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 고작 이 정도
누구 하나 죽일 듯이 소리치는 카리나의 기세에 회초리를 든 하녀가 겁을 먹고 걸음을 멈추었다.
하녀는 손에 든 회초리를 다른 이에게 떠넘기고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다른 하녀들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심지어 하녀장 애비게일마저도 보지 못한 척했다.
힘없는 하녀들에게 황제의 총애를 받는 카리나는 대하기 껄끄러운 상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물쭈물하던 하녀가 살려달라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카리나가 소리쳤다.
“공작 부인, 당신이 내게 회초리를 칠 자격이나 있습니까? 나도 황가의 예법을 배워서 압니다. 제아무리 공작가라 할지라도 같은 귀족에게는 매질을 하지 못한다고요. 오직 황족만이 회초리를 들 수 있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당신은 아직 황태자비도 아니잖아요!”
“공작 부인은 황태자비가 되실 분입니다!”
귀부인 중 하나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카리나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될 사람이란 거지 됐다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 당장 폐하께서 새 황후를 들이신다고 하면 그분은 황족이 되겠죠. 하지만 황태자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황태자비 예정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카리나의 말에 귀부인들이 경악했다. 카리나가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외쳤다.
“공작 부인, 지금 당신은 황태자비가 아니라 그저 생과부나 다름없어요.”
“생과부……?”
“왜요? 내 말이 그리도 충격적이신가요? 남한테 천박한 본성을 운운했을 때, 이 정도 말을 들을 각오는 하셨어야죠. 어차피 말만 안 할 뿐 다들 속으로 생각하고 있잖아요. 약혼자는 죽고, 다음 남편은 누가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궁에서 홀로 지내는 여인이 과부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말문이 막힌 날 보며 카리나가 신랄하게 비웃었다.
“남들이 그러더군요. 공작 부인, 당신이 황가에 들어오는 바람에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신 거라고. 당신이 황족들을 잡아먹은 거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겼다.
의식이 흐려지는 것처럼 귓가가 웅웅대면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경악하는 이들의 표정, 비난조로 오가는 언성, 이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에보니의 시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회초리를 든 하녀에게 다가갔다. 하녀의 손에서 뺏은 회초리를 들고 카리나의 앞에 섰다.
다음 순간 나뭇가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카리나의 잇새에서 채 삼키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아까 전보다 더 큰 소리가 나며 카리나의 어깨와 등에 붉은 핏자국이 맺혔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생과부였다. 결혼을 얼마 앞두고 남편이 될 사람이 죽었으니, 나를 두고 여러 가지 말이 오간 것도 알고 있었다.
황궁에 들어와서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황후 폐하께서 승하하셨다. 국혼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약혼자가 죽었고, 그 기점으로 황제 폐하의 건강도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리젠트라의 여식이 황가를 망친다는 수군거림. 하지만 감히 그 누구도 내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차마 죽이지 못해, 내 손으로 거두고 만 이 여자를 제외하고는.
가시 돋친 나뭇가지를 내리칠 때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기억들이 스쳐 가듯 떠올랐다.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프리모스가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했던 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리드를 만나고부터는 그런 생각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결국 그것도 잠시였을 뿐. 지금 일리드는 내게 기쁨이 아닌 슬픔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픈 만큼, 나 역시 헬리온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탁-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회초리가 두 동강 났다.
그 순간 멍해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귓가에 어지럽게 웅웅대던 잡음이 한순간에 꺼지고 흐려졌던 시야도 다시 밝아졌다.
주위는 조용했다. 사람들은 모두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겁에 질려 잘게 떨리는 수많은 눈동자들이 전부 나를 향해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내가 아는 내 모습이 아니었다.
악에 받쳐 제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하는 여자, 이성적인 가면 아래 잔인한 본성을 숨기고 있는 사람.
떨리는 손에서 나무 회초리가 떨어졌다. 카리나의 어깨와 등에 붉다 못해 검푸른 상처가 보였다. 그녀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아서 몰랐다. 이렇게 깊은 상처가 났는지.
결국 화풀이였다. 그간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왔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전부 그녀에게 쏟아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고작 이 정도의 사람이었던 거야.’
어릴 적부터 늘 빈틈없이 강한 모습만 보여야 한다고 들어왔는데. 결국 이 여자 때문에, 아니, 그날 그런 선택을 한 나 자신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비참함을 억누르며 새장 밖으로 나갔다. 내가 멀어지자 등 뒤에서 카리나의 찢어질 듯한 절규가 들려왔다.
* * *
정신이 돌아온 건 해가 저물고 나서였다.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내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잠들어버렸다.
손을 내려다보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가시 돋친 회초리를 쥐면서 내 손에도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지금쯤이면 황궁에 소문이 다 퍼졌겠군.’
내 손에 이 정도 상처가 났다면 카리나의 몸에는 더 심한 상처가 났을 것이다. 어쩌면 에보니의 말대로 며칠은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공작 부인, 애비게일입니다.
하녀장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애비게일이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지금 당장 황제전으로 오라 하셨습니다.”
* * *
“공작 부인!”
황제전에 채 당도하기도 전에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 소피 하녀장을 발견했다. 소피는 한달음에 내게 달려오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몸을 덜덜 떨었다.
“고, 공작 부인, 황제전에 들어가시기 전에 무어라 변명이라도 생각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폐, 폐하께서 몹시 진노한 상태라…….”
“안에 카리나가 있나?”
“예. 상처를 치료받고 바로 황제전으로 와서는…… 린턴 자작이 우느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폐하께서 블라딘 백작님을 부르셔서 자초지종을 물으셨습니다.”
“블라딘 백작도 안에 함께 있나?”
“아닙니다. 백작님은 잠깐만 머물다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더 깊이 묻지 않아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소피에게 먼저 알려주어 고맙다고 말한 후 황제전 앞에 섰다.
“황제 폐하, 윈테라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라!
금빛 문 너머로 폐하의 진노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붕대 아래 감긴 상처가 찌릿하게 아파왔다. 하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으며 황제전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전 안에는 금빛 의자에 앉아 계신 황제 폐하와 그분의 발밑에 엎드려 숨죽여 흐느끼는 카리나가 있었다. 투명하게 비치는 옷 아래로 검푸르게 짓물러 터진 상처가 보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나를 발견한 폐하께서 버럭 소리를 치셨다.
“정말 네가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것이냐? 네가 어떻게 이렇게 심한 짓을 벌인단 말이냐!”
“폐하, 저를 질책하시기 전에 제게도 이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미 다 들었다! 이 아이의 고양이가 네 새를 죽였단 이유로 매질을 했단 거 아니냐! 에보니가 널 말리자 대신 맞겠냐는 소리도 했다며! 어떻게 블라딘가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러니까 블라딘은 리젠트라의 일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폐하. 전 블라딘 백작에게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 것뿐입니다.”
언성을 높이는 폐하와 달리 내 목소리는 차분하다 못해 무정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황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블라딘가는 황제의 외가였다. 며느리가 될 내게 모후의 가문이 굴욕을 당했으니 화가 나실 만도 했다.
“카리나가 블라딘 백작과 친분이 있다는 걸 아시면서도 백작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으셨습니까? 그럼 적어도 제 이모인 투렌 남작 부인도 함께 부르셨어야죠.”
“황궁 안의 하녀들이나 귀부인들은 모두 다 네 편일 텐데 불러서 무엇한단 말이냐!”
“그래서 절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아이에게 매질한 걸 사과해라.”
“싫습니다.”
“이슈텔!”
폐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다그치자 카리나가 그분을 말리려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어깨에 통증이 왔는지 고통에 찬 비명을 내뱉었다. 폐하께서 깜짝 놀라 카리나에게로 다가가셨다.
엉엉 우는 카리나와, 그녀를 달래주는 황제 폐하.
진절머리가 났다. 보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아 눈을 꼭 감고 머리를 비우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이 끔찍한 상황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대체 그 새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폐하 역시 넌더리가 난다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셨다.
“죽은 새와 똑같은 새를 구해다 주겠다. 그러니 이제 이 아이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짓 좀 그만두거라, 이슈텔!”
“똑같은 새라고요?”
폐하의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예. 어디 한 번 전 제국을 뒤져보십시오. 하지만 못 찾으실 겁니다. 그 새는 폐하의 죽은 아드님이 제게 선물해 준 새니까요!”
프리모스의 이야기에 폐하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가의 상징과도 같은 푸른색 눈동자. 프리모스와 일리드, 그리고 헬리온이 가진 눈과 같은 눈이었다. 폐하의 눈을 마주하자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오는 듯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프리모스가 제게 직접 하지 못하는 말을 새에게 가르쳐서…… 그렇게 마음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
“이 황궁에 이제 프리모스를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두들 두 분 대공들에게 익숙해지고, 죽은 황태자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잊혀 가겠지요. 저도 그런데 다른 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폐하께는 말도 못 드립니다. 자식을 잃은 폐하께 제 마음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어찌합니까?”
“…….”
“그래서 프리모스가 선물해준 새를 볼 때마다 그를 기억했습니다. 그렇게 저라도 기억해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새를 폐하께서 그리도 아끼시는 저 아이의 고양이가 물어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사과를 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