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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76화 (76/160)

76화 : 정적의 딸

깊은 잠에서 깨어난 건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황궁 안, 내 처소였다. 깨고 나서도 머리가 아픈 탓에 한동안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몰리…….”

침대에 기대 눈을 붙이고 있던 유모를 불렀다. 화들짝 놀란 몰리가 재빨리 물 한 잔을 가져와 내게 건넸다.

“아가씨!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하도 안 일어나셔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몰리가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울먹였다.

“우리 아가씨. 귀하게만 자란 분이 그렇게 험한 꼴로 잡혀가다니. 그 큰 비밀을 혼자 가슴에 품고 얼마나 속을 앓았을까…….”

“소문…… 다 났지……?”

내 말에 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폐하의 시녀가 파비엘 리젠트라의 후손이라는 거, 그리고 아가씨가 그걸 다 알면서도 숨겨줬다는 걸요.”

다시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가장 큰 고비는 넘겼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들도 만만치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어?”

“아유, 말도 마세요. 아주 다들 아가씨 걱정을 하시느라……. 리젠트라 공작님이 제일 많이 걱정하셨고, 대공 전하들도 아가씨가 깨어나면 연락주라고 하셨어요.”

그래, 오빠가 무척이나 걱정했었지. 몸을 추스르는 대로 오빠와 새언니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릴체 후작 부인께서 어제 황제전에 오래 머물다 가셨어요. 곧 황제 폐하께서 면… 면…… 면 뭐라 그러더라?”

“면죄권?”

“아, 그래 맞아요. 황제 폐하께서 곧 그걸 주실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면죄권이라니. 어제 아침에 카리나가 황궁에서 끌려나갈 때만 해도, 이 모든 사건이 면죄권으로 종식될 줄은 몰랐다.

“카리나는?”

광장에 있던 사람들의 야유 소리와 경련을 일으키며 혼절한 카리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몰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거기 하녀들이 그러는데 상태가 좋지 않대요. 충격이 컸는지 계속 기절해 있다가 깨어나도 미친 사람처럼 발작하고……. 음식은커녕 물조차 제대로 못 마신다고 하더라고요. 누가 자기를 죽일 것 같다면서.”

그럴 만도 하지. 나는 내 손에 들린 물 잔을 보며 새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깨어나서 남이 건네는 물 한 잔 못 받을 정도로 그녀의 충격은 컸던 것이다.

“참, 그리고 아가씨. 황제 폐하께서 깨어나는 대로 황제전으로 오라고 하셨어요.”

“폐하께서?”

“예. 폐하께서도 모든 일을 전해 들으셨으니 아가씨께 묻고 싶은 게 많지 않으실까요?”

그래. 폐하께서도 충격이 크시겠지.

나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지금 가시게요?”

“응, 그래야지. 폐하께서도 내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텐데, 어서 가서 괜찮은 모습을 보여드려야지.”

재빨리 욕실로 가서 간단히 씻고 나왔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여전히 지치고 수척해 보였다.

“너무 아파 보이는데.”

급한 대로 화장대에 있는 옅은 립스틱을 들어 입가에 발랐다. 그래도 아파 보이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더는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황제전으로 향하는 내내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오고 갔다.

황제 폐하께서도 이제는 이해하시겠지. 그간 내가 왜 그렇게까지 그녀를 경계했는지.

‘폐하께선 뭐라고 하실까? 그간 오해해서 미안하고, 그 애를 살려주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실까?’

손목을 내려다보니 아직까지도 포승줄에 묶인 자국이 남아있었다.

폐하께서도 많이 걱정하실 것이다. 나까지 그렇게 황궁에서 압송되어 단상에 세워졌으니.

폐하께서 나한테 고맙다고 말씀하시며 운다면, 나 역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동안 깊어졌던 폐하와의 감정의 골은 그렇게 메워가면 될 것이다.

“고하여라.”

하녀가 안쪽을 향해 내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곧 폐하의 허가가 떨어지고 나는 조심스레 황제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제전 안으로 들어서자 금빛 의자에 앉아 계신 폐하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밤이 깊은 탓에 방이 어두워 폐하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많이 놀라셨겠지. 밤새 걱정하셨을 거야. 폐하께 카리나에 대해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건 사과드려야겠지.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머리카락 끝을 정리하며 폐하의 앞에 섰다.

“폐하, 찾으셨습니까?”

폐하께서 보실까봐 손목의 레이스를 잡아당겨 줄에 묶인 자국을 가렸다. 괜찮다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일부러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심려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폐하. 저는 괜찮-”

“심려? 누가 심려를 한단 말이냐? 내가 널?”

“예……?”

생각지도 못한 폐하의 반응에 당황해 반문했다. 폐하께서 탁 소리가 나도록 세게 책상 서랍을 여셨다.

그 안에서 기다란 두루마리가 나왔다. 황가의 인장이 찍힌 서찰이었다. 폐하께서 나를 향해 서찰을 던지셨다.

“……!”

종이 옆면에 눈을 찔린 내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벌린 채 폐하를 바라보았다.

“폐… 폐하……?”

“이 못된 것! 잔인하고 극악무도하기가 이를 데가 없어!”

진노한 황제의 음성이 황제전을 가득 울렸다.

“지금껏 나를 속이면서 즐거웠느냐?! 그 애를 네 발밑에 두고 네 알량한 우월감을 채울 수 있어서 속이 후련했느냔 말이다!”

“폐하, 그게 무슨-”

종이에 찔린 눈이 쿡쿡 쑤시며 아파왔다. 하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정말로 참기 힘든 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었다.

내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폐하의 질타가 계속 쏟아졌다.

“어쩐지 처음부터 카리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하녀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어. 그 궂은 마구간 일을 시킬 때도 이상하다 했지. 고얀 것 같으니. 넌 모든 걸 다 가졌으면서 그 불쌍한 아이가 편해지는 건 조금도 못 견뎌?”

“폐하, 그게 아니라 전-”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이냐! 그 애에게 작위를 내릴 때는 감히 황제 앞에서 보란 듯이 불만스런 얼굴을 하더니, 그 후로는 귀부인들을 선동해 따돌리고 괴롭히지를 않나. 네가 하는 짓거리를 보아라. 그토록 수준 낮은 짓거리를 하고도 네가 황태자비라고 할 수 있겠느냐?!”

“…….”

“왜 유독 그 아이만 그리도 못살게 구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가는구나. 카리나가 파비엘 리젠트라의 후손이라 그런 거였어!”

폐하께서 걱정하시리라 생각하고 이곳에 온 내 자신이 한심해졌다. 폐하의 마음이 온통 그녀에게 쏠려있다는 걸,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자비롭다고 생각하는 내 처사가, 폐하의 눈에는 그녀를 짓밟고 괴롭히기 위한 행동으로만 여겨지는 것이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카리나가 누구인지 말을 해줬어야지! 그래야 내가 그 애를 보호해줄 수 있었는데. 너 혼자만 알고 있다가 결국 단두대에까지 서게 해? 내 은인이나 다름없는 아이한테, 네가 감히 그런 수모를 겪게 한단 말이야?!”

폐하께서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책상을 쾅하고 내리치셨다. 나는 놀라지도 않고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머리가 멈춘 것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폐하의 눈에 비치는 나는 세상에 다시없을 악인이었다. 그런 분을 상대로 무어라 변명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하긴 제 혈육도 죄다 잡아 죽이는 리젠트라의 핏줄이 어딜 가겠나. 네 몸에 그 피가 가장 진하게 흐르지 않느냐?”

내가 미동조차 없자 그게 또 화가 났는지 폐하의 언성이 더욱 높아졌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 그 가녀린 애를 꿇어앉히고 회초리가 부서져라 매질을 한 거겠지. 황가의 여인이 직접 나서서 회초리를 쳤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하물며 너는 아직 정식 황태자비도 아닌데, 얼마나 그 애를 직접 때리고 싶었으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

“내가 본 인간들 중 제일 끔찍하다고 생각한 네 할아버지와 그 누이가 차라리 나을 지경이다. 그들은 잔인할지언정 제 욕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라도 했지. 그런데 넌 뭐냐? 안 그런 척하면서 결국 뒤에서 네 욕심을 다 채우지 않느냐. 비열하기가 이를 데가 없어. 넌 그 늙은이들보다 더 악질이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모욕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가만히 듣고 있을수록 속이 뒤틀리는 기분에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겨우 억눌러 참았다.

‘왜 내가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지……?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손이 하얘지도록 세게 주먹을 쥐었다. 참기 힘든 모멸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잠식시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말은 다음에 이어질 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처음부터 네가 맘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너희 가문과 사돈 같은 걸 맺고 싶지도 않았어!”

“…….”

“돌이켜보면 넌 어릴 적부터 참 뻔뻔스러웠어. 내가 프리모스와 헬리온에게만 관심을 보일 때도 주눅 든 기색 하나 없이 황궁을 활보하고 다녔지. 머리가 커서는 기 싸움을 하는 건지, 늘 그렇게 뚱한 표정으로 날 대하고. 그 어린애가 황제를 무서워할 만도 한데 오히려 이겨먹으려고 들었지.”

“…….”

“너 말고 다른 대안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도, 난 너 같이 차갑고 잔인한 애를 며느리로 맞지 않을 것이다. 보아라, 이런 말을 듣고 있는 지금도 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잖느냐.”

“…….”

“너 같은 애에게 내 조카를 내줘야 하다니. 삼촌으로서 미안할 뿐이다.”

황제의 말이 끝나는 순간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맥없이 풀렸다. 모멸감이 훑고 간 자리에 남은 건 삭막하고 건조한 감정들뿐이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뿌리부터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아들도, 조카들도 내어주고 싶지 않은 정적의 여식. 십여 년의 시간을 함께했어도, 결국 나란 존재는 그것밖에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 나와 프리모스를 맺어주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는 걸. 어쩔 수 없이 나를 황가에 받아들이면서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걸.

그분께 나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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