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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65화 (65/160)

65화 : 황후와 황태자비(2)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합니까?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라니까요. 그건 제 힘으로 어떻게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카리나가 답답하단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에보니의 뜻엔 변화가 없었다.

“아니, 할 수 있어. 자기가 폐하의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 그럼 그다음부터는 내가 폐하를 설득할 테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블라딘 백작님? 이건 떼를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그 보석. 훔친 사람이 되지 말고 진짜 주인이 되란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 좀 낫나?”

에보니가 카리나의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알아? 자기가 황후가 되고 나와 손잡은 대공이 무사히 황태자가 되면, 훗날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셔도 자기는 이 황궁에서 쫓겨나지 않아. 신생 귀족은 폐하께서 승하하신 후, 작위를 박탈당해도 아무도 편들어 주지 않지. 하지만 황후는 다르거든.”

에보니가 어깨를 활짝 펴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우리를 봐. 리젠트라의 가장 큰 정적이었지만 참패를 당하고도 단 한 명의 처형자도 나오지 않은 거. 왜 그런 줄 알아? 바로 황후를 배출한 집안이기 때문이지. 황후란 존재는 그런 거야. 제아무리 강한 정적이더라도 함부로 폐위시키기 어렵고, 남들처럼 밑바닥까지 끌려가지 않을 수 있어.”

“…….”

“게다가 이번 황태자는 황제의 조카가 아닌, 양자로 입적되어 황위에 오르게 될 거야. 그 말인즉, 네가 황후가 되면 황태자가 네 법적인 아들이 된다는 거지. 훗날 황제가 승하해도, 차기 황제의 법적 모후는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어.”

“……아무도 절 건드릴 수 없다고요?”

“그래! 설령 황제가 된 황태자와 척을 지게 되더라도 널 폐위 시키지 못해. 어떻게 그러겠어? 제가 황제가 된 건 전부 나와 너의 공인데!”

카리나의 마음이 흔들리는 기색이 보이자 에보니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황후가 되고 그다음에 황태후가 돼. 그러면 넌 평생을 황실의 어른으로 살 수 있어. 나이 차가 얼마든 간에 넌 황실의 최고 어른이고, 이슈텔은 황후라 할지라도 네가 살아있는 한 너보다 아랫사람이 될 수밖에 없거든.”

에보니가 대리석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곤 꿈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번 상상해봐. 너무 즐겁지 않아? 평생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내 발밑에 있는 거.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전 그렇게까지 바란 적 없습니다.”

이슈텔 리젠트라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 그녀보다 높은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블라딘 백작님. 더 이상 제게 헛된 바람을 넣지 말아 주시죠. 백작님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아하하! 그랬어? 하지만 그게 온전히 내 탓만은 아닐 텐데?”

에보니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 그저 네 마음 한구석에 고이 잠들어 있는 감정 하나를 깨워줬을 뿐이야. 그 감정을 눈덩이처럼 굴리고 굴려서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만드는 건 전부 네 선택인걸?”

에보니가 제 관자놀이 근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넌 이제 내 말이 자꾸만 떠오르게 될 거야. 황후가 되고 황태후가 되는 상상으로 밤에 잠까지 설치게 될걸? 그렇게까지 바란 적은 없다고? 아니, 이제 그렇게 바라게 될 거야. 내가 계속 널 자극할 거거든. 너도 모르는 감정을 일깨우고, 억누른 욕망에 불을 지필 거야.”

“왜 제게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난 ‘카리나’라는 패가 아주 마음에 들거든. 재미있잖아. 네가 종국에 어떤 모습이 될지 기대되기도 하고.”

“저도 신경 안 쓰는 제 미래를 걱정해 주시다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도 자기에게 참 감사해. 자기가 영리한 사람이라서. 지금은 이렇게 귀엽게 툴툴거려도 결국엔 내 계획이 최선이란 걸 깨닫고 내 뜻대로 움직여 줄 거잖아.”

칭찬하듯 비아냥거리는 에보니의 말투에 카리나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욕을 내뱉었다. 대귀족이지만 귀족답지 않은 에보니는 그런 무례조차 미소로 너그러이 넘어갔다.

“바로 황후가 될 수는 없을 거야. 우선 공작 부인 작위부터 받자고. 돌아가신 황후 폐하께서 태자비 시절 받으셨던 ‘록펠트 공작 부인’ 말이야. 그럼 이슈텔과 동등한 신분이 되는 거지. 그다음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겁니까? 다짜고짜 황후가 되라고, 공작 부인 작위부터 받아오라고요? 폐하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다 반대할 게 불 보듯 뻔한데 대체 어떻게요?!”

카리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쳤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 역시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번 일은 섣불리 행동해선 안 된다는 걸.

‘언니 일만 아니면 절대 엮이지 않을 인간인데.’

카리나가 에보니를 노려보며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복수를 위해 기꺼이 맞잡은 손이 이렇게 피할 수 없는 양날의 검이 되어 제게 돌아온 것이다.

“왜 이렇게 신경질을 내? 다 자기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

에보니가 카리나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며 혀를 끌끌 찼다.

“현실을 직시해, 카리나. 결국 너한테 남은 게 뭐가 있어? 조카를 돌려받기를 했어, 언니의 복수를 제대로 하길 했어? 약해 빠져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황후가 됐을 때 네가 얻을 수 있는 걸 생각해. 조카를 돌려받고 싶은 거 아니야?”

루비아의 이야기에 카리나가 심란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에보니의 말이 맞았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위에서 버티고 있는 한, 루비아는 계속해서 실란다 백작가에서 자라게 될 것이다.

루비아를 돌려받기 위해선 이슈텔보다 강한 권력을 가져야만 했다.

“내가 말한 대로 폐하께 가. 가서 폐하께서 널 안쓰러워서 어쩔 줄 모르시게 만들어. 다짜고짜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징징거리기라도 하란 말이야.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겨우 시킨다는 게 제국의 아버지께 가서 어린애처럼 떼나 쓰라는 겁니까?”

“왜? 자존심 상해? 그런데 어떡해, 자기는 고작 그 정도 용도로밖엔 쓸모가 없는데.”

카리나를 향해 고개를 꼿꼿이 치켜든 에보니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낮게 목소리를 울렸다.

“이렇게 이슈텔 리젠트라처럼 목 빳빳하게 쳐들고 폐하께 가서 ‘나 황후 시켜주세요.’라고 하려고 했어? 아니지, 아직 자기는 그 급은 못 되지.”

“왜 또 그분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자기를 자극하기에 그 여자만큼 좋은 미끼가 없으니까.”

카리나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본 에보니가 딱딱한 표정을 풀고 픽 웃었다.

이슈텔과 카리나. 지켜보면 볼수록 참으로 재밌는 관계가 아닐 수 없었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다른 사람한테 고개 숙이고 아쉬운 소리 하는 거 본 적 있어? 없지? 그 여자의 권력은 다른 사람한테서 빌려온 게 아니니까. 그게 너와 그녀의 차이야. 넌 폐하가 안 계시면 뭣도 아니잖아.”

“…….”

“그러니까 황후가 돼. 황후가 되고 황태후가 되면 네게서도 권력이 나오게 될 테니까.”

에보니는 생각에 잠긴 카리나를 힐끗 보고는 테이블 위에 두었던 챙 넓은 모자를 챙겼다.

“여태껏 그 여자한테 자기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계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 그럼 앞으로 좀 더 질척하게 엮여보자고.”

모자챙 아래로 생긴 그늘에 에보니의 얼굴이 덮였다. 하지만 카리나를 향한 보랏빛 안광만은 위험하리만큼 선명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어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 * *

일리드가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 이후, 나는 다시금 그와 만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내 처소로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하녀들을 시켜 매일 편지를 보냈다. 나는 그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일리드는 처소에서 나와 다시 업무로 돌아왔다. 주군의 은둔 생활에 마음 졸였던 남부 가신들은 두 팔 벌려 일리드의 복귀를 환영했다. 황제께서도 어전 회의에 참석하는 일리드를 칭찬하시며 그에게 중요 업무를 많이 맡기셨다.

남부와 휘어튼가에 대해 조사하는 라비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결과를 전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들려줄 이야기를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론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게 두렵기도 했다.

황궁의 안살림은 전부 카리나가 가져갔고, 일리드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늘 바쁘기만 했던 내 일상에 의도치 않게 여유라는 것이 생기게 됐다.

나는 새장을 찾았다. 요즘 들어 하는 일이라곤 이렇게 새장에 오거나 헬리온의 업무를 함께 봐주는 일, 단 두 가지뿐이었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아 이곳 새장에서 헬리온을 만나기로 했다.

“이슈텔, 슬퍼? 슬퍼?”

맨날 나를 놀리기 바빴던 메이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작은 머리통을 내 어깨에 비볐다. 내가 굳은 표정으로 서류만 보고 있으니 걱정이 되었나 보다.

“아니야, 난 괜찮아.”

“이슈텔 슬프면, 프리모스 슬퍼.”

메이는 프리모스를 유난히도 좋아했다. 그가 죽은 후로는 한동안 밥도 먹지 않고 슬피 울기만 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이렇게 그를 떠올리곤 했다.

“너도 프리모스가 보고 싶니, 메이?”

“프리모스가 이슈텔 사랑해! 프리모스가 이슈텔 사랑해!”

옛 주인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메이가 목청껏 사랑을 외쳤다. 나는 기특한 녀석의 머리와 목을 쓰다듬어 주었다.

“헬리온도 이슈텔 사랑해! 아주 그냥 엄청 엄청 사랑해!”

“메이, 너 그런 말은 어떻게 배웠어? 헬리온이 가르친 거야?”

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자 메이가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눈! 눈!”

“눈……?”

“프리모스 눈! 헬리온 눈! 이슈텔 사랑해!”

“프리모스랑 헬리온의 눈이 날 사랑한다고?”

“부끄러워! 부끄러워!”

메이가 내 품에 머리를 파묻으며 귀엽게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 메이가 제일 똑똑하지.”

나는 귀여운 녀석에게 달콤한 사과 한 조각을 건네주었다. 메이가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사과를 물고 제 새장으로 날아갔다.

‘프리모스와 헬리온의 눈이 같은 색이긴 하지.’

황태자와 대공들 모두 황가의 상징인 푸른 눈을 물려받았다.

두 대공이 황궁에 온 이후, 메이는 헬리온 못지않게 자주 일리드를 보았다. 영리한 아이이니 세 사람 모두 같은 눈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메이는 끝내 일리드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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