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62화 (62/160)

62화 : 남부 이야기

“이리로 들어오십시오, 테셀라 경. 공작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시가 한 귀족 청년을 데리고 처소로 들어왔다. 내가 가볍게 목례하자 테셀라 경이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별말씀을요. 전에 남부 가신들의 저택에 초대해 주신 것도 있고 감사 인사도 드릴 겸 모신 거지요.”

에시가 테셀라 경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내가 갓 구워진 마들렌을 권하자 테셀라 경이 몸 둘 바를 몰라했다.

테셀라 경은 일리드가 볼테로 황자를 따라 남부 대공령으로 갔을 때부터 그의 시종이던 사람이다. 일리드와 가까운 사이인 그는 최근 일리드의 처소를 드나드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오늘 테셀라 경을 부른 이유는 일리드의 근황을 묻기 위해서였다.

일리드가 처소에서 나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는 어전 회의에 불참하는 것은 물론, 황제 폐하와의 식사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일리드를 부르거나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본인께서도 식사 자리에 불참하셨다. 게다가 헬리온이 낸 안건도 일리드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는 이유로 자꾸 미루고 계셨다.

폐하께서 헬리온과 거리를 두시는 걸 알기에 그걸 지켜보는 나 또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을 끝내기 위해선 일리드가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요새 남부 저택은 어떤가요? 다들 잘 지내고 계시죠?”

“예? 예?!”

차를 마시던 테셀라 경이 이상하리만큼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그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황급히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왜 그렇게 놀라시죠? 저택에 도둑이라도 들었나요?”

“예에-?!”

긴장을 풀어주고자 농담을 던진 건데, 테셀라 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내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마른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왜 이러지? 정말 도둑이라도 든 건가?’

꽤 오랜 정적이 흐른 후에야 테셀라 경은 내 말이 농담인 걸 알아차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야 늘 비슷합니다. 함께 대공 전하를 모시고, 남부에 계신 볼테로 선대공과 연락을 주고받고 그렇게 지냅니다.”

“테셀라 경은 남부에 있을 때부터 일리드 대공의 시종이었다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 일리드 대공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겠군요.”

“그렇지요. 대공께서 수도를 떠나 처음 남부로 내려오셨을 때, 저희 가문에서 적응을 도와드렸으니까요.”

“그럼 제 질문에도 대답해 줄 수 있겠군요.”

“제가 아는 한에서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에라 휘어튼을 아시죠?”

그녀의 이름에 테셀라 경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그는 잠시라도 생각할 시간을 벌려는 듯 얼마 남지 않은 차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예. 압니다.”

“얼마 전 광장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은 익히 들어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예…….”

“일리드 대공을 습격한 사람이 휘어튼 부인이라는 것도 당연히 들으셨죠?”

“예, 보고를 받아서 알게 됐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도 사람을 시켜 휘어튼 가문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본 바가 있는데, 역시 남부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조사에 한계가 있더군요.”

“한계라 하시면……?”

“휘어튼 가문은 왜 멸문당한 겁니까?”

단도직입적인 내 물음에 테셀라 경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짧은 순간 그의 얼굴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이 스쳤다.

은밀히 휘어튼가를 조사하던 라비는 얼마 전 내게 희한한 정보 하나를 들려주었다.

일리드의 약혼녀였던 시에라 휘어튼이 병으로 죽고 얼마 후, 그녀의 아버지인 휘어튼 경이 처형당했다고 했다. 휘어튼 부인은 그 충격으로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리게 된 거라고.

죄목은 밝혀지지 않았다. 재판도 거치지 않고 볼테로 선대공의 재가만으로 처형이 진행됐다고 했다.

“대공비를 배출하기로 한 집안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처결할 수가 있죠?”

“그, 그것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테셀라 경이 오한이 난 것처럼 몸을 달달 떨었다. 어찌 대답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테셀라 경,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대답을 재촉하자 테셀라 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하다면 이 순간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저, 그……. 공작 부인. 지금부터 제가 드릴 말을……. 아무한테도 제가 했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특히 일리드 대공께도요.”

이제야 말할 마음이 드나? 나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셀라 경이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일리드 전하와 시에라 양은 어릴 적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마치 공작 부인과 돌아가신 황태자 전하처럼 말이죠. 하지만 황태자 전하가 승하하시고 대공께서 새로운 황태자 후보가 되면서 둘 사이의 약혼은 깨지게 됐죠. 그게 시에라 양에겐 몹시도 충격이었나 봅니다.”

“그랬을 테죠.”

“예. 그 때문에 그녀의 지병이 악화됐던 모양입니다. 언제부터 병을 앓았는진 모르겠지만, 시에라 양은 죽기 몇 달 전부터 심한 각혈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 시에라 양은 자신이 아프단 사실을 숨기고 대공과 결혼하려 했단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거기서부터 이 모든 사달이 벌어진 겁니다.”

테셀라 경이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시에라 양은 점점 미쳐갔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그녀를 안쓰럽게 여겨 몇 번 그 댁을 방문했는데, 그럴 때마다 귀신에 들린 것처럼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더랍니다.”

“…….”

“그리고 문제의 그 사건이 있던 날……. 시에라 양이 전하께 자신이 곧 죽을 것 같으니 마지막 소원을 들어 달라고 했답니다. 그 소원이라는 게 조금 섬뜩하긴 한데…….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러 와 달라고 한 것입니다. 본디 두 사람의 결혼식 날 입기로 한 옷을요.”

“그래서 대공께서 몰래 그녀를 만나러 가셨나요?”

“예. 시에라 양의 편지를 받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신전으로 가셨습니다. 볼테로 선대공께서 시에라 양과의 만남을 금지하셨지만, 한때 약혼자이자 오랜 친구였던 이를 한순간 잘라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테셀라 경이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던 겁니다. 전하를 불러낸 시에라 양은……. 전하와 함께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하와 같이 죽다니요?”

“그 무렵 정신이 온전치 못한 시에라 양이 대공을 찔러 죽이려 한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너무 사랑하니까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며 그런 끔찍한 짓을 벌인 거지요. 다행히 대공께선 간신히 그 칼을 피하셨고, 시에라 양은 곧바로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대공을 죽이고 자신도 따라 죽으려 미리 독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테셀라 경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끔찍한지 어깨를 떨며 몸서리를 쳤다.

“일리드 전하께선 그 일을 묻고 싶어 하셨지만, 신전을 지키던 기사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볼테로 선대공께선 극노하시어 휘어튼 경과 부인을 당장 잡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감히 대공비가 될 딸의 지병을 숨긴 죄와, 황족 살해 미수죄로 처형하신 겁니다. 하지만 처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휘어튼 부인이 정신을 놓아버리자 부인만은 살려주어 먼 친척 집으로 보내신 겁니다.”

“그럼……. 휘어튼 경은 정말 처형당한 겁니까?”

“안타깝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휘어튼 가문의 모든 재산과 영지는 몰수당하고 경께서는 참수되셨습니다. 잔인한 처사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볼테로 선대공께서 얼마나 아드님을 아끼시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황가의 첫 아이이기도 하고, 정비께서 낳은 유일한 자식이기도 하니 그런 무거운 벌을 내리신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희 남부 귀족들 사이에서도 충격적인 사건인지라,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릴체 경께서 조사하러 오셨을 때도 그 가문을 안다고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저희 남부 가신들도 대부분 휘어튼 가문을 동정하는 입장인지라 이 사건이 커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것입니다. 다른 뜻은 전혀 없으니 부디 그날 일에 대해선 너무 저희를 원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잘 모르는 제가 들어도 너무나 끔찍하고 마음 아픈 일인데 곁에서 지켜보았을 이들의 심정은 어떨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어느새 테셀라 경의 목소리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지금 일리드 전하께서 충격이 크신 이유도 다 이 때문입니다. 겨우 가슴 속에 묻어둔 지난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신 거죠. 병으로 죽어가는 연인이 같이 죽자며 목에 칼을 들이미는 일이 어디 흔한 일이랍니까.”

코끝이 빨개진 그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축축해진 눈가를 닦았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공작 부인, 부인께서 일리드 대공께 가서 이제 그만 밖으로 나오시라 설득 좀 해주십시오. 충격이 크신 건 이해하지만 계속 이대로 있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습니다.”

테셀라 경이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내가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란 믿음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제가 간다고 해결될까요. 대공께서 겪고 계신 슬픔을 제가 위로해 드릴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

“하지만 공작 부인께서도 약혼자를 잃은 슬픔을 아시지 않습니까. 분명 저희 가신들보다 대공께 훨씬 도움이 되실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테셀라 경의 거듭되는 부탁에 내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저, 그런데 테셀라 경.”

“예, 말씀하시지요.”

“테셀라 경도 시에라 휘어튼 양과 잘 아는 사이였습니까?”

“네, 그랬지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다 보니 제 친구이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저와-”

나는 말을 맺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시에라 양과 많이 닮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 만일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애써 미소를 지으며 테셀라 경을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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