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66화 (66/160)

66화 : 마음 한 조각

나는 씁쓸한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새장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며칠 뒤에 새언니 실비아가 황궁 새장에서 귀부인들의 모임을 주최하기로 했다. 간단한 티파티이긴 해도 실비아가 여는 자리인 만큼 내가 먼저 새장 정리를 하기로 했다.

“메이. 며칠 후에 새장에 손님들이 많이 오시니까 그날엔 얌전히 노래만 불러야 해. 너무 시끄럽게 떠들고 날 놀리면 안 돼, 알았지?”

“라~ 라~ 라~”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생각에 신이 난 메이가 벌써부터 목청을 가다듬으며 가창력을 뽐냈다.

공작새는 나무 주위를 거닐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작은 새들은 모이통 앞에서 귀여운 목소리로 짹짹거렸다. 칸은 사냥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얼음독수리도 보이지 않았다.

“메이, 뮬은 어딨어?”

“헬리온! 헬리온!”

“헬리온이 뮬을 데려갔다고?”

메이가 흰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뒤를 돌아보자 헬리온이 팔에 뮬을 얹은 채 새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 헬리온. 뮬이랑 산책 다녀오는 거야?”

“응. 북부 밖에서 얼음독수리를 기르는 건 처음이라. 녀석이 잘 적응하나 걱정되기도 해서.”

뮬은 나와 메이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횃대로 날아와 앉았다. 이제는 제 몸집보다도 커졌건만, 메이는 다정하게 뮬을 반겨주었다.

반면 다른 새들은 잔뜩 겁을 먹었다. 내내 차분했던 새들은 뮬이 파란 날개를 쫙 펴며 날자 혼비백산하며 제 새장으로 도망쳤다. 아직 성체가 되지 않았지만, 맹금류가 가진 특유의 기운에 작은 새들이 압도당한 듯했다.

얼음독수리는 다른 새들에게는 없는 특유의 푸른빛과 냉기가 있었다. 새들은 그런 뮬을 무서워했고, 뮬은 자신의 존재가 공포의 대상이란 것도 모른 채 해맑게 다른 새들에게 다가가곤 했다.

“뮬이 가여워. 자기 딴에는 친해지겠다고 다가가는 건데 새들이 모두 피하잖아.”

헬리온이 공작새를 쫓아가는 뮬을 보며 중얼거렸다.

“난 다른 새들도 얼음독수리랑 잘 어울릴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봐.”

“뮬은 메이가 키운 덕분에 착하잖아. 다른 새들도 처음 보는 종이라 어색한 거지, 시간이 지나면 친해질 거야.”

“그럴까?”

“응,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자.”

뮬에게서 시선을 뗀 내가 헬리온을 보았다.

“요샌 어떻게 지냈어? 많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안 그래도 가신들한테 시달리다 오는 길이야. 일리드 형이 다시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니까 우리도 그에 대비를 해야 한다고 어찌나 잔소리를 하던지.”

“그 사람이 요새 유독 열심이긴 하지.”

일리드를 떠올리니 다시금 기분이 저조해졌다.

은둔 생활을 끝낸 일리드가 적극적으로 황태자 자리를 노리면서, 남부와 북부 가신들 사이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은 서로를 탐색하며 함부로 발톱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다. 남부와 북부 가신들은 비밀리에 자신들을 지지하는 중앙 귀족과 결탁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리젠트라 가문과 릴체 가문이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중앙 귀족들은 한동안 혼란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일리드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아직 지지 세력을 정하지 못한 이들은 난감해했고, 마음을 굳힌 이들은 가신들을 통해 어떻게서든 대공들에게 연줄을 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형과 대립해야 할 날이 오리란 건 알고 있었어. 오히려 이 정도면 생각보다 늦은 거지. 하지만 난 지금 이 상황이 별로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치 우승자가 정해진 사냥 대회에 들러리로 참여한 기분이야.”

“헬리온…….”

“괜히 내 기분 생각해서 아니란 말은 하지 말아줘. 나도 눈치라는 게 있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헬리온의 입가에 쓴 웃음이 걸렸다. 평소의 당당한 모습과 달리 지금 그의 미소는 씁쓸하다 못해 자조적이기까지 했다.

“폐하께서는 일리드 형을 황태자로 삼기로 마음 굳히신 모양이야. 그렇지 않은 이상 내게 이렇게까지 모질 게 대하실 이유가 없지.”

아니라고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단 걸 알기에 나는 조용히 침묵했다.

“내가 조금만 더 유약했더라면 벌써 황궁을 떠났을 거야. 이 판이 언제부터 계획되고 짜여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뜻대로 움직이는 장기 말이 되고 싶지는 않아. 내 패배가 정해진 판이라면 더욱.”

그 말을 하는 헬리온의 목소리는 몹시도 담담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평소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이슈텔, 난 황태자가 되기 위해서 황궁에 온 게 아니야.”

“그럼……?”

“난 널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거야.”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심장에서 울리는 듯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지는 바람에 세상이 멈춘 듯 모든 감각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네가 황태자비가 아니라면 나도 황태자가 될 이유가 없어.”

멀어졌던 감각은 헬리온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며 돌아왔다. 그의 푸른 시선은 오직 나만을 담고 있었다.

“나도 알아, 네가 일리드 형을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어.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조금이나마 나도 봐줄 것 같아서. 하지만…… 너한테 난 언제나 두 번째였잖아. 황태자한테도, 일리드한테도.”

“…….”

“일리드를 만나고 온 다음에, 마치 공정해지려는 의무감에 날 만나러 오곤 했단 거 알아. 그래도 좋았어. 그렇게라도 날 보러오는 게 좋았고, 함께 있으면 행복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난 이 순간에도, 난 네 마음 한 조각조차 갖질 못했잖아.”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던 헬리온의 눈동자에서 시린 눈물이 맺혀 흘렀다.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센 아이였다. 그런 그가 내 앞에서 이렇게 눈물을 보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내 눈시울도 같이 뜨거워졌다.

삼촌인 황제에게는 영문도 모른 채 차별받고 있었다. 적으로 돌아선 형은 그를 자꾸만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십여 년 만에 돌아온 황궁. 모든 것이 낯선 이곳에서 유일하게 기댈 곳은 나 하나뿐이었을 텐데, 나는 그래주지 못했다.

“미안해, 헬리온.”

일리드와 거리를 두고 나서야 비로소 헬리온의 마음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내게 일리드가 첫 번째였듯, 헬리온에겐 언제나 내가 첫 번째였다.

일리드가 나를 돌아보지 않은 것에 슬퍼했으면서, 정작 나는 헬리온의 마음을 마주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헬리온.”

헬리온에게 손을 뻗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가 내 손을 끌어 제 뺨에 대었다. 힘없는 내 손이 마치 구원이라도 되는 듯, 그는 말없이 한참을 날 놓아주지 않았다.

“이슈텔, 키비르 강에서 풍등을 날렸던 날, 기억해?”

“응, 기억나.”

“그날 내가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와 키비르 강에 간 적이 있어. 어머니는 저 수많은 사람들 중, 소원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거라고 하셨어. 떠올릴 소원이 없다는 건, 그만큼 현실이 행복하다는 거니까.”

“…….”

“그날 너도 소원을 떠올리지 못했잖아. 나중에 바라는 것이 생기면 이루어지는 게 소원이라고 했지.”

“그래, 그랬지.”

“그래서 난 네게 소원이 생기는 날, 그 옆에 함께 있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어. 부족함 없는 네게 소원이 생긴다는 건, 분명 혼자선 해결하지 못할 일이 생겼다는 거니까.”

내게 소원이 없는 이유, 나조차도 몰랐던 이유를 헬리온이 알려주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큰 부족함 없이 행복한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만큼 절박한 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내게 잃을 것이 생긴다면, 그때야말로 내게 소원이란 것이 생길 것 같았다.

“네가 힘들 때, 손 내밀면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게 그날 말하지 못한 내 소원이야. 하지만 만일 그런 날이 오더라도 넌 날 봐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게 난 너무 두려워.”

그가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붙잡힌 손에서 전해지는 떨림과 열기. 그 속에서 지금껏 말하지 못한 헬리온의 감정들이 느껴졌다.

“여전히 네게 난, 어머니 손에 이끌려 황궁을 떠난 어린아이인 거야? 그 모습 그대로 네 마음속에서 한 뼘도 자라지 않은 거야?”

“…….”

“하루도 널 잊은 적이 없는데.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내 마음속에서 하루도 네가 자라지 않은 날이 없는데…….”

“…….”

“얼마나 더 커야 하는 거야?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알려줘, 이슈텔. 제발…….”

“아니야, 헬리온. 나는-”

그를 달래주고 싶었지만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투른 말로는 그를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날 잡은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은 어릴 적 내 기억과는 달리 무척 컸다. 이제 와서야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난 네가 공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제 같은 기회를 받고 싶지 않아. 나에게 네가 전부인 것처럼, 너한테도 내가 유일했으면 좋겠어.”

헬리온이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상관없어. 나 기다리는 거 잘해. 그러니까 이슈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와줘, 나한테.”

곧 헬리온은 몸을 돌려 새장을 나섰고, 홀로 남겨진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헬리온은 황제의 마음을 돌려놔야 하고, 일리드의 편에 선 중앙 귀족들도 상대해야 했다. 여러모로 불리한 싸움에서 그가 어떤 패를 내놓을지 쉽게 예상되지 않았다.

헬리온이 잡고 있던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데인 것도 아닌데 그의 뺨에 닿았던 손바닥에 자꾸만 열이 피어올랐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은 내 마음속에 낯선 감정을 심어두었다.

그 낯선 감정이 무엇을 싹틔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다만 오늘 내게 전해진 그의 감정, 그리고 손에 닿은 눈물의 온도가 쉽게 잊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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