워서 목을 치든, 관에서 꺼내 부관참시를 하든 네 뜻대로.”
에보니가 다정한 손길로 카리나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숄을 올려주었다.
“몸 관리 잘해. 나보다 오래 살아야 날 죽이든 살리든 할 거 아니야.”
기분 나쁜 미소를 남긴 채, 에보니는 뚜벅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처소를 나갔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혼자 남은 카리나가 처소 안을 서성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에보니 블라딘, 그 교활한 여자가 하는 말이 전부 다 사실이라는 게 뼈저리게 아팠다.
다시는 단두대로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비난과 야유를 받고 싶지 않았다.
「반역자의 후손은 공작 부인의 은혜를 잊지 말라!」
자신을 향해 소리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우습게도 그날의 사건이 그녀에게 남긴 건 공작 부인의 은혜가 아니었다. 에보니의 말대로, 공작 부인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 그날의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카리나가 테이블 위에서 나뒹구는 물 잔을 잡았다. 분노에 찬 절규와 함께 신경질적으로 던진 유리잔이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났다.
“하아…….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자조 어린 웃음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
살고 싶었다. 너무나 살고 싶어 발버둥쳤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떨칠 수 없는 운명이 제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동정에, 황제의 관심에 목숨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에보니가 했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선 지금보다 강한 힘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