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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64화 (64/160)

64화 : 황후와 황태자비(1)

황궁의 황후전은 주인을 잃은 후 오랜 시간 비어있었다. 하지만 윈테라 공작 부인은 황후전의 온기를 잃게 하고 싶지 않단 이유로 황후와 생전 가까웠던 이들에 한해 그곳을 개방해두었다.

대표적인 예로 황후의 친정 가문과 시녀장이었던 투렌 남작 부인, 사돈이 될 리젠트라 공작가와 릴체 후작가가 있었다. 황제의 외가인 블라딘 가문 역시 황후전에 출입이 허가된 몇 안 되는 가문이었다.

공작 부인의 명령으로 하녀들이 늘 깨끗이 청소해두기 때문에 꼭 산 사람의 방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얼마 전, 공작 부인은 손이 여물고 꼼꼼한 에시에게도 황후전 청소를 맡겼다.

오늘도 에시는 콧노래를 부르며 황후전 청소를 시작했다.

“나처럼 운 좋은 아이가 또 있을까?”

아름답고 고귀한 공작 부인은 모든 제국민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분의 눈에 들어 황궁에 오게 된 건 분명 엄청난 행운이었다.

게다가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대공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았고, 제국민의 아버지인 황제 폐하와 종종 마주칠 수 있어 무척 기뻤다.

“그러고 보면 카리나는 정말 대단한 거야. 난 하녀만으로도 너무 좋은데, 카리나는 폐하를 가까이서 모시고 작위까지 받았잖아.”

그렇게 높은 신분까진 바라지도 않는 에시였다. 그녀는 기분 좋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깨끗이 빤 걸레를 들고 황후전의 화장대를 닦았다.

“어머, 너 황후전 담당이었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시가 깜짝 놀라며 거울을 보았다. 짙은 보랏빛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카리나가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아, 카리나! 나 지난주부터 황후전에 배정받았어.”

“잘됐네. 여긴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지 않아서 대충해도 티도 안 날 거야.”

“에이, 대충하면 안 되지.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데.”

“중요하면 뭐 해. 어차피 주인도 없는 곳인데. 죽은 사람 방이라 그런지 어째 으스스한 것 같기도 하고.”

카리나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들어 황후전을 살폈다. 황제전에 버금갈 만큼 커다란 처소는 여러 개의 방과 방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얼마나 많은 황금이 들었는지 시선이 닿는 곳곳마다 휘황찬란한 빛에 눈이 시릴 정도였다.

‘너무 사치스러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카리나가 에시를 보았다.

“넌 어떻게 지내? 가족들은 다 잘 지내고?”

“응. 내가 부치는 돈으로 예전보다 훨씬 잘살고 있어. 그러는 넌?”

“얘도 참, 보면 모르니? 난 이렇게 팔자에도 없던 호사를 누리고 살잖아.”

카리나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쫙 펴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둥그렇게 퍼지며 나풀거리자 에시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너만큼 출세한 사람이 없지. 플레코 광장 사람들이 모두 너를 자랑스러워해. 황제 폐하의 하녀가 된 것도 경사스러운 일인데 작위까지 받았잖아. 정말 대단해, 카리나.”

“그래? 난 언니 일로 이런저런 뒷말이 오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카리나가 씁쓸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에시는 고개를 저으며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귀족들은 너를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해도 우리 같은 평민들은 안 그래. 오히려 실란다 백작을 그렇게 만든 너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네 덕분에 평민들은 귀족한테 억울한 일을 당해도 승소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

“내가…… 희망이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카리나의 가슴에 뭉클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죽은 언니가 남긴 조카를 돌려받지도 못했고, 실란다 백작을 완전히 처결하지도 못했다. 실패한 복수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평민들에게는 의미 있는 결과였던 것이다.

“그래서 난 네가 가능한 한 높은 자리까지 갔으면 좋겠어.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많이 도와줄 수 있게.”

에시의 말에 카리나가 빙그레 웃었다.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미 평민이 자작 위를 받은 것만으로도 귀족들의 멸시와 조롱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이상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먼저 와있었구나, 자기야.”

카리나와 에시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 문 근처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인기척도 없이 도착한 에보니 블라딘이었다.

“아, 블라딘 백작님!”

에시가 허둥지둥 자세를 고쳐 잡고는 에보니에게 인사했다. 에보니가 손을 훠이 내저으며 아이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뭘 그렇게 놀라? 괜찮아, 괜찮아. 그런데 내가 여기 린턴 자작이랑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잠시 자리 좀 비켜주겠니?”

“네, 백작님.”

에시가 종종걸음으로 황후전에서 나갔다. 에보니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외투와 모자를 걸어두고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고개를 들자 천장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는 여기 처음 와보지?”

“예. 처음입니다.”

“잘 봐둬. 여기가 황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이 올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니까. 내 고모할머니가 머무셨던 곳이자, 리젠트라가가 그렇게도 오고 싶어 하는 곳.”

“제가 잘 봐둬서 뭐 하나요. 어차피 저랑은 상관없는 곳인데.”

에보니의 기대와 달리 카리나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에보니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했던 약속 기억나? 내가 자기의 복수를 도와주면 자기도 날 도와주겠다고 했던 거.”

“그럼요. 똑똑히 기억합니다.”

“내가 자기의 쓰임새를 정했어.”

에보니가 자축하듯 양손을 마주치며 큰소리로 박수를 쳤다. 그녀의 밝은 표정이 꼭 좋은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카리나는 저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그게 뭔가요?”

“이 방의 주인이 돼.”

순간 카리나는 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미친 건가?’

제 두 귀는 정상이었으니, 상대방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장난이 심하십니다, 백작님.”

“왜 다들 내가 하는 말을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난 매분 매초 늘 진지한데.”

“진심이세요?”

“당연하지.”

에보니가 뭐가 문제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도 기가 막혀 말문조차 막힌 카리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백작님도 항간에 떠도는 그런 질 낮은 소문을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죠?”

“질 낮은 소문이라면……?”

“그걸 지금 제 입으로 말하게 하시는 건가요?”

카리나가 발끈하자 에보니가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뭐 사실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지. 나도 처음에 자기를 만나러 갔을 땐 얼마나 예쁜 얼굴인지 한번 보자는 마음으로 갔으니까. 자기가 황제 폐하의 정부인 줄 알았거든.”

헤브론 황제가 평민 출신 하녀를 아끼고 귀족 작위까지 내린 건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평민들 사이에선 능력 하나로 신분 상승을 이뤄낸 꿈같은 이야기겠지만, 귀족들 사이에선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카리나를 황제의 애첩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리젠트라 공작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을 뿐.

카리나 역시 그런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황궁에서 함께 지내는 사용인들의 시선이 거슬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황궁 사용인은 귀족들의 정보통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모두 제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는 이에게 궁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곤 했다.

카리나는 그들에게 꼬투리 하나 잡히지 않으려 애쓰느라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에보니의 말까지 들으니 몹시도 짜증이 났다.

“정말 실망입니다, 백작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백작님은 그런 질 낮은 소문을 믿지 않으시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 말을 믿는다는 거지.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를 이용할 생각이거든.”

카리나의 곁으로 다가간 에보니가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람들이 네가 폐하의 정부라고 생각하는 건, 곧 네가 언제 정부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야. 그런데 정부가 다 무슨 소용이야? 정식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닌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든.”

“그래서 지금 저보고 폐하의 정실이 되라는 말씀이신가요?”

에보니가 게슴츠레 뜬 눈을 깜빡였다. 자신을 응시하는 보랏빛 시선을 외면하며 카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작위를 내리고 가까이에 두는 거랑 정실로 맞이하는 게 같나요, 어디.”

카리나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거절했다.

“게다가 폐하께서도 이미 저와 관련된 소문을 알고 계십니다. 괜히 소문에 불을 붙이기 싫어서 가만히 계시는 거지, 실은 폐하께서도 몹시 불쾌해하십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자기를 아끼시는 것 또한 사실이잖아?”

에보니가 카리나의 귀에 걸린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장난스럽게 툭 건드렸다.

“폐하께선 정말 좋으신 분이야. 마음씨도 너무 선하시고. 건강만 좀 더 좋으셨다면 걱정할 게 없을 텐데, 그러지 못하셔서 아쉬울 따름이지.”

“제가 곁에서 잘 보살펴 드리고 있으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지요.”

“하지만 우리도 대비는 해두어야지.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난 뒤의 일을 말이야.”

황제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에보니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장난스러웠다. 그 바람에 카리나는 에보니가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실 거야. 황태자를 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 서서히 당신의 주변을 정리할 때가 오리라는 걸. 다른 것들이야 큰 문제가 없겠지. 하지만 카리나, 자기가 걸린 일이라면 다르지. 자기는 존재 자체가 워낙 이질적인 사람이라 말이야.”

“…….”

“이슈텔 리젠트라가 자기를 싫어하는 건 폐하께서도 익히 잘 아시는 사실이잖아. 폐하께서도 당신이 승하하고 난 뒤에 이슈텔이 자기를 가만두지 않으리란 걸 아실 거야. 그리고 귀족들 사이에서 자기가 끝끝내 부유하는 이물질처럼 겉돌 거라는 것도.”

에보니가 손가락을 유연하게 움직이며 벌레 기어가는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반대편 손으로 벌레를 탁 내리치는 시늉을 하고는 낄낄거렸다.

“그분은 네게 미안한 감정을 갖고 계셔. 널 총애해서 이슈텔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생각하시니까. 그분은 널 지켜주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실 거야. 당신이 승하한 뒤에도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하게.”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에보니의 의뭉스런 태도에 질려버린 카리나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제야 에보니가 입가에 미소를 지우고 말했다.

“황후가 돼. 황후가 되어 이슈텔 리젠트라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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