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리젠트라와 블라딘(2)
“편지가 참 먹먹하고 구구절절하여 중요한 부분만 읽어주겠네.”
릴체 후작 부인이 품 안에서 오래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블라딘 가문의 상징인 백합 모양의 인장이 찍힌 편지였다.
“‘존경하는 릴체 후작 부인, 차마 남들에게는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제 막내딸 에보니는 본처가 낳은 아이가 아닙니다. 그 때문에 이복형제들의 괴롭힘을 받고 자랐으니 늙은 아비로서 미안한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
“‘제가 죽고 나면 다른 아이들이 막내를 지금보다 얼마나 더 학대할지 차마 상상하기조차 힘듭니다. 부디 아이만을 가엾이 여기어 블라딘 저택을 떠나 살게 해주십시오. 블라딘이 리젠트라에게 다시는 하지 않을 간곡한 청입니다.’”
후작 부인이 편지를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제 아비의 필체가 적힌 편지를 본 에보니의 얼굴에 굴욕감이 번졌다.
“그 뒤로 자네에게 관심이 생겨 이것저것 알아보았네. 친모는 블라딘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였다지? 자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숨기려 백작 부인이 낳은 아이라 속인 거고.”
“…….”
“어찌할까 고민하다 결국 자네에 대한 감금령을 완화시켜 주기로 결정했지. 블라딘이 리젠트라의 서출을 도운 것처럼, 이번엔 리젠트라가 블라딘의 서출을 돕기로 한 거지. 그제야 파비엘의 편에 선 자네 집안이 이해가 가더군. 얼마나 재미있었겠어? 적자니 서자니 하며 같은 집안끼리 싸우는 모습이.”
“…….”
“난 이미 그때 알았어. 자네 아버지가 자네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고작 하녀가 낳은 자식을 너무 사랑해서 평생의 숙적인 내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아니지, 자네 아버지는 그럴 위인이 못 돼. 본처가 낳은 망한 자식들보단 하녀의 피가 섞였더라도 싹수가 있는 자식을 택했겠지.”
릴체 후작 부인이 소파 뒤로 몸을 깊이 기댄 채 에보니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제 오랜 정적이었던 남자를 무척이나 빼닮은 얼굴. 그러나 눈앞의 젊은 여인은 제 아비에게는 없는 인내심과 현실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하녀의 자식이라 눈총을 받고 자라서 그런가? 확실히 보통 귀족들보단 상대하기 까다로운 아이야.’
릴체 후작 부인은 앞으로를 위해 에보니 블라딘의 기를 꺾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내가 자네를 동부의 아카데미니, 남부와 북부의 대공령이니 제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해준 건, 전부 자네를 향한 이복형제들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함이었어. 그래야 자네가 작위를 물려받았을 때, 더욱 미쳐 날뛸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면 자네 집안도 우리처럼 내분이 발생할 수도 있고. 참으로 완벽한 복수지, 그렇지 않나?”
“그렇게 해서 후작 부인이 얻으시는 게 무엇이죠? 이미 블라딘가는 공작에서 백작으로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 제국이 블라딘도 황가도 아닌 리젠트라의 것임을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하신 겁니까?”
최대한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지만 에보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높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후작 부인이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렇게까진 안 하지 않았나.”
“예……?”
“자네가 서출이라는 거. 자네 집안과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에보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의 형제들은 술주정뱅이에 노름꾼이었다. 제아무리 블라딘이어도 귀족들 사이에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에 언니 하나가 술에 취해 어느 파티장에 난입해서는 에보니가 하녀의 자식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적이 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제국에서 서자 출신이 작위를 물려받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귀족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고 있었다.
멸시와 냉대는 당연하고 혼처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 게다가 정치적인 문제와 엮이게 되면 서출이라는 이유로 작위에서 끌어내려지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
비록 술주정뱅이에 노름꾼일지언정 에보니의 형제들은 백작 부인이 낳은 적자였다. 그들이 물고 늘어져 법정에까지 서게 된다면, 에보니는 작위와 신분을 모두 박탈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백작 부인의 딸로 입적시켰지만, 이는 친자 검사를 하면 뒤집힐 서류상의 명목이었다.
“자네같이 영리한 사람이 블라딘을 물려받는 건 내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 그럼에도 내가 자네의 치부를 밝히지 않은 건, 그대가 내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지.”
“후작 부인의 상대가 되는 날엔 밝히실 건가요?”
“그런데 그럴 날이 올 것 같진 않군.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나한테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이 테브론 제국에 아무도 없다고.”
“그래서 그 목줄을 쥐고 평생 절 옥죄시겠다, 그 말씀이신가요?”
“딱히 그러지도 못할 것 같군. 보다시피 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고 자네는 앞길이 구만리지 않은가.”
제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후작 부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노부인은 팔짱을 낀 채 건조한 눈빛으로 에보니를 응시했다.
“자네가 아니어도 지금 자네가 하고 있는 황가의 개 노릇은 누군가 하게 되어 있어. 평생을 호시탐탐 황위를 넘본 황제의 동생이 어떻게 해서든 황제를 구슬려 제 편으로 만들었을 테니까.”
“…….”
“내가 잘 모르는 사람과 일을 꾸미는 것보단, 블라딘가를 통해 움직이게 하는 게 낫지. 그게 내가 치부를 쥐고 있는 서출이면 더 좋고. 그래야 내게도 그들을 저지할 무기 하나가 생기는 게 아닌가.”
“결국… 제 지난 삶이 전부 후작 부인의 계획하에 놀아났다는 거군요.”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군.”
남의 인생을 손바닥 위에 놓고 굴린 이치고는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벨로나 리젠트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상대로 에보니는 자신이 너무 안일했단 걸 깨달았다.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에보니의 마음속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허망함으로 가득 찼다. 동시에 앞으로에 대한 걱정도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 늙은이는 내가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도 이미 다 알고 있어.’
자신이 어떤 이와 손을 잡았는지 알면, 그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놓았을 것이다. 벨로나 리젠트라는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이었다. 분명 에보니 자신과 황가의 패색이 짙은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카리나에 대한 일만큼은 아니었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카리나를 살려둔 것. 그것은 벨로나 리젠트라의 예상 밖을 벗어난 최대의 변수였다.
‘결국 내가 이용해야 하는 건 카리나, 그 여자야. 그 여자를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해.’
에보니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슬슬 모든 것이 지루해지기 시작한 후작 부인이 크게 하품을 했다.
“이제 자네가 여기 온 목적이나 말해보게. 내게 뭘 바라고 파비엘의 후손을 밀고한 거지?”
“카리나 린턴, 아니 카리나 리젠트라를 처형시켜 주십시오.”
에보니가 흔들림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플레코 광장에 세워 목을 치시든 매달든,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는 앞에서 죽여주십시오.”
“푸흡.”
에보니의 말에 후작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의 진짜 의미를 모르는 에보니는 살짝 긴장한 채 부인의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이제야 조금 흥미가 생기는군. 왜 그런 부탁을 하는 거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여자가 합심해서 실란다 백작을 끌어내리는 성과를 이루지 않았는가?”
“말을 안 들어서요.”
“말을 안 들어?”
“예. 제가 죽은 언니의 복수를 도와주었는데, 정작 그녀는 절 돕는 걸 망설이더군요.”
“그래서 죽이겠다고?”
“그 정도면 죽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감히 블라딘과의 거래에 태만했으니까요.”
이제야 슬슬 긴장이 풀리는지 경직되었던 에보니의 입가에 평소 같은 의뭉스런 미소가 걸렸다.
릴체 후작 부인이 지그시 에보니의 보랏빛 눈을 응시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다른 블라딘 가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귀족들 가운데서도 특히 콧대가 높고 욕심이 많았던 이들. 명예와 권력을 목숨보다 중시 여기던 대귀족.
하지만 눈앞의 이 젊은 여인은 그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문의 설욕이 아닌, 순전히 개인적 이유로 리젠트라와의 싸움에 나선 이.
‘이런 아이는 어찌 다루면 좋을까.’
후작 부인은 제게 귀찮은 숙제가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작,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려주겠네.”
“정말이십니까?”
에보니가 환히 미소 짓자 후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서준 덕분에 자네는 잠시나마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을 거야.”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두고 보게. 이번에도 결국 이기는 건 우리 리젠트라가 될 것이니.”
카리나 린턴의 체포 명령이 떨어진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 * *
이상하게도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그 목걸이가 떠올랐다. 별다른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다 내 목에 걸린 장미 목걸이가 눈에 띄었을 뿐.
‘평소엔 생각나지도 않는데, 웬일이지.’
스스로에게 이상함을 느끼며 책상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손을 뻗어 맨 뒤쪽을 더듬어 보았다. 그런데 잡혀야 할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딴 곳을 보던 내가 고개를 숙여 서랍 안을 보았다. 그러나 금빛 장미 목걸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분명 여기다 놓았는데.”
당황하여 서랍 안에 있는 물건을 몽땅 책상 위로 빼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카리나의 목걸이는 보이지 않았다.
오래전, 카리나를 황궁에서 쫓아내던 날, 그녀는 내가 던진 목걸이를 가져가지 않았다. 그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파비엘 리젠트라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꼴이니 가져가지 않는 것이 옳았다.
나는 그녀가 남기고 간 목걸이를 주워 아무도 몰래 내 방에 두었다. 그런데 목걸이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애비게일!”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로 하녀장을 불렀다. 밖에 있던 애비게일이 재빨리 처소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공작 부인?”
“누가 내 방을 청소하지?”
“제, 제가 직접 합니다.”
“내 방 서랍에 손을 댄 적 있나?”
“어, 없습니다. 고, 공작 부인께서 책상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하셔서…….”
내 목소리가 평소보다 신경질적이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애비게일의 반응이 유난히 어색했다.
그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내가 자세히 캐물으려는 순간, 몰리가 반쯤 정신 나간 얼굴로 내게 뛰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