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77화 (77/160)

77화 : 악몽

나는 떨리는 눈을 들어 황제 폐하를 보았다.

그분의 눈에 비친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온전히 나였던 적이 있을까.

리젠트라의 여식이 아닌, 그저 나라는 존재로만 봐주셨던 적이 있을까.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대답도,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으며 조용히 폐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면죄권. 예로부터 황가를 기만하는 자들이 공신이라는 이름 하에 얻어냈던 비겁하고 저열한 권리지.”

“…….”

“네 집안이 그 면죄권을 빌미로 황가에 무엇을 요구할지 궁금하구나. 이미 황태자비 자리까지 얻은 마당에 무엇이 그리 욕심나서 그런 걸 달라고 한 건지.”

폐하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의문이 담겨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하사하면서도 자신이 내린 면죄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몹시 걱정되는 듯했다.

“너와 네 가문이 그토록 바라는 그 종이 쪼가리나 들고 썩 나가라. 꼴도 보기 싫으니.”

황금 의자에 앉은 폐하께서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리셨다. 나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땅에 떨어진 두루마리 서찰을 주웠다.

카리나의 목숨과 맞바꾼 면죄권. 아니, 어쩌면 내 지난 삶과 바꿨을지도 모르는 이 권리.

나는 그것을 품에 안고 황제께 인사를 드렸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폐하. 저와 저희 가문에 다시없을 영광입니다.”

발끝을 돌려 황제전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걸음걸음이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비참했다.

폐하의 말대로 내가 차갑고 잔인해서일까. 쏟아지는 폭언을 견디고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상황이 우스웠다. 내 안에 남은 건 그저 허망함과 비참함뿐이었다.

잠시 멍한 상태로 터벅터벅 걸을 때, 근처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놀라 걸음을 멈추자 반대편에서 한 무리의 하녀들이 궁의를 데리고 복도를 가로질러 달렸다. 내가 말없이 자신들을 쳐다보자, 하녀 하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오더니 내게 상황을 보고했다.

“카리나 님의 상태가 좋지 않으셔셔요. 자꾸 발작을 하시는 탓에 폐하께서 궁의를 보내주셨습니다.”

“많이 심각한가?”

“그런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겨우 잠드셨는데 그마저도 채 한 시간을 못 주무시고 발작을 하며 깨는 바람에… 궁의가 계속 차도를 지켜보고 있지만 어제 일로 충격이 너무 크신 듯합니다.”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광장 위 단상에 오른 것만으로도 수많은 시선에 압도되어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도 그런 감정을 느꼈는데, 단두대 위에 선 카리나는 그보다 더 무서웠을 것이다. 온전히 제정신이라면 그게 더 이상할 상황이다.

“그래, 알았다. 가보아라.”

하녀가 일행을 따라서 카리나의 처소로 갔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궁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어수선했다. 후작가의 사병이 궁에 들이닥친 탓에 기사단의 보초는 삼엄해졌고, 카리나의 처소를 지키는 병사들도 배로 증가했다.

하녀들의 분위기도 평소보다 훨씬 침울했다. 이쪽이 황제전과 카리나의 처소가 있는 동쪽 궁이라서 더 그럴 수도 있었다.

다시금 카리나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보다 더 크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그때, 뒤에서 황제전의 무거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팡이를 짚은 폐하께서 카리나의 처소 쪽으로 가고 계셨다.

“폐하…….”

나는 그분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걸음을 재촉하는 탓에 지팡이를 짚은 손이 몹시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저러다 넘어지시진 않을까. 나는 걱정스런 눈길로 폐하를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폐하께선 채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지팡이를 놓치고 말았다. 옆에 서 있던 하녀들의 눈이 커지며 헉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아무도 그분께 다가가지는 못했다.

몸이 성하지 않게 되면서 온화했던 폐하의 성격도 점차 예민하게 바뀌었다.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거동이 불편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하녀들의 도움을 받는 걸 극히 꺼려하셨다.

그나마 내가 곁에서 손을 잡아드릴 때는 괜찮아하셨다. 그 일도 최근 들어선 카리나에게 내어주어야 했지만.

그래서 하녀들도 함부로 폐하께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전의 하녀장 소피가 난감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도움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폐하께 가까이 다가갔다. 복도를 굴러다니는 지팡이를 들고 폐하께 가서 무릎을 접어 앉았다.

“폐하.”

그분께 지팡이를 건넸다. 폐하께서 푸른 눈을 들어 나를 보셨다. 어릴 적의 나를 볼 때처럼 더없이 차갑고 무미건조한 눈빛이었다.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고 말았다. 지팡이를 쥔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폐하께선 끝내 나를 부르지 않으셨다.

“소피, 나를 잡아라.”

폐하의 붉은 망토가 내 치맛자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주인 잃은 지팡이를 쥔 채, 나는 한참을 우두커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귓가에 들리는 카리나의 비명 소리가 자꾸만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방으로 돌아와서 책상 위에 서찰을 올려 두었다. 폐하께 받은 면죄권. 그것을 얻기 위해 내가 견뎌야 했던 모진 말들이 너무도 아팠다.

그렇게 한참을 침대에서 뒤척이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 * *

악몽을 꾸었다.

나는 여덟 살이었고 프리모스, 헬리온과 함께 황궁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저 멀리서 황제 폐하께서 오시는 걸 보았다. 소꿉놀이를 하며 놀던 프리모스와 헬리온이 폐하를 발견하고는 그분을 향해 달려갔다.

폐하께서 두 아이를 양팔에 안아 번쩍 올리며 환히 미소 지어주셨다. 하지만 내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다. 폐하께서 아이들을 하나씩 바닥에 내려놓으셨다. 마침내 폐하의 손이 비었을 때, 나는 기대에 찬 마음으로 그분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폐하께선 나를 외면하셨다.

「얘들아, 나쁜 아이와 놀지 말라고 했잖니.」

폐하께서 두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내게서 몸을 돌리셨다.

꿈속의 내가 폐하를 향해 달려갔다. 붉은 망토 자락을 양손에 꼭 쥐고 울면서 소리쳤다.

「폐하, 저는 나쁜 아이가 아니에요. 저도 봐주세요. 안아주세요. 예뻐해 주세요.」

폐하의 두 손이 나를 확 밀쳐냈다. 뒤로 떠밀린 순간, 등 뒤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나를 잡아당겼다. 몸이 뒤로 넘어가면서 세상이 뒤집혔다.

열여섯 살이 되었다.

몇 달 전, 황후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나서 폐하께선 내게 황궁의 안살림을 맡기셨다. 이모와 다른 귀부인들이 많이 도와주었지만 어려운 점이 많았다. 하지만 부족한 모습을 보여선 안됐다. 나는 폐하께 늘 좋은 모습만 보여드려야 하니까.

폐하께 내가 열심히 한 일을 보고 드리러 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폐하의 성에 차지 않았던 걸까. 폐하께선 그 흔한 칭찬 한 마디 해주지 않으셨다.

아니, 오히려 잘하면 잘할수록 내 모든 것이 불쾌한 모습이셨다. 왜 그럴까, 대체 왜. 풀리지 않는 의문이 계속되는 사이, 폐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셨다.

스쳐 가는 폐하의 팔을 잡고 소리쳤다.

「왜 제게만 이리 차갑게 대하십니까? 제가 리젠트라여서 그런 겁니까? 제 몸에 흐르는 피를 전부 뽑아내면, 그제야 저를 있는 그대로 봐주실 겁니까?」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폐하의 차가운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폐하께서 손을 들어 내 손을 떼어내셨다. 몹시도 단호하고 냉정하게.

또다시 누군가 등 뒤에서 나를 잡아당겼다. 끝없는 암흑 속으로 추락하던 나는 딱딱한 나무 단상 위로 떨어졌다.

스물네 번째 생일을 앞둔 나. 현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몸에는 두꺼운 밧줄이 묶여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단상 아래 보이는 드넓은 광장. 그곳을 가든 메운 사람들이 나를 향해 야유와 욕설을 내뱉었다.

「타고난 핏줄이 전부인 가증스러운 여자!」

「황족을 전부 잡아먹은 재수 없는 여자!」

‘아니야. 나는……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아무리 소리쳐도 재갈이 물린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쳐도 몸을 구속한 밧줄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단상 위로 올라와 내게 다가왔다.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일리드!’

살았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서 이 밧줄을 끊어내고 나를 데려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내 팔을 잡고 단두대로 향했다. 그가 형틀에 나를 꿇어 앉혔다. 고개를 들자 서슬 퍼런 칼날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일리드를 보고 소리쳤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러나 그는 재갈 아래로 나오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된 사실 하나가 있었다.

‘아, 한 번도 듣지 못했구나. 그가 날 사랑한다는 말.’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냉정하고 무감정했다. 마치 자신의 삼촌처럼.

단두대의 움푹 파인 곳에 내 목이 놓여졌다. 사람들의 야유가 점점 더 거세졌다.

모든 것을 체념한 내 앞에 누군가 다가와 멈춰 섰다.

사람들의 야유가 일순 찬사로 뒤바뀌었다.

누굴까. 누가 이렇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

반짝이는 구두 끝이 내 턱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시선이 닿은 곳엔 태양을 등지고 선 카리나가 있었다. 건국제 때의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목엔 황후의 목걸이가, 두 손엔 날카로운 도끼가 들려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래도 정말 후회하지 않아?」

타악-

카리나가 도끼를 휘둘러 팽팽한 밧줄을 끊었다.

스릉-

눈 깜짝할 사이에 단두대의 칼날이 내 목 위로 떨어졌다.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비명을 지르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잘린 목의 고통이 현실에서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네?”

놀란 유모가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몰리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나를 품에 끌어안아 주었다. 따뜻한 그 품에 안겨서 나는 목이 쉬도록 울었다.

오랜 시간 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을 토해내듯, 그날 밤이 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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