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처형식(3)
툭 소리와 함께 매듭이 풀리며 밧줄이 끊겼다. 카리나의 몸을 고정 시켜두던 줄이었다.
다시 도끼를 들어 그녀의 팔을 묶었던 매듭을 끊어냈다. 그리고 그녀를 잡아당겨 단두대 아래로 밀어냈다.
손이 풀린 카리나가 제 입에 묶여 있던 재갈을 풀었다.
“고, 공작 부인!”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물러서.”
나는 다시 도끼를 들고 단두대 앞으로 갔다. 팽팽한 끈을 내리치자 섬뜩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칼날이 떨어졌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피도 묻지 않았지만 서슬 퍼런 칼날이 뿜어내는 공포감에 광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겁을 먹었다.
나는 도끼를 옆에 버려두었다. 당장이라도 털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남은 힘을 쥐어짜내 간신히 제자리에 섰다. 나는 카리나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를 내 뒤에 두었다.
“실수가 아니라 선택이었습니다. 잘못이 아니니 바로 잡지 않겠습니다.”
나를 쳐다보는 후작 부인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쳤다.
“후회하는 날도 있겠죠. 스스로가 원망스러운 날도 있으리란 걸 압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조차 견뎌보겠습니다.”
단두대 앞에 서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그녀의 불행을 바란 적이 없다는 것을.
비록 나와 폐하 사이를 가로막고 나의 것을 탐내며 빼앗아 들려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그녀에게서 들은 단편적인 이야기, 그리고 에시같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은 몇몇 사실들이 전부였다.
그녀의 삶에 행복했던 순간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기쁨보다는 슬픔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대부분인 삶이었을 것이다.
반면 내 삶은 어땠을까. 소중한 사람들과의 이별을 겪었지만, 분명 슬픔보단 행복한 날들이 더 많았다. 눈물짓는 날도 있었지만 웃는 날이 더 많았다.
승리자의 후손과 패배자의 후손. 나와 그녀의 삶은 너무도 완벽히 반대였다. 내가 행복했던 만큼 그녀는 불행했다.
‘전쟁에서 이긴 쪽이 그녀의 할아버지였다면…….’
어쩌면 내 삶이 되었을지도 모를 순간들이었다. 내가 그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황궁 쪽에서부터 커다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의 전언을 알리는 신호였다.
“멈추시오! 황명이오!”
황명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모두 뒤를 돌아보았다. 황궁 방향에서 기사단이 오고 있었다.
가장 앞장서서 말을 타고 달려오던 사신이 후작 부인이 있는 단상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사신은 단걸음에 후작 부인의 앞으로 가더니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내밀었다. 후작 부인이 의자에서 일어서서는 공손히 황제의 서신을 받아들었다.
뒤이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황궁 기사단이 사람들을 헤치고 넓게 길을 만들었다.
“저분들은……?”
“두 분 대공 전하야!”
그 길로 들어서는 두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헬리온과 일리드였다. 두 대공을 알아본 귀족들이 먼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자, 평민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고 대공들을 맞이했다.
헬리온과 일리드가 후작 부인의 앞에 가 섰다.
“릴체 후작 부인. 황제 폐하께서 처형을 멈추라 명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단두대를 내리고 카리나 린턴을 풀어주시지요.”
일리드의 말에 후작 부인이 황제의 서신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인장을 뜯지도 않은 상태로.
“선황께서 리젠트라 가문의 일은 황제의 재가 없이, 우리 가문 내에서 처리할 수 있게 윤허해 주셨습니다. 설마 폐하께서 부황의 결정을 번복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후작 부인.”
일리드가 고집스런 노부인을 설득하려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후작 부인이 고작 힘없는 여자 하나 죽이자고 이런 일을 벌이진 않으셨을 거 아닙니까.”
“하지만 폐하께선 힘없는 여자 하나를 살리고자 다시 한번 리젠트라와 대립하시는 거 아닙니까.”
황제의 서신 따위론 후작 부인을 굴복시킬 수도, 설득할 수도 없었다. 일리드는 곧바로 자신이 들고 온 최선책을 꺼내놓았다.
“후작 부인, 원하는 것을 말씀해 보십시오.”
“원하는 거……, 원하는 거라…….”
딱딱하게 굳어있던 후작 부인의 표정이 그제야 살짝 풀어졌다. 후작 부인이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황제의 두 조카를 보았다.
“정 그렇게 폐하께서 저 죄인을 살리고 싶어 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 늙은이가 한발 물러나 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게 그만큼의 보상을 해주셔야 할 겁니다.”
“보상이라면?”
“우리 가문에 면죄권을 주시지요.”
“면죄권이라고요?”
“예. 리젠트라와 릴체 가문에 어떠한 문제가 생기더라도 황제는 관여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는 특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노부인의 말에 일리드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면죄권이라니. 이런 특권은 폭군을 끌어내리고 힘없는 황제를 추대시킨 공신들에게나 주어지는 권리였다. 하물며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닌데 면죄권을 요구하다니. 앞에 있는 대공들은 물론, 광장에 모인 귀족들도 놀라 웅성거렸다.
‘할머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 면죄권을 요구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혼란스러움만 가중됐다. 어쩌면 처음부터 할머니가 노린 것이 이거였을까.
“왜요? 못 주시겠습니까?”
머뭇거리는 일리드를 향해 릴체 후작 부인이 추궁하듯 물었다.
“싫으시면 어쩔 수 없지요. 저는 제가 하던 일을 마저 하겠습니다. 뭐 하느냐, 다들 죄인을 다시 매달지 않고!”
후작 부인의 호통에 릴체 후작가의 사병들이 나와 카리나가 있는 단상 위로 올라왔다. 카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병사들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녀의 팔을 잡아 다시 단두대로 끌고 갔다.
“드리겠습니다!”
그때, 일리드의 옆에 서 있던 헬리온이 재빨리 말했다.
“후작 부인께서 말씀한 면죄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후작 부인의 물음에 헬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엔 일리드가 헬리온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헬리온,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무엇이 중요한지만 파악해. 폐하께서 어떻게 해서든 카리나 린턴을 살려 데려오라고 하셨잖아.”
헬리온이 강한 어조로 일리드에게 반박했다. 하지만 일리드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저쪽이 면죄권을 요구했어. 그렇게 함부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야.”
“일리드 대공께선 영 불편하신 듯합니다?”
후작 부인의 지적에 일리드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가 대답하기 전에 후작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께 여쭤보고 오겠다는 말씀을 하실 거면 돌아가시지요. 어차피 우리 가문의 일은 황제 폐하께서도 관여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그깟 면죄권, 없었던 이야기로 하지요. 어차피 저는 저 죄인을 죽이는 게 목적이었으니까요.”
“…….”
일리드가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면죄권 부여에 동의한 헬리온과 달리, 일리드는 여전히 망설이는 쪽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반대편 단상에 있는 나와 카리나를 보았다. 일리드의 시선이 나를 향하다 내 뒤에선 카리나 쪽으로 갔다. 잠시 후, 그는 헬리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카리나 린턴을 살려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될 겁니다. 면죄권은 제가 보장하지요.”
헬리온이 후작 부인에게 말했다. 후작 부인이 시선을 돌려 일리드를 보았다. 일리드가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헬리온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께서도 윤허하실 겁니다.”
그의 대답에 후작 부인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두 대공을 등지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 섰다.
“테브론 제국의 백성들이여! 자비로운 황제 폐하께서 리젠트라 공작가에 면죄권을 하사하셨다! 내 기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일 것이며, 그 대가로 반역자의 후손을 살려주겠다.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이 오늘 일의 증인이 될 것이다!”
“황제 폐하 만세!”
“테브론 제국 만세!”
후작 부인의 선언에 백성들이 환호하며 황제의 자비로운 처사를 찬양했다.
“죄인을 풀어주어라.”
후작 부인의 명에 병사들이 잡고 있던 카리나를 놓아주었다. 카리나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단상에 엎드려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크게 떨리던 몸은 곧 경련을 일으키듯 고통스럽게 뒤틀렸다.
대공들을 따라온 황궁 사용인들이 카리나를 부축해 단상을 내려갔다. 하인의 등에 업힌 카리나가 마차를 향해 가는 동안 사람들의 비난과 야유가 쏟아졌다.
“반역자의 후손은 공작 부인의 은혜를 잊지 마라!”
“다시는 공작 부인을 모욕하지 마라! 오늘 이 일을 잊지 마라!”
‘끝났구나. 이제 정말 다 끝났어.’ 긴장이 풀리며 간신히 서 있던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가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자 누군가 내 몸을 붙잡아 주었다.
“이슈텔!”
“헬리온.”
고개를 들자 걱정이 가득 담긴 헬리온의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힘없이 늘어지는 머리를 헬리온의 몸에 기댔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현기증이 몰려왔다.
“이제 다 괜찮아, 이슈텔. 같이 황궁으로 돌아가자.”
나를 잡아주는 헬리온의 손과 팔이 따뜻했다. 긴장감에 차갑게 식었던 내 몸이 조금씩 녹는 것만 같았다.
귓가에 어지럽게 울리던 이명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슈텔.”
그러나 잠시간의 평화는 나를 끌어당기는 이에 의해 깨져버렸다. 헬리온의 어깨를 세게 밀쳐낸 일리드였다.
“나와 같이 돌아가요, 이슈텔.”
일리드의 말에 발끈한 헬리온이 무섭게 눈을 치켜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헬리온은 소란을 원치 않는 듯 우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나는 지친 눈을 겨우 뜨며 일리드를 올려다보았다. 못 본 사이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은 더욱 많이 자라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반가움보다는 원망이 더 크게 느껴졌다. 언제 바라보아도 늘 가슴이 뛰었던 그의 두 눈을 못 본 척 피해버렸다.
“헬리온과 가겠습니다.”
나는 일리드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헬리온의 옆에 가 섰다.
“가자, 헬리온.”
나는 헬리온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을 내려왔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일전에 일리드가 나를 찾지 않은 것에 대한 되갚음인지, 아니면 내 마음에 변화가 생긴 건지 나조차도 혼란스러웠다.
헬리온의 손을 잡고 마차로 가는 길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 부인, 늘 행복하세요!”
“자비로운 공작 부인, 황가의 큰 축복이십니다!”
카리나를 비난했던 이들의 입에서 더없이 다정한 축복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